블로그에 이렇게 일기 같은 걸 쓸 공간을 마련해두면 이게 내 방처럼 느껴져서 너무 날것의 표현이 튀어나오곤 한다. 이틀사흘쯤 그렇게 쓰다가 걍 다 내렸다. 아무튼 그렇게 쓴 것들을 챗지피티에 넣고 대화를 나눴다 했더니 친구는 그게 병이랬다. 기다리는 버스는 혼잡이고 햇빛은 밝다. 이런 날에는 모름지기 the bends를 들어야 한다. 라디오헤드는 나를 우울하게 만든 적이 없고 대체로 내 별것 없는 일상의 장면들을 조금 아름답게 만들어주었다. 나를 우울하게 한 건 라디오헤드 듣는 나를 난데없이 폄하하거나 비난한 이들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뭐 그런 사람들한테까지 인정받고 이해받으려고 애썼나 싶다.
1년 전에 쓴 일기 같은 것에 나는 자기가 가진 것엔 한없이 둔감하고 남이 가진 것에만 한없이 민감한 그런 인간이 되지 않겠다고 썼더라. 그건 참 쉽지 않은 일이지만 또 경각심이 들었고 그런 사람 옆에 있으면 더 그런 사람이 된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냥 닮는다는 게 아니라 내가 가진 것에만 그런 이들이 한없이 민감해지고 거기서 나는 한 사람이 아니라 그들이 생각하기에 내가 가진 것들로 환원되면서 내가 비인간화되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방어기제로 나는 다시 남이 가진 것에만 한없이 민감해지기 시작하고 내가 가진 것에는 둔감해지기 시작한다. 이런 상황들이 왔다갔다 하면서 균형을 찾아가는 것이리라 생각한다.
아 이렇게 생각하니 수동공격은 수동공격을 낳는구나 싶다. 억울함의 순환과 증식. 무책임의 정동경제. 이 모든 것을 유지보수하는 행위로서 수동공격이 있다.
그나저나 상담 가기 전에 이렇게 혼자 계속 뭘 주절주절 글로 정리하는 게 좋지는 않은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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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 청첩장 모임으로 정말 오랜만에 고등학교 동창들을 만났다. 좋았다. 편하고 반가웠다. 어떤 면에서 뒤늦게 친구들을 따라간 것 같다. 그리고 친구들은 내내 날 기다려 주었다. 자기들은 그렇게 생각도 안 하겠지만. 오늘도 역시 사치스러운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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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를 대단히 낭만화하거나 미화하기 싫은 일상에서 글쓰기 수업은 그 한줄기 낭만을 내가 자꾸 포기 못하게 만드는 사람들을 만나는 장소다. 오늘도 첨삭하며 그런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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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는 피아와 화나를 다시 들었고 오늘은 라디오헤드 초창기 앨범을 연짱으로 듣다가 이제는 너바나로 갔다. 악틱 몽키스를 자꾸 미뤄두는 것은 humbug, am, the car 같은 앨범에 있는 걔네 노래야말로 사람 뭔가를 후벼파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너바나든 라디오헤드든 우울이나 불안 같은 감정을 잘 모르고 잘 느끼지 못하던 시기에 처음 접하고 많이 들어서 그런 건지 나는 이게 우울감과 별 관련이 없다. 아무튼 … 루저 감성? 이런 거랑 인셀스러움과 연결해서 라디오헤드나 너바나를 패는 (특히 영미권) 어쩌구가 있는 것 같은데.. 주로 여성의 얼굴을 이미지로 세워서 i hate your taste in music 이라고 쓴다거나. 근데 잘 모르겠다. 최근에는 그냥 모든 취향이 어떻게든 문제 있는 것으로 이야기되는 것 같고, ‘미식’ 외에는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취미나 취향 같은 것이 거의 안 남은 것 같다. 왜 그럴까? 여기부터는 이제 그냥 완전 넘겨짚기이고 비난조이기도 하겠으나, 입술과 이빨과 혀와 코에 닿는 취미인 미식이라는 것은 사실 큰 훈련이 필요하지 않고 그냥 내 입에 안 맞으면 별로라고 해도 되는 영역이기도 하다. 그걸 사먹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주는 효능감이 있다. 하지만 록은 올드하거나 남성적이고 케이팝은 유치하거나 오타쿠스럽고 클래식은 젠체하고 힙합은 찌질하고 어쩌고 하는 그런 이야기들이라거나 이런 소설이나 시 읽는 사람 피해라, 이런 영화 좋아한다 그러면 피해라, 이런 것들이 요즘 sns에서 참 흔하다. 어떤 의미에서 식문화를 제외한 ‘문화’, 비과시적 소비와 취향에 대한 깊은 혐오나 기피, 평가 절하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주 많은 점프를 거치면 이것은 반지성주의…이런 것이 될 수도 있고. 긍정성의 과잉이라는 한병철의 오래된 진단은 짜증나지만 유효하며, 취향은 구별짓기의 역할을 여전히 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바로 그 점에서 그 자체로 반감을 불러일으킨다. 취향 소비는 특정한 분위기의 향과 인테리어 등등으로 환원, 축소되었고, 브랜드와 트렌드로 판단되는 편에 가까워진 듯하다. 소위 힙한 동네라는 곳들에서도 그렇게까지 독특한 무언가를 찾기는 쉽지 않다. 취향의 획일화. 그건 민주화가 아니다. 조금 더 좋은 걸 더 많은 사람이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기도 하지만, 그것에만 초점을 맞추고 각자에게 더 많은 시간적, 경제적 여유를 주지 않는 세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면 민주화는 시장화를 감추는 수사에 불과하다. 점점 더 많은 것을 돈이라는 단 하나의 기준으로 나열할 수 있게 하는 것을 자꾸 민주화 같은 말로 불러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엘리트주의라고? 나는 상품과 브랜드와 트렌드가 모두에게 닿는 사회가 아니라, 그것들 안에서 자신에게 고유한 조합을 찾아갈 수 있는 조건이 모두에게 닿는 사회를 바라는 것이다. 모두가 하나쯤은 통약되지 않는 것을 지니는 게 민주주의 사회 아닌가, 생각이 들고… 반드시 위계화되지 않을 수 있는 질적 차이를 서로 인식하고 그것을 대화의 계기로 삼는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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