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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트 비판을 위한 큐레이션

발행처
민음사
간행물
릿터
분야
인문
교양
학술
사회
인권
서평
분류
매거진 기고
권호
54
발행일
2025/06/01
* 아래의 글은 편집을 거치기 이전의 원고입니다.
나는 온전히 동의할 수 없으나 마주해야만 하는 책과 대결해 보고자 한다. 좋은 서평은 끄덕이고 미소 짓게 해 주는 책보다, 갸웃거리고 인상 쓰고 눈 흘기게 하지만 피할 수 없는 책으로부터 나온다. 독서는 대결이고, 대결은 배움이며, 서평은 그 과정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대결 상대는 ‘미덕 사재기꾼들Virtue Hoarders’이라는 원제를 지닌, 캐서린 류의 『전문·관리 계급에 대한 비판: 자본주의에 복무하는 진보주의자를 고발한다』(에코리브르, 2025)이다.
책은 전문·관리 계급이 경제적 구조에 맞선 정치를 ‘문화’의 차원으로 환원하고, 자녀의 교육과 돌봄을 통해 계급재생산에 열을 올리며, 독서와 같은 문화 소비로 ‘교양’을 독점한 뒤 노동자 계급이나 빈민을 멸시하고, 섹슈얼리티와 젠더 정치에서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문제를 소거해 버린다고 강하게 비판한다. ‘고상하게 진보를 외치는 반동주의자에 대한 비판’이다. 이는 저자가 명료하게 밝히듯, 책의 최종 목표가 “사회주의 정치 및 정책으로 돌아가는 것”(16)이라는 점, 그리고 “자아비판에 필요한 작업을 하는 데 도움을 주면서, 전문·관리 계급이 가장 잘 지켜낸 보루들인 정치 조직, 출판, 미디어, 민간 재단, 싱크 탱크, 대학교에 자리 잡고 있는 그들을 공격할 수 있는 몇몇 도구를 제공하는 것”(27쪽)과 관련된다. 그러나 이 책은 정체성 정치의 복잡성을 소거하고 비난하기도 하고, 구조에 대한 비판을 강조하지만 구체적인 제안은 “계급 투쟁”(139쪽)으로의 회귀 정도에 머물기도 한다. 사례도 모두 미국에 한정되어 있다. 이러한 약점과 공백을 기각의 근거가 아니라 배움의 계기와 싸움의 도구로 삼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나는 『전문·관리 계급에 대한 비판』을 풍성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엘리트 비판을 위한 도서 큐레이션을 시도한다. 작은 판형에 200쪽도 되지 않는, 줄간격과 상하좌우 여백도 넓고 글자는 큰 편인 이 책은 정밀한 논증보다는 분노가 담긴 격문에 가깝다. 오바마 정권 8년 이후 힐러리 낙선과 트럼프의 첫 임기 중 코로나19로 드러난 “경제적 재앙과 공중보건 재앙”(138쪽)을 마주하는 2021년에 미국에서 출간되었다는 맥락을 감안한다면 이해 못할 것도 아니다. 더불어,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과 민주당 정부 5년 이후 들어선 윤석열 정권의 엘리트 남성 카르텔 중심 친위 쿠데타를 다시 한 번 탄핵으로 막아내고 사회를 재조립(reassemble)해야 하는 상황에서, 이 책이 마침 번역되어 나온 타이밍 또한 이해 못할 것이 아니다. ‘엘리트 비판’은 『전문·관리 계급에 대한 비판』을 지금 여기에서 더 생산적으로 읽기 위한 맥락이다. 두번째테제에서 출간한 『오인된 정체성』(2021)과 『엘리트 포획』(2024), 그리고 오월의봄에서 출간한 『야망계급론』(2024)과 『특권계급론』(2025)은 풍성한 논의를 하기 위해 함께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책에서 등장하는 ‘전문·관리 계급’은 개개인이 속한 경제적 단위나 영역보다 그들이 부여받고 행사하는 특권의 문제에 가깝다. 『특권계급론』에 따르면, 특권과 부는 서로 전환될 수 있을지언정 반드시 인과적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던져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어떤 특권이 어떤 경로를 통해 유지보수되고 있으며, 그 경로에 개입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이때 엘리트라는 키워드는 우리가 계급과 정체성 등을 가로질러서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 계급과 정체성은 특권의 부여 혹은 박탈로서의 실행이 이루어지는 경로가 된다. 즉, 이것은 특정한 인구 집단이 아니라, 해결해야 할 문제로서의 ‘엘리트’를 만드는 일이다(『특권계급론』).
류의 정체성 정치 비판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오인된 정체성』은 정체성 정치가 우리에게 주어진 이름에서 출발하여 우리를 억압하는 구조에 함께 맞서기 위해 고안되었고 실행되었으나, 정체성의 긍정과 존중이 핵심이 되면서 정체성이 구성ㆍ강요되는 과정 자체에는 침묵하게 되었다고 비판한다. 지금 우리에게 당연하게 여겨지는 정체성은 특정한 역사적ㆍ물적 조건의 효과이지만, 우리의 ‘주변적’ 정체성의 존중과 인정이 주는 위안은 우리가 그러한 조건을 외면하도록 만들었다(『오인된 정체성』). 엘리트는 자기 근처의 주변화된 이에게 고상하게 인사를 건네며 정체성을 ‘존중’해 주면서, 그 존중의 획득을 정체성 정치의 최선으로 착각하게 만들어 정체성 정치를 ‘포획’한다. 그리고 이러한 “존중이라는 규칙은 종종 방 안에서만 대화가 일어나고 그 대화에 가장 많이 영향을 받는 사람들은 방 바깥에 내버려두는 것을 의미했다.”(『엘리트 포획』, 127쪽)류가 대학 캠퍼스 안의 반성폭력 운동과 성 해방을 위한 문화 정치를 “캠퍼스 내 마녀사냥”(122쪽)이라는 동의하기 힘든 표현으로 비판할 때, 그것은 그러한 논의가 “성적 강제와 경제적 불안정성이 함께 작용해 학대 조건을 만들어내는”(132쪽) 물질적 현실로 향해야만 근본적 실천이 가능하다는 제안이었다. 윤리와 문화에 대한 강조가 물적 현실을 가려 버린 당시의 정치 지형에 대한 내부적 비판인 것이다.
