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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편-상처-응답
이 글을 위해 관계자들을 만나서 전시 기획에 대한 설명을 들을 때, 반가운 이름이 여럿 보였다. 이미 내가 전시나 책, 영상 등을 통해 멀리서 무언가를 배운 이들이었다. 무엇보다도 그중에서는 내가 장애인의 문화예술 접근성에 대해 지금과 같이 비평적 관점과 정치경제적 관점을 연결할 수 있게끔 해 준 이들이 있었다. 그래서 이 글은 내가 그들로부터 배운 것에 관한 작은 주석이자, 그 배움을 내 나름대로 넘어서고 확장해 보려는 하나의 시도다. 무엇보다도 이번 전시의 주제어인 접근성, 취약성, 주체성의 문제를 갱신하는 이 시도의 중심에는 번역, 외상, 변용이 있다.
눈과 귀 사이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적힌 문자를 발음할 때 생기는 말소의 문제를 다루었다. 이를테면, ‘he war’라는 어구를 소리내어 발음하려 할 때 그것이 영어인지, 독일어인지 결정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해당 어구가 갖고 있는 복수성은 사라진다. 여러 가능성 중 하나만이 선택되고, 나머지 가능성은 말소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이것은 특정한 발음을 통해 하나의 언어로 환원될 수 있는 가능성만이 생존한다는 뜻이다. 그는 이것을 눈으로 본 것을 귀로 들리는 것으로 번역하는 과정에 근원적으로 내재하는 폭력, 즉 눈과 귀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환원과 말소의 폭력으로 이해했다.⁽¹⁾
그에게 이것은 형이상학적 층위의 이야기였지만, 나는 그가 꾸준히 지극히 신체적이고 일상적인 은유를 사용한다는 데, 무엇보다도 그것을 번역이라는 주제어와 연관 짓는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다. 대학에서 배리어프리 영화 상영회에 갔다가 장애인권 동아리까지 들어가게 된 나에게, 접근성의 맥락에서 감각은 언제나 번역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내가 계속 고민하고 있는 것은 해석의 여지를 말소하지 않고, 동등한 미적 체험과 비평의 조건을 생성하는,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을 보존하는 번역으로서의 감각 번역이다.
시작은 한 편의 논문이었다. 시각장애인과 청각장애인의 문화예술 접근성을 공연예술을 중심으로 탐구한 이 논문에서는 우리에게 익숙한 (해당 공간에 갈 수 있느냐와 같은) 물리적 접근성과 (같은 정보를 수용할 수 있느냐와 같은) 정보 접근성을 넘어, 예술 현장 고유의 접근성으로서 ‘미적 체험에의 접근성’을 제안한다. 똑같은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기보다, 설령 정보에서 차이가 생기더라도 동등한 수준의 미적 체험을 하는 것이야말로 문화예술 접근성의 핵심이 아니겠냐는 것이다.⁽²⁾ ‘감각 번역’이라는 개념은 이러한 문제의식에 깊이 공감한 결과였다. 여러 감각의 ‘종합’이나 상호 간의 ‘보완’을 통해 하나의 작품을 감상하는 경험과 동등한 수준의 경험을, 하나의 감각으로 다른 감각을 모두 ‘대체’함으로써 이뤄낼 수 있게끔 하자는 제안(혹은 선언)이 감각 번역 개념의 핵심이었던 이유다.⁽³⁾
미적 체험에의 접근성은 결과가 아닌 과정이다. 비평가 이동휘는 미적 체험은 “예술작품에 관해서라면 아무리 합의를 시도하더라도 사람마다 그것에 대해 가지는 표상을 동일하게 합의하지 못할 가능성”으로서의 “최종 심급에서의 합의불가능성”으로 인하여 사적인 것이 된다고 썼다. 그런 맥락에서 어떤 작품에 대해 (화면해설 매뉴얼 등에서 요구하는 것처럼) ‘주관을 가능한 한 배제’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예술작품은 근원적으로 사적이므로 “사적 개념화, 즉 해석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적 체험은 단지 미술관이나 공연장에 가서 특정한 정보를 접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감각적 혼란에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감응함으로써 감상과 비평을 내놓는 것이다. 미적 체험은 특정한 예술작품에 대하여 “각 개인에게 그것의 예술작품성을 직접 수립하고 설득하는 일에 참여할 권리 혹은 책임을 부여하기 때문이다.”⁽⁴⁾
비평가 이여로는 같은 책에서 이 논의를 받아 해석이 작품에 내재할 뿐 아니라, 감각 작용 자체에 내재한다고까지 이야기한다.⁽⁵⁾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리는 상황을 생각해 보자. 소셜 미디어에 사진을 올리는 건 단지 내가 무엇을 먹고 어디에 갔는지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다. 그것은 구도와 색감, 빛 노출 등의 조정을 통해 특정한 미감을 공유하며 사람들과 관계를 맺기 위함이다. 정보 전달이 아니라 분위기의 전염이 목적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미지에 대체 텍스트를 입력할 때도 그러한 분위기를 전달하기 위한 말들을 골라야 한다. 시각장애인에게는 바로 그 대체 텍스트가 이미지이고, 감각의 대상이다. 그런 맥락에서 우리가 어떤 이미지를 마주했을 때 그것의 감각과 해석 중 무엇이 먼저인지 따지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거나 별 의미가 없다.
