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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 도취, 애착: <포탈> 시리즈, 권력의 알레고리

발행처
민음사
간행물
릿터
분야
학술
교양
인문
사회
예술
대중문화
비평
분류
매거진 기고
URL
권호
53
발행일
2025/04/01
** 최종 교정을 거치기 이전의 원고입니다.
2007년에 발매된 <포탈>과 2011년에 발매된 후속작 <포탈 2>는 ‘포털건’으로 포털을 열어 퍼즐을 해결하며 폐쇄된 실험실을 탈출하는 1인칭 시점의 SF 게임이다. 두 편 모두 발매 당시 무수한 상을 휩쓸었고, 게임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고 평가받는다. 2023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열린 <게임사회> 전시에서 나는 오랜만에 <포탈>과 재회했다. <포탈>은 뉴욕현대미술관 소장 작품으로 소개되었고, 유색인종 여성이 주인공이라는 점에서 ‘정체성 게임’ 전시실에 걸려 있었다. 나는 그곳에 잠깐 서서 몇 개의 스테이지를 깨며 친구와 밤을 새워 <포탈 2> 협동 모드를 플레이하던 2014년 겨울을 추억했다.
이 글은 최근 <포탈> 시리즈를 10년 만에 다시 플레이하면서 느낀 기시감에서 출발한다. 엘리트가 잘못된 판단을 내리도록 오랜 시간 설계된 존재들일지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고, 어쩌면 계엄령을 선포한 대통령과 그 지지자들이 도리어 피해자 행세를 하는 지금에야 이 게임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 물론 10년도 더 전에 미국에서 출시된 SF 퍼즐 게임이 지금의 한국 사회와 정교하게 대응될 리는 없다. 그럼에도 나는 <포탈> 시리즈에서 지금의 경험을 이해할 단초를 찾아보려 한다. 이 글은 게임의 스토리와 플레이 경험을 중심으로 권력의 작동 방식을 폭력, 도취, 애착이라는 세 단어로 이해하고자 하는 짧은 노트다.

