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라는 유령, 낡은 꿈과 바뀐 세계의 잔인한 착종에서
안희제 (인류학 연구자, 문화비평가)
안녕하세요, 문화비평가이자 인류학 연구자인 안희제입니다. 앞선 발표들 덕에 지금 한국 사회를 특정한 방식으로 구획하고, 어떤 의미에서든 재구성하고 있는 핵심 축으로서 젠더에 대한 이해를 더 얻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오늘의 논의를 조금 다른 관점에서 보완하고자 인구통계학적 범주로서의 남성이나 차별적 제도와 구조보다, 그 이전에 남성들을 움직이게 하고, 차별을 계속해서 구조화하는 정동적 기제에 주목합니다. 이를 위해 ‘남자’를 중심으로 젠더 문제에서 무엇이 성찰과 연대를 가로막는가, 그리고 이를 어떻게 넘어설 수 있는가, 라는 두 질문을 유령이라는 키워드로 접근하고자 합니다. 여기서 유령이란 사라진 줄 알았으나 끊임없이 되돌아오는 것, 존재하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며 나를 끊임없이 구속하고 평가하고 책망하는 얼굴이나 목소리이며, 깊이 내면화되어 자신의 목소리로 착각하게 된 권력과 규범의 메시지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선 저는 ‘남성성’ 대신 ‘남자’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일상적 언어 습관에서 많이 사용되는 건 ‘남성’보다는 ‘남자’입니다. 그리고 이때 ‘남자’는 지금의 자신을 설명하는 언어이기보다, 자신의 소망 혹은 도래할 자기 자신을 설명하는 언어, 즉 기대나 꿈의 언어에 가깝습니다. 누군가가 ‘나는 멋진 남자가 되고 싶어’라고 말할 때, 그 ‘남자’는 아직 오지 않은 사람, 아직 없는 존재입니다. ‘남자다워지고 싶다’, ‘괜찮은 남자가 되고 싶다’라고 말할 때, 이러한 말들 안에 있는 남자들은 모두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존재들입니다. 내가 ‘되고 싶은’ 것에 대한 이야기이고, 아직 오지 않은 것, 어쩌면 영영 오지 않을 것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남자’라는 단어는 언어의 수행성과 함께, 특정한 언어가 단지 언어에 불과한 것으로 남지 않고, 구체적인 얼굴이나 목소리, 혹은 명령이 되어 어떤 이를 사로잡고, 그럼으로써 그가 어떤 말과 행동, 생각을 하게 만들고, 결국 그를 어떤 사람이 되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수행적 언어의 유령적 성질을 보여줍니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남성’이나 ‘남성성’보다 ‘남자’가 특정한 생애기획을 구성하는 표상과 그것이 지닌 힘을 포착하기에 적합합니다. 남성성이라는 개념이 그 설명력과 별개로 남성 범주를 정태적이고 탈역사적인 것으로 만들어서 ‘남성’을 특정한 유형으로 고정해 버린다는 비판들을 상기한다면, 지금 필요한 관점의 전환은 특정한 정세와 국면 속에 있는 지극히 국지적인 존재이자 꿈으로서의 ‘남자’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무엇이 ‘남자들’을 ‘남자’로 만들어내는지도 조금은 힌트를 얻을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앞선 발표들에서 충분히 설명되었듯, 이대남이나 2030 남성과 같은 프레임들은 특정한 정치적 선택지들과 경로를 제공함으로써 다양한 욕망과 생각을 지닌 남성들을 동질화하는 효과를 발휘했습니다. 이러한 범주의 수행성에서 핵심은 하나의 계기나 우연이었던 것이 해당 범주를 활용하는 인구 통계와 같은 기술을 통해 확고한 인과관계나 필연으로 ‘길들여지는’ 과정입니다. 