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는 편집 이전의 원고입니다.
우주이기도 하고 피부이기도 하고 집이기도 한
돌들이 말하고 춤추고 빛난다. 오염되고 파괴되는 행성에서,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가 살아가는 땅에서, 우리는 돌을 주워 액자에 걸고 아름다운 영상에 담아낸다. 우리는 돌로 행성의 위기를 다루며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것일까, 아니면 현실을 직면하고 다시 지을 힘을 마련하는 것일까?
은유와 실재 사이: 장한나와 김아영
지금 서울시립미술아카이브에서 인류세를 주제로 진행되고 있는 «다시, 지구»전에서 볼 수 있는 장한나 작가의 작품들은 ‘뉴 락’으로 자연과 문명의 경계를 주제화한다. ‘진짜 돌’을 맞혀 보라는 영상 옆으로 현무암 사이에서 채집된 ‘뉴 락’들은 식물이나 곤충을 채집하여 기록하듯 손으로 한 스케치와 메모로 그 특성이 기록되어 있다. ‘인류세’와 ‘환경오염’이라는 키워드들로 엮일 수 있을 이 작품들은 독특하게도 새로운 대륙에서 새로운 종을 발견한 탐험가의 흥분까지도 담고 있는 듯했다. 원래 제주 바다에 거주하고 있던 현무암들 사이로, 인간에 의해 버려져 이주한 플라스틱이 녹아서 새로운 형태로 자라나기 시작했다. 장한나 작가는 뉴 락의 형태를 상세히 관찰하여 기록함으로써 현무암 사이에 안겨 함께 암석이 되어가는, ‘자연적인’ 과정을 보여준다. 여기서 돌은 은유가 아닌 실재다. 뉴 락은 단지 ‘돌과 같은’ 무엇이 되어가는 플라스틱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것이 자연과 맺는 관계 안에서 ‘정말 돌’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현무암. 김아영 작가의 <다공성 계곡 2: 트릭스터 플롯>의 ‘다공성 계곡’은 내게 구멍이 숭숭 뚫린 현무암을 상기했다. 지금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상설전 «한국현대미술 하이라이트»에서 볼 수 있는 이 작품은 예멘 난민들이 제주도에 들어올 때 생긴 사회적 논쟁과 난민의 존재론을 다룬다. 이 픽션의 주인공인 ‘페트라 제네트릭스’는 금빛 정육면체 여러 개가 뭉쳐서 공중에 떠다니는 미등록 이주자다. 그는 제주도를 닮은 섬 ‘크립토 밸리’에서 위협적인 존재로 규정되어 ‘스마트 그리드’라는 수용소에 격리되었지만, 결국 그곳을 빠져나가 섬 전체를 네트워킹하는 ‘어머니 바위’의 데이터와 결합한다. 위협적인 외부의 존재는 섬 전체를 지탱하는 가장 깊은 바위의 일부가 된다. 초현실적인 컴퓨터 그래픽은 돌이 살아서 움직이며 말하는 것이 전혀 이상해 보이지 않게 한다. 돌은 은유이면서 실재다. 돌은 미등록 이주자와 근원적 생명력을 은유하지만, 실제 섬을 이루는 암석이기도 하다.
세계와 가면 사이: 최찬숙과 언메이크랩
김아영 작가의 작품에서 돌은 페트라 제네트릭스의 고향과 이주 내내 우주의 이미지로 등장하고, 장한나 작가의 작품들에서 돌에 자리를 잡고 살아가는 플라스틱은 또한 돌이 되었다. 우주이자 피부로서의 돌은 «다시, 지구»전에서 볼 수 있는 최찬숙 작가의 <큐빗 투 아담>에서 두드러진다. 이 작품은 칠레의 구리 광산과 국제 전파 망원경 기지 등을 배경으로 자원 약탈과 죽음의 문제를 다룬다. 아주 높이 띄운 드론으로 그 넓고 붉은 땅을 찍어서 땅은 피부처럼, 개발의 흔적은 주름처럼 느껴진다. 그곳의 광산에서 발견된, 구리가 스며든 피부가 푸른빛을 뿜어내는 ‘코퍼 맨’에게 돌과 피부의 경계는 없다. 최찬숙 작가가 코퍼 맨의 3D 스캔 영상으로 보여준, 새까만 배경에 불규칙적인 구릿빛 점과 선이 가득한 단면은 우주처럼 보였다. 우주와 피부는 돌의 단면으로 반짝였다. 태초부터 언제나 돌은, 돌이 가득 담긴 땅은,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몸은, 그러니까 지구의 피부도 사람의 피부도 우주에 속할 뿐이라는 듯이. 돌의 단면은 아름다운 우주의 이미지로 소유와 박탈의 각축장인 현실의 비참에 대한 비판을 미적으로 설득했다.