폭력: 시스템의 수동공격

<포탈> 시리즈는 기본적으로 FPS 게임의 틀을 갖고 있지만 ‘죽이거나 죽거나’라는 선택지에 갇힌 전투(combat) 중심 구성을 벗어난다. 통상적인 FPS 게임은 피아와 승패를 뚜렷이 구분할 수 있는 전투라는 형식을 통해 다시금 이 폭력의 구도를 강화한다. 하지만 <포탈> 시리즈에서 물리쳐야 할 적은 몇 명의 병사나 괴물이 아니라 실험실이라는 “게임 환경”이다. ‘글라도스’(GLaDOS, Genetic Lifeform and Disk Operating System)는 하나의 적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름에서도 드러나듯 그는 실험실 전체를 통제하는 시스템 그 자체다.
<포탈>을 시작하면 플레이어는 ‘애퍼처 사이언스(Aperture Science)’라는 회사의 새하얀 실험실에서 눈을 뜬 피실험자 ‘첼’이 된다. 라디오에서는 같은 음악이 끊임없이 반복된다. 낯선 여성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나온다. 첼은 공간 이동 기술을 실험해야 한다. ‘포털’이라는 구멍을 통해 공간 이동을 하는 실험이다. 파란색 구멍으로 들어가면 주황색 구멍으로 나오고, 주황색 구멍으로 들어가면 파란색 구멍으로 나오는 기술이다. 이들은 첼의 다리에 강화 장치를 달아 아주 높은 곳에서 추락해도 다치지 않게 만들었다. 그 덕에 첼은 물리법칙을 무시하며 특정한 재질의 벽에 포탈을 뚫을 수 있는 도구 ‘포털건’으로 퍼즐을 풀면서 실험실에서 제한된 구역을 한 단계씩 올라간다. 그런데 어딘가 이상하다. 실험은 갈수록 어려워질 뿐 아니라 위험해진다. 발을 잘못 디디면 유독성 물질에 빠져 죽는 실험실부터 사람을 발견하면 무한정 총알을 발사하는 살인 로봇 ‘터렛’이 길목마다 서 있는 실험실, 닿으면 죽는 에너지 볼이나 레이저가 발사되는 실험실까지. 하지만 첼은 이 폭력적인 실험을 반복적으로 수행하며 견디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 실험의 끝에 주어진다고 약속된 ‘케이크’와 자유를 상기하면서.
이 게임에서 긴장을 고조시키는 것은 무엇보다도 몇 실험실에서 발견되는 틈새 공간이다. 그곳에는 사람이 머무른 날짜를 센 흔적과 온갖 낙서가 있다. 이 흔적은 애퍼처 사이언스에서 일하던 과학자 중 유일한 생존자인 더그 랫맨이 남긴 것이다. 그중 가장 눈에 띄고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이 문구다. “케이크는 거짓말이야!(The cake is a lie!)” 2011년에 게임사가 직접 출간한 그래픽노블 <포탈 2: 실험 쥐(Portal 2: Lab Rat)>에서 밝혀지는 사실에 따르면, 그는 살인 인공지능에 의해 이루어지는 비인륜적 실험을 멈추기 위해 서류를 조작했다. 실험실의 규칙을 어기면서까지 실험에 도전할 만큼 끈기 레벨이 비정상적으로 높아 실험 부적합 판정을 받은 첼을 우선순위로 밀어 넣은 것이다. 실험의 끝에서 글라도스는 케이크 대신 소각장을 선사한다. 첼은 랫맨이 남긴 흔적을 따라 포털건을 사용해 소각장을 탈출하고 글라도스를 무너뜨린다. 글라도스와 함께 관제실이 무너지면서 첼은 처음으로 지상에서 햇빛을 받는다. 그런데 잠깐 쓰러져 있는 사이 첼은 살아남은 기계에 의해 다시 실험실로 끌려가며 <포탈> 첫 시리즈가 끝난다. 그때 이런 음악이 흘러나온다.
네가 내 마음을 부수고 날 죽였지만, 그리고 날 조각조각 찢어서 모든 조각을 불 속에 던졌지만 내가 불타면서도 아팠던 건 네가 성공한 게 너무 기뻐서였어! (……) 그냥 날 떠나 버려. 난 여기 남아 있는 게 더 좋아. (……) 네가 죽어 가는 동안 난 아직 살아 있을 거야. 그리고 네가 죽었을 때도 난 아직 살아 있을 거야. 아직 살아 있어. - <Still Alive>
흥미로운 점은 이 과정 내내 죽을 뻔한 것이 첼임에도 가사에서처럼 글라도스는 자신이 첼의 폭력적인 행동으로 인해 마음이 다쳤다거나 갈가리 찢어졌다고 말하며 피해자 행세를 한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시스템의 폭력은 수동 공격의 형태로 작동한다. 시스템은 직접 화를 내기보다 피해자 행세를 하고, 첼을 조롱하고 비꼰다. 무엇보다도 첼을 직접 죽이기보다 첼이 ‘위험한 환경에서 살아남아 발전할 기회’를 준다. 수동 공격은 간접적이라서 이것을 공격으로 해석할 책임도, 나아가 이미 발생한 폭력의 책임도 모두 상대에게 떠넘긴다. <포탈>에서 시스템은 수동 공격을 통해 책임을 회피하고 자신의 폭력을 정당화한다.
그렇다면 글라도스는 무엇을 명분으로 폭력의 책임을 첼에게 전가할 수 있었는가? 이는 애퍼처 사이언스에서 실험이 지속되는 원리와 관련되어 있다.