이것은 특정한 믿음이나 상상이 특정한 행위로 이어지면서 현실화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이고, 그런 맥락에서 원본 없는 모방 혹은 원본에 선행하는 모방, 즉 원본을 만들어내는 모방의 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남성성이나 여성성이 달력과 지도의 문제임에도 그것이 특정한 신체에 내재하는 성질로 여겨지도록 하는 것 또한, 그러한 수행성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미디어의 프레임과 개인의 일상을 함께 설명하기 위해 다소 층위가 다른 수행성의 개념을 함께 사용하고 있음을 양해 구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저는 이대남이나 2030 남성, 혹은 청년과 같은 범주를 활용하여 당면한 현실을 분석하기보다, 그러한 범주들을 작동할 수 있게 한 좌절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범주들은 2010년 즈음부터 지금까지 총선, 대선, 내란 등의 의회정치 국면에서 유권자를 창출하기 위한 수행적 언어로 동원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단어들이 그것의 호명에 응답한 이들의 실제 삶에 대해 설명해 주는 것이 너무나도 부족함에도, 그러한 응답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맥락으로서의 유령에 대해 이해해야 합니다. 저는 이 프레임들이 순전히 허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의 진실이 총체적 진실로 확대해석되고, 일부의 목소리가 특정 인구집단 전체를 대표할 수 있는 것으로 증폭되는 과정이 있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의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지금 미디어에서 제시하는 2030 남성이나 이대남, 그 이전에는 청년과 같은 단어들이 지극히 모호하거나 구체적인 설명력이 부족함에도, 어떻게 그 단어들은 이처럼 강한 힘을 발휘하고, 사람들을 동원할 수 있었는가? 달리 표현하면, 왜, 어떻게,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단어들에 응답하여 그것을 자신의 이름으로 삼게 되었는가? 저는 이것을 특정한 형태의 생애 기획에 대한 정념적 애착이라는 맥락에서 가부장제의 문제로 이해하고자 합니다. 이때 특정한 형태의 생애 기획은 인간으로 존중받기 위해 따라가야 하는 꽤 좁은 경로로서 ‘남자’ 혹은 ‘여자’이며, 남성에게 그것은 여전히 생계부양자로서의 가부장인 경우가 많습니다. 여성을 트로피로 취하고자 하는 폭력성이나 소수자에 대한 혐오는 그 자체로 원인이 아니며, 오히려 가부장제가 상상하게 하는 좋은 삶에 대한 애착과 그것의 좌절로부터 기인한 결과입니다. 즉, 이것은 남자 되기와 인간 되기가 같은 의미인 규범 안에서, 그러한 규범에서 무수히 좌절하면서도, 그 규범이 자신이 살아가면서 기댈 수 있는 곳들까지도 제공해주기 때문에, 그리고 그러한 기댈 구석 없이는 삶의 지속이 어렵기 때문에, 그에 대한 애착을 놓지 못하는 ‘잔인한 낙관’의 문제에 가깝습니다. 현재 청년 세대의 젠더 인식이란, 한국 사회에서 생애 기획의 실현가능성이 압축되어 있는 시기에 그것이 영영 실현 불가능할지도 모르지만 달리 방도가 없어서, 그리고 그것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안도감과 위안을 준다는 점에서 여전히 포기할 수 없는, 젠더 규범에 대한 정념적 애착의 문제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어떻게 개입해야 잔인한 낙관이라는 애착의 폐쇄회로의 틈새를 찾을 수 있을까요? 저는 자기 책망을 넘어 재역사화와 재맥락화로서의 성찰을 가능하게 하는 관계로서 곁을 발명하자고 제안하고자 합니다. 남성들이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등에 대한 혐오를 물리적·언어적 폭력으로 표현하는 장면들의 이면에는 낡은 가부장제와 변한 경제 체제의 착종이 제조하는 좌절로부터 출발하는 자기 책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양심을 추동한 것이 실은 의례적인 처벌에 의해서만 충족될 수 있는 법에 대한 사랑”일 때 ‘좋은 삶’, 그리고 그러한 삶의 주체로서의 ‘(멋진) 남자’는 지금 남성들의 양심을 추동하는 법일 것입니다. 가부장제와 신자유주의는 대다수 남성에게 자기 책망의 형태로 반복되는 징벌을 통해 그들이 인간이 되기 위한 경로를 충분히 능력 있고 매력적인 ‘남자’가 되는 것으로만 제시하고, 그 경로를, 나아가 가부장제와 신자유주의라는 특정한 이데올로기를 사랑하도록 만듭니다. 