엘리트의 ‘고상한 정치’가 물적 현실을 가리는 방식에는 시장 또한 개입한다. 『야망계급론』에 따르면, ‘가치’와 ‘도덕’을 강조하는 생산과 소비는 ‘착한 소비’, ‘윤리적 소비’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착각을 불어넣음으로써 자본주의의 문제를 축소하고, 여기에 공감하는 ‘가치 공동체’를 제조한다. 기업은 ‘깨끗’하고 ‘도덕적’이고 ‘올바르게’ 만들어지는 생산 과정을 과시하며 마케팅 수단으로 활용하고, 소비자에게도 도덕적 이미지를 부여한다. 이러한 상품은 대단히 비싸지 않아서 누구든 마음 먹으면 살 수는 있다. 핵심은 그것의 ‘가치’를 충분히 이해하는 ‘감식안’이나 ‘취향’이다. 그것이 비과시적으로, 고상하게 사람들 사이에 선을 긋는다. 아이가 아주 어릴 때부터 교육과 돌봄에 자원을 쏟아 부어 장기간에 걸쳐 획득한 고상한 취향과 미덕은 엘리트라는 경로를 통해 특권을 더욱 강화한다(『야망계급론』).
따라서 엘리트 비판은 단지 (이미 자명하다고 생각하는 직업군이나 계급으로서의) 엘리트들에게 특권을 포기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특권이 만들어지고 행사되는 일상적 과정으로서의 엘리트를 샅샅이 파헤치고 낯설게, 수상하게 보는 데서 출발한다. 누가 어디에 살며 어떤 교육을 받는가? 누가 어디에 어떻게 돈을 쓰며, 무엇을 먹고 입으며, 거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가? 누가 무엇을 읽고, 어떤 어휘를 사용하며, 무엇을 가치 있게 여기고, 무엇을 멸시하는가? 누구의 어떤 말과 행동이 매력적이거나 믿을 만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그것은 어떤 네트워크를 만들어내고, 어떤 자원을 동원하게 해주는가? 『전문·관리 계급에 대한 비판』은 단지 학교와 지갑을 넘어, 시장, 감정, 취향, 신용의 문제를 모두 가로지르는 ‘엘리트’를 맥락으로 삼아 읽을 때, 비로소 번역 출간의 의미와 한국 정치 지형과의 연결성이 보인다.
이 글은 기만적이고 기회주의적일 수밖에 없다. 나는 명백히—‘명문대’ 출신, 연구자, 저술가, 언론인, 비평가 등을 포함하는—전문·관리 계급이자 엘리트이며, 이 글을—시간적 여유와 ‘교양 있는’ 언어 등을 동원하여—읽는 당신 또한 높은 확률로 전문·관리 계급이거나 엘리트일 것이기 때문이다. 나에게도 당신에게도 놓고 싶지 않은, 이미 몸의 일부가 되어 버린 것들이 있다. 그래서 ‘권력자’, ‘기득권’이 아니라 ‘엘리트’에 대해 비판적인 글을 읽을 때 공감되면서도 ‘찔리는’ 순간이 있는 것이다. 체제에 기대어 살면서도 그 체제를 비판하는 ‘이중 행위자(double agent)’로서의 감각이다. 엘리트를 비판하면서도 여전히 엘리트일 수 있는 것은 또한 자신의 안락한 방을 떠나지 않을 수 있는 엘리트로서의 특권이다.
나는 엘리트들에게 특권을 당장 버리거나 입을 닥치라고 말할 생각이 없다. 지면에 글을 써대고 ‘선생님’ 소리 듣는 내가 그렇게 지껄이는 건 솔직하지도 않고 의미도 없으며 무엇보다도 가능하지도 않다. 중요한 것은 누가 말하느냐보다 무엇을 해결하느냐다. 발언의 자격을 따지는 건 자주 연대의 차단과 문제의 축소로 이어져 왔다. 문제의 해결은 그것에 연루된 모두가 달려들어야 간신히 성취될 수 있다. 나는 진정성에 집착하느라 무력한 정치보다, 교활하게 끊임없이 무언가를 귀찮게 하고 바꾸어 내는 정치를 원한다. 진정성의 끝은 요절 혹은 변절이다. 당장 속 편한 것만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닥치는 대로 먹어치워야 한다. “우리는 이단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불경스러워야 한다.”(140쪽) 체하고, 약 먹고, 데운 수건으로 배에 온찜질하다가 또 일어나 싸워야 한다. 특권에 대한 애착은 그런 과정에서 간신히 조금씩 약해질 수 있다.
정치는 관념이 아니라 물질이다. 가치관이 아니라 실천이다. 관점보다 실무다. 주인의 도구를 황당하고 난처하게 재조합해서 주인의 집을 무너뜨려야 한다. 기만적이고 지저분할지언정 게으르게 싸우지는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