도취: 과학을 위하여

<포탈 2>는 좁은 모텔 방처럼 보이는 곳에서 첼이 깨어나며 시작된다. 다시 잡혀 들어간 이후 시간이 도대체 얼마나 흘렀는지도 알 수 없다. 그 와중에 낯선 남성의 목소리가 말을 건다. 자신을 ‘휘틀리’라고 소개한 이 음성은 꽤 자율적인 인공지능을 탑재한 ‘코어’라는 동그란 컴퓨터다. 휘틀리는 눈과 눈썹에 가까워 보이는 구조물을 조작하여 감정을 표현하고, 꽤 강한 영국식 악센트를 사용한다. 자신이 피실험자 후보들의 동면을 관리한다는 휘틀리는 말을 좀 횡설수설하는데, 그에 따르면 첼은 심각한 뇌 손상이 오고도 남을 만큼 긴 시간 동면을 취한 것으로 보인다. 휘틀리는 첼에게 자신과 함께 이 시설을 빠져나가자고 제안하고, 코어의 권한으로 시설 일부를 움직여 첼에게 길을 열어 준다. 그렇게 첼과 휘틀리는 첼이 오래전 글라도스를 무너뜨린 바로 그 장소에 당도하고, 첼은 휘틀리에게 시설의 통제권을 맡긴다. 그런데 휘틀리는 실수로 글라도스를 재가동하고 만다.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라는 말과 함께 글라도스는 첼을 다시 실험실로 밀어 넣는다. 어떻게 살아서 돌아왔는지 휘틀리는 다시 첼에게 접근한다. 첼과 휘틀리는 힘을 합쳐 위험한 실험실에 투입되는 무기의 생산 시설을 망가뜨리고 다시 글라도스를 무너뜨리는 데 성공한다. 휘틀리는 첼을 위해 지상으로 나가는 엘리베이터를 가동한다.
그러나 게임은 이제 시작된 것이었다. 글라도스를 몸체 삼아 머리 자리에 휘틀리가 연결된다. 휘틀리는 모든 것이 너무나도 작아 보인다며 신나서 떠든다. 그의 웃음과 움직임에 따라 관제실 벽의 패널들이 넘실대며 물품들이 굴러다니기 시작한다. 휘틀리는 넋이 나간 듯 웃다가 갑자기 정색하며 첼에게 묻는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나가야 하는 이유라도 있는 거야? 이게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알아?” 올라가던 엘리베이터는 도로 내려오고, 휘틀리는 난데없이 화를 내기 시작한다. “내가 해낸 거야, 내가 여기까지 온 거라고.” 그리고 첼에게 말한다. 네가 뭔데 나한테 명령을 하냐고. 마치 자신이 여태 첼에게 휘둘려 온 피해자인 것처럼. 모든 명령은 휘틀리가 첼에게 했는데도 말이다. 휘틀리에 의해 감자에 처박혀 최소한의 전력으로 유지되고 있던 글라도스는 휘틀리의 정체를 뒤늦게 깨닫는다. 글라도스에 따르면 휘틀리는 “지능 저하 코어”다. 글라도스는 전원을 켤 때마다 곧 사람을 죽이려 했기 때문에 글라도스를 개발한 당대 최고의 과학자들은 글라도스가 정확한 계산을 할 수 없도록 의도적으로 방해하는 코어를 만들었다. 즉 휘틀리는 글라도스가 “잘못된 결정을 내리도록 특수 설계된 코어”였다. 휘틀리는 자신을 멍청이(moron)라고 부르고 이 과정이 모두 첼이 이룬 것이라고 말하는 글라도스에 분노를 참지 못한다. 휘틀리는 엘리베이터를 때려 부수어 첼과 글라도스를 애퍼처 사이언스 지하 가장 깊은 곳으로 떨어뜨리고 혼자 실험을 시작한다.
문제는 시스템과 코어와의 관계다. 시스템을 통제하는 ‘몸’에 코어가 연결되면 어떤 코어든 실험에서 도취감을 느끼게 설정되어 있어 실험만을 위해 살게 된다는 점이다. 애퍼처 사이언스를 설립한 사업가 케이브 존슨은 인체 실험도 불사하며 윤리는 모조리 제쳐 두고 과학의 발전만을 위해 모든 것을 몰아붙였으며, 그런 자신을 인류에게 처음으로 불을 가져다준 프로메테우스로 여기기도 했다. 그는 인간의 정신을 그대로 컴퓨터에 이식해 과학을 계속해서 발전시킬 계획이었고, 글라도스는 그 결과물이었다. 그는 자신을 잘 따르던 여성 비서 캐롤린을 글라도스로 만들어 과학을 향한 열망을 실현했다. 그 열망은 다름 아닌 관제실의 몸 자체에 코딩되어 있었다. 어떤 코어가 이식되든 이 몸에 연결된 이상 과학 실험에서 끊임없이 도취감을 느낀다. 이 도취감을 견디도록 설계되면 실험실 전체의 체계를 유지하면서 실험을 반복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체계 전체가 위험에 빠진다. 그리고 휘틀리는 도취감을 견디지 못해 폭주하는 코어였다.
이 거대한 실험실을 모두 내 마음대로 조작해 과학을 발전시킬 수 있다는 데서 솟아오르는 도취감과 잘못된 판단을 하도록 특수 설계된 인공지능이 만났을 때 실험실은 그야말로 카오스가 되었다. 실험실을 재생산하는 토대인 원자로가 불안정해지기 시작했고, 어떤 실험실들은 박살이 났으며, 기계와 도구들은 고장 나거나 돌연변이가 되었다. 휘틀리가 새로 만든 실험실은 형편없었다. 휘틀리는 도취감 속에서 기쁨과 분노를 무수히 오가며 애퍼처 사이언스 전체를 망가뜨리기 시작한다. “우리는 해야 할 일을 하죠. 왜냐하면 할 수 있으니까.”라는 <Still Alive>의 가사에서도 알 수 있듯 과학은 명분일 뿐이다. 남은 것은 도취감이다. 사실 언제나 그랬다.

