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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적 분노, 이중성을 견디며 세계를 짓는 힘

발행처
타우마제인
간행물
타우마제인
분야
학술
교양
인문
철학
분류
매거진 기고
권호
8
발행일
2025/12/15
* 아래는 편집되지 않은 초고입니다.
인간은 추상적 악에 분노하지 않는다. 분노는 언제나 구체적인 누군가, 혹은 어떤 상황을 겨냥한다. 그리고 이중성 혹은 위선은 교양의 시대 이래로 언제나 분노의 대상이었다. 교양의 개념이 처음 만들어진 독일에서 ‘Bildung’은 교양 이전에 형태, 구성이라는 의미다. 교양은 이전보다 나은 나를 건설해 나가는 과정이다. 성인식과 같은 의례가 청소년을 성인으로 만드는 것이므로, 의례 중에 있는 이는 청소년도 성인도 아닌 경계의(liminal) 존재라는 점을 발견한 인류학의 통찰처럼, 거듭난다는 것은 항상 ‘벗어나고자 하는 나’와 ‘되고 싶은 나’라는 이중의 ‘나’로 존재하는 일이다. 교양은 영원한 의례다.
이때 이중성은 교양인의 당연한 존재 양식이고, 그것에 대한 비판은 교양을 이해하지 못한 이의 행위가 되어 버리는 것만 같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두드러지는 ‘위선’에 대한 분노를 그저 ‘한국인들의 도덕주의’로 일축한다면, 그것은 기껏해야 “한국인들이란…”과 같은 체념으로 이어지는 민족 환원론이 될 뿐이다. 오히려 ‘위선’이 언제나 ‘지저분한 내면과 번듯한 외면’으로 정의됨으로써 당연히 분노할 만한 대상이 된다는 데 주목할 때, 지금 분노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더 이야기할 수 있다.

두 개의 위선

사적으로는 부도덕하면서도 공적으로는 고결한 얼굴을 내세우는 행위, 이를테면 진보적 가치를 말하면서 부동산 투기나 입시 비리 등을 저지르는 모습은 강한 배신감을 불러일으킨다. 반면 공적으로 무수한 이들을 죽음으로 내몰고도 가족에게 따뜻한 아버지였다는 서사는 좀처럼 위선이라 불리지 않는다. 후자는 위선보다 차라리 ‘선한 개인이 악마가 될 수밖에 없었던 세계의 비극’으로 이야기된다.
겉과 속이 다른 ‘위선’에서 ‘진짜’는 내면에 있는 악이 된다. 한 개인은 공적인 관계에서 자신의 도덕적 지위를 유지하거나 상승시키기 위해 외면을 선하게 관리함으로써 악한 내면을 감춘다. 그래서 ‘사생활’은 언제나 악한 내면의 증거가 된다. 이러한 통상적인 어법에서 선과 악은 본질적인 것이며, 한 인간은 결코 변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다. 본모습을 감추고 겉보기의 무언가를 연기할 뿐. 공과 사 사이의 불일치는 개인의 외면과 내면 사이의 불일치와 한 덩어리가 된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위선’은 이처럼 관계에서의 공과 사, 개인에서의 외면과 내면에 대한 뚜렷한 이분법을 전제할 때만 가능하다.
이 전제를 파헤치기 위해 이 글은 두 개의 위선을 제시한다. 사적으로 악한 사람이 공적으로는 선한 ‘공적 위선’과―대체로 ‘위악’이라고 부르는―공적으로 악한 사람이 사적으로는 선한 ‘사적 위선’이다. 위선과 위악 대신 공적 위선과 사적 위선이라는 새로운 이분법을 사용하는 이유는 기존의 이분법에 전제된 위계를 드러내기 위함이다. 사실 위선에 대한 분노는 위선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동조할 위선을 선택하는 것일 뿐일 수도 있다고. 위선과 위악의 이분법이 ‘진짜 내면은 선한 사람’이라는 환상으로 (실제로 해를 끼치는) ‘위악’을 감내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처럼.