따라서 자기 비하나 자조의 형태로 나타나는 반성이나 성찰을 자기 책망이라고 정확히 지칭하고, 그것을 넘어서서 다른 성찰을 고민하자는 제안은 남성들을 자기 파괴와 타자 혐오로 몰아가는 가부장제와 신자유주의를 남성들이 스스로 직시함으로써 가부장을 중심으로 하는 ‘좋은 삶’이 아닌, 함께할 타자의 입장에 대한 고려로부터 출발하는 ‘다른 삶’에 대한 고민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경로를 제작해야만 폭력의 폐쇄회로로부터 탈출할 수 있다는 절박한 마음으로부터 출발합니다. 그러므로 필요한 것은 반성 혹은 성찰의 재개념화입니다. 성찰은 특정한 기준에 자신이 부합하는지의 여부를 따지는 것을 넘어, 그러한 기준 자체를 돌아보는 일이며, 이를 통해 자신을 형성해 온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조건과 맥락을 다시 보는 작업이기에, 가부장제와 신자유주의에 대한 애착을 끊어내는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낡은 것은 가지 않았고, 새것은 이미 와 있는 세계에서, 인간으로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은 가부장제라는 경로를 거치며 가부장의 꿈이 되고, 경제적 불안정과 생애기획의 실패 안에서 접힌 꿈은 남자라는 유령이 되어 특유의 좌절감과 패배감을 통해 혐오로 굴절됩니다. 이들은 남자로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데 실패했다고 여기게 되고, 인간으로서의 인식가능성(intelligibility)이 젠더를 통해 분배된다는 점에서 남자 되기의 실패는 인간 되기의 실패가 됩니다. 저는 바로 이러한 실패 혹은 좌절의 자리에서 출발하기 위해 변명이라는 행위에 집중하고 싶습니다. 변명은 특정한 규범/규칙 안에서 증명이 실패했을 때, 그것을 여전히 탈출하지는 못하지만 자신이 할 수밖에 없는 어떤 말들을 통해 규범과 규칙에 개입하는 것으로, 규범과 규칙의 어딘가 엇나간 반복과 인용의 문제가 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변명은 범주를 변형하고 뒤흔들어 놓는 수행성의 한 장면입니다. 수행성은 담론이 특정한 현상을 지칭하고 규제하는 과정에서 그 현상을 반복적으로 재생산하는 역동적 능력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기가 반대하는 어떤 사람의 목소리를 전유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주장하는”, “거부와 수용의 흔적을 동시에 갖고 있는 어떤 전유를 통해서 자율성을 획득”하는 행위성의 작동으로서 변명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변명은 증명의 규칙 안에서 그것에 반하여 말하면서도 그것을 탈출하지는 못하는 말입니다. 변명은 그것을 “그것의 침묵을 강요하던 바로 그 용어를 차용하고 활용함으로써” 규범에 저항합니다. 중요한 것은 변명에 담겨 있는 “치욕스럽게도 불순한 정치성”을 발명/복원하는 일입니다.
‘곁’은 그러한 변명을 가능하게 하는 관계의 이름입니다. 곁으로 이루어진 세계는 “둥글게 모여 앉아 자신의 경험을 다른 이에게 참조점이 될 수 있는 이야기로 바꾸고 남의 이야기를 또 그렇게 들으면서 성장하는 일”이 이루어지는 곳이며, ‘너’를 통해 ‘나’를 넘어서는 관계가 만들어지는 곳입니다. 곁은 차이를 묻어 두고 일단 서로 밀어주고 당겨주는 장소가 아닙니다. 무비판적으로 변명을 ‘들어주는’ 장소도 아닙니다. 오히려 변명으로부터 출발하여 욕망과 좌절, 그것을 모두 집약하는 남자라는 유령에 관하여 대화를 나눔으로써 유령들을 직면하고, 자기와 타자를 파괴하지 않을 수 있는 관계를 만들 수 있는 장소입니다. 이때 젠더는 독립된 변수 혹은 원인이 아닌, 계급, 노동, 계층, 지역 등의 축들이 모이는 장소이자, 그러한 축들이 교차한 결과일 것입니다. 어떤 변수도, 어떤 축도 고립되어 있지 않습니다. 지금의 착종 상태에서 남자라는 유령을 이해하려면, 바로 이 복잡성이 담긴 변명들을 들여다봐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