애착: “Cara Mia Addio!”

이제 첼은 포털건을 들고 감자에 처박힌 글라도스와 함께 아파트 1500층 정도 깊이에 해당하는 지하 4500미터부터 차근차근 간다. 다시 관제실에 도달해 관제실의 권한을 글라도스에게 되돌려주는 데 성공한다. 첼이 정신을 차리자 글라도스는 말한다. “괜찮아서 정말 다행이야.” 그러더니 이번에는 자신이 겪은 수모를 하나씩 열거하며 첼을 비난한다. 이제는 얼마든지 첼을 죽일 수 있는 조건이 되었음에도 글라도스는 “네가 이겼으니 그냥 나가라.”라며 첼을 엘리베이터로 올려 보낸다. 하하 웃으며, 재밌었지만 다신 돌아오지 말라고. 그리고 엘리베이터가 잠깐 멈춰 문이 열리자 네 대의 터렛이 첼을 향해 총구를 겨눈다. 이제 죽는구나 싶은 바로 그 순간 터렛들은 총구가 있는 팔을 접었다 펼치며 난데없이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엘리베이터가 아주 넓은 홀에 도착하자 홀을 가득 채운 터렛들이 일제히 오페라를 연주하며 첼에게 잘 가라고 노래를 불러 준다.
아름다운 그대여, 나의 아름다운 사랑아! 내 소녀여, 오 첼! 그녀가 존경하는 아이야! 오 내 사랑아, 잘 가렴!
Cara bel, cara mia bella! Mia bambina, oh Chell! Ché la stima! O cara mia, addio!
<포털 2> 엔딩곡인 터렛들의 오페라 <Cara Mia Addio>는 첼을 “내 소녀”, “내 사랑”이라 부르며 이제 과학에서 멀어지라고 애절하게 노래한다. 이때 터렛들이 원래는 인간 아기를 지키는 방범용 로봇으로 제작되어 침입자를 향한 총기 발사와 아기를 위한 자장가 재생이 모두 가능하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모든 폭력을 딛고 올라 시스템을 넘어섰다고 믿는 바로 그 순간 터렛들은 첼을 침입자가 아닌 아기로 대하는 것이다. 수많은 플레이어가 이 장면에서 눈물을 흘린 것은 우연일까? 터렛들의 포근한 음악을 듣고 있으면 그저 품에 안겨 새근새근 잠들고 싶어진다. 나에게 총알을 퍼붓던 터렛들, 나는 그 품에서 떠나고 싶지 않아요.
이 황당하고 충격적인 감동에 젖어 있다 보면 엘리베이터는 드디어 지상에 도달한다. 첼은 바깥바람을 쐰다. 지평선이 보일 만큼 펼쳐진 밀밭 한가운데,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아래서. 뒤에서 무언가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더니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지저분한 큐브를 뱉어 내고는 쿵 닫힌다. 게임 끝. 그 순간 많은 플레이어들이 굉장히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고 토로한다. 대부분 해방감보다는 허무함에 가깝다. 내가 원한 것이 이게 맞나? 나는 이제 무엇을 할 수 있지? 포털건이 없는 나는, 과학 실험이 없는 나는, 뭐지? 원망스럽다. 나를 바깥세상에 혼자 버려두고 문을 닫아 버린 글라도스가, 그렇게 얻은 자유가.
감정을 정리할 새도 주지 않고 글라도스는 플레이어에게 마지막 노래를 불러 준다. 이번에도 역시 첼을 일방적으로 비난한다. 네가 날 두 번이나 죽이려 할 때조차 나는 너에게 놀라울 만큼 친절했다고. 자유를 원한다면 가지라고. 예전에는 네가 죽길 바랐지만 이제는 그저 네가 사라져 주었으면 좋겠다고. <Want You Gone>이라는 제목처럼 노래는 기묘하게도 지독한 연애의 끝을 담은 이별 노래처럼 들린다. 글라도스는 첼을 조롱하면서도(“잘 가, 나의 유일한 친구. 아, 네 얘기는 아니고.”) 쓸쓸해 보인다(“난 이제 아무도 필요 없어. 널 지우면 내 마음 아플 일은 더 없을지도 모르지.)”. 어딘지 모르게 다정하고 애틋한 말투와 태도, 그가 호소하는 마음의 상처는 첼이 된 내가 글라도스, 즉 영원히 혼자 ‘아직 살아 있어서’ 과학실험에 매진할 폭력적 시스템을 동정하고 연민하게까지 만든다. 탈출의 허무함과 글라도스에 대한 연민이 보여 주는 것은 시스템의 폭력에 대한 도취와 애착인 것이다.