진정성과 분노

우리가 흔히 분노하는 위선은 대부분 공적 위선이다. 그것은 공적으로 드러나는 모습에서 생겨나는 기대 때문일 수도 있고, 모든 인간은 결국 악하다는 전제에서, 누구에게든 실망하고 체념할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기대조차 질식시키는 세계에 존재하는 것은 위선과 위악이 아닌 위선과 악이다. 어쩌면 사적 위선이 이야기되지 않는 것은 실제로 선한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냉소가 보편적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공적인 문제에서 출발할지라도 결국 그 도착점은 그 문제에 얽힌 개인의 사적인 차원과 내면의 ‘진짜’ 악한 모습이 될 수밖에 없다. 위선은 이중성에 대한 태도를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겉과 속이 다르다는 데서 오는 분노는 진정성의 훼손에 대한 감각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앞뒤가 같은 사람, 언행이 일치하는 사람에게 진정성이라는 의심받지 않는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이중성에 대한 분노를 가능하게 하는 가치 체계다.
진정성은 종종 일관성과 똑같은 의미로 사용되지만, 진정성은 일관성보다는 일관성을 성취하고자 애쓰는 과정에 가깝다. 근대 사회에서 한 개인의 내면이 그를 둘러싼 세계와 불화할 때, 내면의 열망으로 세계를 바꾸어내고자 싸워나가는 것이 진정성이기 때문이다. 즉, 분노는 진정성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일관성에 대한 기대가 무너졌을 때 생기는 감정이기 이전에, 일관성을 이뤄내기 위해 자신을 밀어붙이는 진정성에서 나오는 힘이다. 이때 진정성은 내가 살고 싶은 삶, 내가 되고 싶은 모습, 이것들이 가능한 세계를 만들기 위한 분노를 끌어내는 조건이 된다.
진정성이 일관성을 성취하고자 애쓰는 과정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거듭나기 위한 노력, 즉 이행의 경험에 부여되는 가치다. 흔히 이야기되는 것과 달리, 진정성은 이중성과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이중성을 잘 다루기 위해 필요한 고민이자 방법이다. 진정성은 당장 해소되지 않는 이중성이나 모순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일관성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윤리적으로 관리하는 것이다. 언제나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이중성의 잔여를 인정하면서도 거기에 그저 머무르지 않으려는 태도로서의 진정성.

창조적 분노, 그리고 순진하고 절박한 믿음에 관하여

지금 한국 사회에서 일부 정치인들은 급속한 산업화와 IMF 외환위기, 투기 자본주의의 밀물로 찾아온 한국 사회의 정치경제적 불안정을 소수자에 대한 증오 선동으로 은폐하고 있다. 이 증오 선동은 자기 삶의 괴로움에서 비롯되는 세계에 대한 분노를 자신들의 특권을 유지하는 데 동원하기 위해 소수자들을 희생양으로 삼는 폭력이다. 이때 이들이 동원하는 분노는 인간답게 살고 싶지만 그러지 못한다는 데서 나오는 분노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이 마땅히 얻어야 할 특권을 빼앗겼다는 르상티망(ressentiment)에서 비롯된다. 더 나은 삶의 모습을 특권으로만 상상할 수 있게 만드는 사회에서 분노는 왜곡된 응분의 몫에 대한 원한을 증폭한다. 여성, 장애인, 외국인, … 오랜 시간에 걸쳐 이들이 얻어낸 삶의 최저선이 자신들의 몫을 빼앗는다고 느끼는 이들은 소수자들에 대한 폭력에 가담하기에 이른다. 그것이 지금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두드러지는 극우화의 한 계기다.
이런 분노는 문제를 천천히 들여다보고 해결책을 모색하기보다 응분의 약탈자를 빠르게 색출하여 추방하고 처단한다. 이때 분노는 타자를 제거한다고 자신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 이외의 방법을 찾을 힘을 남겨 두지 않는다. 분노는 타자의 파괴를 넘어 소진과 자기 기만으로 이어진다. 내가 잘 살고 싶다는 마음을 특정한 이들에 대한 분노로 바꾸거나, 잘 살 수 있는 조건을 이미 갖춘 이들은 빠르게 일관성을 취득할 수 있다. 익숙하게 폭력적인 세계에서 자신의 욕망을 빠르게 정당화할 때, 이미 곳곳에 존재하며 계속해서 창발하고 있는 함께 살아갈 만한 세계들은 파괴되기 시작한다. 아름다운 일관성뿐 아니라 악한 일관성도 있다.
하지만 모순을 직면하면서도 어떻게든 더 나아지고자 하는 태도로서의 진정성에서 비롯되는 건 나와 나의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고, 함께 삶을 기획하고 살아갈 수 있는 세계를 향한 열망이고, 그것을 가로막는 지금의 세계에 대한 분노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기존의 세계를 부수는 파괴적 분노가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짓는 창조적 분노다. 나는 이 분노가 여전히 세계를 바꿀 수 있고, 나 또한 더 나은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굳은 믿음 위에서만 가능하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다. 더 나은 삶과 세계를 가로막는 것이 무엇이든 포기하지 않겠다는 결의. 자기와 타자와 세계 사이의 불일치를 마주하고, 나의 이중성을 차분히 직면하고 견디며 우리가 함께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세계를 가까이서부터 찬찬히 짓는 일.
극도의 배신감과 분노를 자아내는 역겨운 이중성이 있는 한편, 더 나은 세계와 삶을 만들기 위해 창조적 분노를 이끌어내는 선한 이중성도 있다. 선한 이중성에는 변화에의 강한 열망과 믿음이 있다. 약한 이부터 죽어가는 지독한 혐오와 냉소의 시대에 인간도 세계도 변할 수 있다는 순진하고 절박한 믿음을, 진실된 분노를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