«올해의 작가상 2025» 후보 언메이크랩의 작품 <시시포스의 변수>에서 산과 돌이 사라져 아무것도 없는 평야에 남은 시시포스들은 스스로 모래를 쌓아 산을 만들고 흙을 뭉쳐 돌을 만든다. 이들은 “그 돌은 늘 꼭대기에 있어야 한다”라는 문장을 진정으로 받아들여 결국 돌을 자신의 머리에 올렸다. 돌은 머리를 집어삼켜 머리를 대신했고, 정녕 스스로 늘 꼭대기에 있는 돌이 된 시시포스는 영영 기쁨의 춤을 춘다. 시시포스는 자기 소유의 돌을 굴려 올리지 않아도 되는 평야를, 평화를 견딜 수 없었다. 그는 자기 앞의 날것의 세계를 보는 대신, 돌에 자신을 가두고 춤을 췄다. 너무 매끄러워서 부자연스러운 영상 그래픽의 시대에, 의도적인 저해상도 그래픽은 자기 소유의 가면에 정주하는 데서 오는 쾌락에 유폐된 현실을 생생하게 부각했다. 집이 될 수 없는 소유물로서의 돌. 관객들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매혹과 참혹 사이
돌은 플라스틱이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새로운 돌이 되고, 위협적인 외계 광물이 데이터 사이로 들어와 섬의 일부가 되게 해주었다. 동시에 돌은 세계를 감추어 자신만의 쾌락을 즐길 수 있게 해주었다. 하지만 도피처조차 잠시 머물 수 있는 하나의 집이기에, 돌은 집이다. 극단적인 와이드샷이나 클로즈업, 초현실적 컴퓨터 그래픽이 만들어낸 아름다움으로 우리는 도피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어떤 돌에 자리를 잡고 살아가고, 예술은 아름다움이라는 이름의 집을 만든다. 어떤 순간에, 우리의 피부는 돌이 되고 집이 되어 우주를 향해 고개를 든다. 그리고 우리가 딛고 사는 이 거대한 돌을 굴리는 대신, 비로소 돌볼지도 모른다.
영화철학자 이지영은 『들뢰즈의 영화철학』에서 예술작품의 특정한 형식이 “참혹함을 매혹적인 것으로 만드는” 힘을 발휘한다고 썼다(112쪽). 하지만 예술이 참혹을 매혹으로 만든다면, 예술의 매혹은 또한 참혹을 전달한다. 아름다움은 참혹을 직면할 힘을 기를 수 있는 집이 된다. 무너진 혹은 무너지는 세계를 다시 지을 힘을, 혹은 그걸 위해 마땅히 부숴야 하는 것들을 우리의 몸에 새김으로써 말이다. 작품 앞에서 당혹감에 벌어지는 입, 크게 떠지는 눈, 찡그려지는 이마, 깊은 한숨, 수축하는 귀, 결국 돌리는 고개, 이 모든 것에 말이다. 돌이 집이 되듯 세계는 몸이 된다. 돌들은 상기했다. 세계는 파괴하고 싶을 만큼 추하지만, 다시 구축하고 싶을 만큼 아름답다고. 세계가 되어 버려서 세계의 비참을 참을 수 없게 된 몸은 아름다움을 되짓고자unmake 꿈틀댄다.
미술관에서 무너진 세계를 본다는 것은 그런 의미다. 매혹과 참혹 사이에서 세계를 다시, 짓기. 내 머리 위에 올려두고 소유할 수 없는, 우주이기도 하고 피부이기도 하고 집이기도 한 돌들을 만지작거리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