나가며: 코딩의 문제

글라도스는 첼에게 글라도스를 파괴할 포털건을 건네고, 성취감과 쾌감을 주고 보상을 약속한다. 이 퍼즐 게임에서 시스템에 적응하는 것과 시스템에서 탈출하는 역량을 기르는 것은 분리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한 단계씩 올라 시스템을 탈출하는 바로 그 순간 나는 시스템 안으로 돌아가기를 가장 간절하게 원하게 된다. 이제 나는 애퍼처 사이언스 밖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 버렸다. 시스템의 궁극적 목적인 실험에 가장 부적합하기에 시스템을 무너뜨리는 데 선택받은 존재였던 첼은 플레이 경험 속에서 실험에 최적화된 인간이 되었다. 반복적으로 부서지는 로봇들의 이미지는 실험의 실패로서 죽음을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고, 호감을 느끼도록 귀엽게 디자인된 살인 로봇들, 실험을 수행할 때 나오는 음악과 속도감 있는 시각 효과들의 연결은 위험을 즐길 만한 것으로 만든다. 첼 또한 실험에 익숙해지고 도취된다. 플레이어는 실험을 사랑하게 된다. 글라도스를 그리워하게 된다. 실험실에서 나온 이후의 허무함은 이제 더는 실험을 할 수 없다는, 즉 폭력적인 상황에 놓일 수 없다는 데서 기인한다. 시스템의 폭력을 딛고 올라서는 데 도취하다 보면 폭력을 원하게 된다. 심지어 그것이 나를 향할지라도. 폭력의 극복은 폭력에의 도취다.
폭력에 도취하고 애착을 느끼는 것은 폭력을 저지르는 존재만이 아니다. 이것은 그 상황에 놓인 개별 존재가 지닌 역량의 문제가 아니라 ‘주체’라는 자리가 코딩된 방식의 문제다. 글을 마무리하며 지금 한국의 관제실과 그 주변을 돌아본다. 잘못된 선택을 내리도록 특수 설계된 존재들, 폭력을 행사할 힘과 그것에 도취하는 기제를 제공하는 자리를 돌아본다. 구조는 도취와 애착을 경로로 폭력의 반복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재생산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한국 사회를 재생산하는 폭력 안에서 어떤 힘을 갖게 되고, 무엇에 도취되며, 무엇을 사랑하게 되는가? 그리고 과연 우리는 폭력적인 세계와 주고받는 애착을 감당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