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책을 고전이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그 책이 출간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우리의 세계와 그 안에서의 삶에 대한 새로운 고민을 던져 준다는 의미다. 수십 년이 지난 뒤에도 다시 들춰 볼 가치가 있는 책은 어떤 기준에서는 아주 드물고, 어떤 기준에서는 너무 많다. 그래서 기준을 확실하게 잡았다. 한국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수십 년 뒤에도 사회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돕고, 자신의 몸을 감각하는 일의 어려움과 절박함을 마주할 수 있게 돕는 두 권의 책을 골랐다. 더 나은 세계와 삶을 상상하는 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언제나 구체성과 절박함이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의 울퉁불퉁한 지층
‘가족’이라고 하면 무엇이 떠오르나? 사랑, 헌신, 돌봄, 책임감, … ‘가족’에 달라 붙어 있는 이런 단어들은 가족의 실제보다는 이상에 가깝다. 특히 이런 단어들은 단지 ‘가족’의 특성이 아니라,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서로 다른 방식으로 구체화된다. 가족에 대한 이미지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곤 한다. 하지만 그러한 모습을 충실히 담은 가족을 미디어가 아닌 현실에서 정작 발견하기 힘들며, 거기에 전제된 ‘남성 부양자’ 모델이 그대로 실현된 적이 없다는 점은 가족에 관한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너무 당연해서 다른 삶의 방식을 상상하기조차 힘든 규범들조차 역사적인 과정에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밝혀낼 때, 우리에게는 다른 삶을 그려낼 상상의 근력이 생긴다.
사회학자 조은주의 『가족과 통치: 인구는 어떻게 정치의 문제가 되었나』는 바로 그러한 근력을 주는 책이다. 이 책은 지금 한국 사회에서 가족이란 무엇이며, 무엇을 하는지 묻는다.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은 국가의 통치 기술과 권력의 역사가 개인의 삶 안에 파고든 아주 미시적이고 구체적인 과정을 통해 천천히 드러난다. 이 책은 한국 사회에서 가족과 인구가 언제, 어떻게 정치의 문제가 되었는지를 추적한다. 1960~70년대 산업화 시기, 박정희 정부는 급격한 경제성장을 추진하며 동시에 ‘산아제한’과 ‘가족계획’이라는 이름의 인구 정책을 전면에 내세웠다. 이것은 압축적인 경제 성장을 통한 ‘근대화’를 위해 필요한 노동력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인구’ 개념을 적극적으로 채택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인구는 단지 사람의 수가 아니라, 통계라는 장치를 통해 사람을 조절 가능한 과학적인 대상으로 구성한 결과물이었다. ‘정상가족’의 구성과 재생산은 이러한 과정들의 중핵에 있었다. 인구의 조절을 위해 적절한 양의 출산을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한 명의 남성과 한 명의 여성의 성적 결합으로서의 결혼과 그것으로 만들어지는 정상가족. 가족은 국가가 개입하고 관리하는 사회적 장치이자 통치의 핵심적인 장소가 되었다.
이 책의 놀라운 점은 이러한 논의를 단지 공식 문서나 발표에서 나타나는 제도적 흐름에 대한 분석이 아니라, 어느 지역 공무원이 남긴 일기, 당시 정책 설계 시점부터 긴밀히 개입한 의사들 개개인의 움직임처럼 아주 ‘작은’ 자료들을 집요하게 추적함으로써 성취해 낸 미시적이고 상세한 기술과 분석을 통해 실제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어낸 과정을 보여준다는 사실이다. 통계와 피임기술, 보건교육, 가정생활 지도 등은 단지 대통령의 선포나 정책 발표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새로운 기술과 조치들을 낯설게 느끼는 사람들을 그것에 익숙해지게 해야 하고, 그것을 전달하는 이들의 낯섦까지도 조율해내야 하는 문제다. 이것은 단지 거시적인 권력이 미시적인 현장에서 사람들에게 어떻게 파고드는가에 대한 분석일 뿐 아니라, 그것이 얼마나 지지부진하고 쉽지 않은 일인지에 대한 분석이기도 하다. 한국 사회라는 울퉁불퉁한 세계의 지층이 천천히, 조심스럽게, 하지만 과감하게 해부된다.
『가족과 통치』는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역사를 ‘작은’ 이야기들 안에서 구체적이고 정교하게 마주할 수 있게 하면서, 그러한 이야기들이 어떻게 ‘큰’ 이야기들 안에서 움직이고, ‘큰’ 이야기를 실재하게 하는지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책의 뒤표지에 적혀 있듯, 가족은 한국 사회의 역사 안에서 “국가와 개인, 젠더와 계급의 최대 격전지”로 만들어져 왔으며, 이 전장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가족을 주어진 친족 관계가 아니라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구성물로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일은 우리가 기대어 살 구석을 마련해주지만 동시에 우리를 우리가 원하지 않는 많은 것으로 몰아넣는 잔인한 토대를 바꾸어 낼 가장 중요한 단초 중 하나를 마련해줄 것이다.
