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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분’이란 곧 사회적으로 규정된 일련의 역할과 의무이다. 그 역할에 부과된 책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것만이 이 사회에서 적법한 ‘한 사람’의 존재가 되는 길이라는 폭력. 그 폭력성을 가장 극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아픈 몸이다. 아픈 몸은 자기로부터 무언가를 뽑아내어 생산하지 못하고, 대신 여러 사회적 자원을 소비하기만 하는, 즉 사회를 ‘축내는’ 존재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건강이 지고의 가치이며,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마땅히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건강중심주의(healthism)’는 한국 사회에서 1인분의 환상과 결합해 있다. ‘1인분’이라는 사회적 의무는 근본적으로 ‘건강’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건강하다는 것은 ‘1인분 인간’으로서의 사회적 책임을 완수할 수 있는 신체적이고 정신적인 여력을 갖추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건강을 보전하는 것은 개개인의 행복을 위한 실천을 넘어 사회적인 의무로서 받아들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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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론병을 진단받은 지도 만 11년이 넘은 지금, 나는 겉으로만 봐서는 아파 보이지 않는 데 도가 텄다. 이런 나의 경험을 가장 잘 포착하는 언어는 대학생 때 외국의 만성질환 커뮤니티에서 찾은 밈이었다. 의사가 환자에게 묻는다. ‘얼마나 아프신가요? 1부터 10까지 중에서 골라 대답해 주세요.’ 환자가 대답한다. ‘파이(π)만큼 아픕니다.’ 의사가 되묻는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환자가 대답한다. ‘낮은데, 끝이 안 나요.’ 파이만큼 아픈 경험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이렇다. ‘어느 정도 멀쩡한 척 할 만한 아픔이 끝이 보이지 않고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