부글거리는 감각으로부터의 사유
‘아픔’이라고 하면 무엇이 떠오르나? 10년 넘게 난치질환과 살아가며 질병과 장애의 경계를 고민하는 나에게 ‘아픔’에서 즉각 연상되는 것은 ‘통증’이라는 단어다. 아프다는 의미의 ‘통’과 증상의 ‘증’이 합쳐진 통증은 아픔을 증상으로 규정하는 의학적 관점을 담고 있다. ‘증상’은 그 배후에 어떤 질병과 같은 원인이 숨어 있으며, 그것을 규명하여 해결할 수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통증은 배후가 있는 아픔, 해결할 수 있으며 해결해야 하는 아픔, 따라서 파헤치고 규명해야 하는 아픔을 의미한다. 하지만 10년 넘게 원인불명의 자가면역질환과 살고 있기에 더욱 잘 알고 있다. 그렇게 파헤치고 규명하려고 애써도 알 수 없는 것이 훨씬 많다. 알 수 없는 배후의 원인보다 나를 멈칫하게, 쓰러지게, 지치게 하는 것, 다른 무언가의 ‘증상’이라고 여겨지는 바로 그것이야말로 일상의 모양을 만들어낸다. 다른 무엇도 아닌 아픔에 대한 이야기다.
원인과 증상, 진단과 처방, 치료의 언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아픔’을 다루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정말 아픔으로부터 출발하는 언어, 아픔으로 빚어내는 언어는 어떻게 가능한가? 오랫동안 아픔과 몸, 언어의 관계를 고민해 온 작가 메이의 『아프다는 것에 관하여: 앓기, 읽기, 쓰기, 살기』는 바로 이 지점에 대한 질문들을 안겨 준다. 앓기, 읽기, 쓰기, 살기라는 문제에 정답 같은 것은 없다는 사실을 메이는 자신의 구체적인 ‘투병기’가 아닌, 말 그대로 앓고, 읽고, 쓰고, 사는 일에 대한 자신의 사유의 기록으로 전한다. 메이 작가는 통상적인 ‘질병 서사’의 구성처럼 질병 경험을 연대기적으로 상세하게 묘사하지 않는다. 그는 알퐁스 도데와 버지니아 울프와 같은 작가들이 남긴 자신의 아픔에 대한 글, 혹은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와 같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읽고, 그것으로 자신의 아픔을 앓고, 그렇게 앓아서 아픔에 관한 글을 쓴다. 다른 이야기에 ‘기대어’ 쓰기보다, 그것을 ‘통하여’ 쓴다.
『아프다는 것에 관하여』가 다른 ‘당사자 서사’와 결정적으로 다른 지점이 이것이다. ‘나’와 ‘사회’라는 다소 거친 구분을 채택하자면, 이 책은 ‘나’에서 출발해서 (어떤 역사적, 제도적 총체로서의) ‘사회’에 도달하지 않는다. 어떤 해답으로서 제도적 변화를 직접 강조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나’와 (아직 알지 못하는 무수한) ‘너’ 사이에서 오가는 말들, 내가 나의 아픔을 충분히 이해할 수 없어서 읽은 타인의 글로부터 나를 발견하는 것, 어떤 ‘사회’ 안에서도 다 이야기될 수 없는 아픔의 질감을 포착해내고, 언어화하려 한다. 언어화한다는 것은 소통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내가 나와, 네가 나와 함께 느낄 수 있게, 그럼으로써 살 수 있게 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앓고 쓰기보다, 앓고 읽고 다시 앓으며 쓰는 일로 가능하다. 그렇게 이 책은 앓기, 읽기, 쓰기의 순환에 ‘살기’를 붙인다.
메이 작가는 아픈 사람들이 설명하기 어려운 자신의 통증을 어떻게든 의사와, 주변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해 그림을 그리거나 없는 말을 만들어 내는 것과 같은 것을 “절박한 창의성”이라고 불렀다. 몸은 모든 존재의 근원적 취약성이며, 언어는 인간이 특히 의존하는 소통과 관계의 도구다. 인간이 영영 벗어날 수 없는 몸과 언어라는 두 가지 제약 안에서 어떻게든 나를 이해하고, 다른 이들에게 닿고자 하는 절박한 마음, 거기서 편두통처럼 타오르는 창의성. 『아프다는 것에 관하여』는 그런 힘에 관한 이야기이자, 그런 힘으로부터 탄생한 글이다. 아픔이 스며든, 아픔에 스며든 삶을 무수한 이야기와 언어들 사이에서 살아내는 일에 대한 하나의 예증. 부글거리는 몸으로서 삶의 실제를 담아내려는 시도를, 우리는 오래도록 다시 파먹어야 할 테다. 그런 몸으로 앓고, 읽고, 쓰고, 살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