분위기의 전염은 투명한 설명이어서는 안 되는데, 그것이야말로 ‘미적 체험’과 가장 대척점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적 체험에의 접근성이란 혼란의 평등을 위한 조건이다. 감각 번역은 같은 것을 느끼게 하는, 특정한 메시지를 ‘도착하게 하는’ 작업이 아니라, 이것 혹은 저것을 느낄 수도 있고 느끼지 못할 수도 있게 하는, 특정한 메시지를 ‘도착하지 않을 수도 있게’ 하는 실천이다. 그래서 감각 번역이 이루어내는 접근성은 우편적이다. 어떤 메시지가 도착할 수도 있고 도착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 애당초 아름다움, 예술, 미적 체험의 본질적인 영역이고, 바로 그것이 감상, 비평, 해석, 사랑, 증오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라면, 예술이란 근본적으로 오배송의 가능성을 지닌 우편적인 대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감각 번역이란 정확한 해석이나 높은 일치도가 아닌, 동등한 오배송의 가능성을 보장하는 우편 공간을 구성하는 일이다. 우편적 접근성이란 눈과 귀 사이 공간으로부터 출발하여, 무수한 감각 기관들 사이 공간을 동등한 오배송의 조건으로서 우편 공간으로, 감각 기관들을 우체국과 우체부들로 구성하는 감각 번역의 결과다.
접근성이 작품에 덧붙는 부차적인 것이 아니라, 기획과 제작 단계 내내 고려되어야 하는 것, 즉 작품의 일부라면, 작품과 마찬가지로 접근성 또한 비평과 사변의 대상이 될 수 있어야 한다. 이미지의 대체 텍스트가 그 자체로 해석과 감상, 비평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감각 번역의 목표는 더 많은 이들의 더 넓은 비평과 사변의 계기로서의 예술을 구성하는 것이다. “누군가 예술을 좋아한다고 말할 때, 이 말은 사실 예술에 대해 말하기를 좋아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⁶⁾ 무수한 신체가 감응하는 공론장을 구성하는 것이다. “번역을 실패시키는 것처럼 보이는 바로 그 작품이 번역을 촉구”하고, 바로 그런 작품이야말로 “번역자들 […] 번역의 새로운 규약들 […] 주어지지 않은 번역이 생산될 수 있도록 여타의 사건들을 생산”한다는 점에서,⁽⁷⁾ 감각 번역은 접근성을 확보함으로써 어떤 예술 작품을 눈과 귀 사이 우편 공간으로 구성하여 새로운 주체성의 조건을 마련하는 실천이다.
욕망과 공간 사이
감각 번역에 대한 강조는 당연하게도 물리적 접근성과 정보 접근성의 확보와 대립하지 않는다. 나에게 전자는 오히려 후자의 문제의식으로부터 출발하기도 했다. 전자와 후자의 현실은 모두 접근성을 1과 0의 문제가 아닌 정도의 문제로 보도록 요구한다. 바로 그러한 맥락에서 나는 불충분한 접근성들에 관해 이야기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나는 그것을 자본의 문제와 연결하고자 ‘영세한 접근성’에 이러한 문제의식을 집약시킬 것이다.
최태윤과 연 나탈리 미크가 <일하지 않는 움직임 / 이주하는 몸들>에서 노동하지 않는 이주민을 장애인과 겹쳐서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은 산업 자본주의 시대에 장애가 노동 가치와 결부되어 정의된 맥락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는 경제 체제의 문제를 넘어 장애의 문화적 재현에까지 영향을 미쳤고, 장애의 재현, 이를 통해 만들어지는 사회의 표상은 그것의 실제를 압도하고 역으로 구성하기에 이르렀다.⁽⁸⁾ 장애인 없는 사회라는 표상은 정책과 행정 조치를 거치며 장애인의 출입을 고려하지 않은 건물과 거리로 물질화되었고, 장애인 시설 수용의 필요성은 장애인의 노동 가치 대신 민간 복지 자본의 쓸모와의 관계에서 정당화되었다.⁽⁹⁾ 장애인 없는 거리와 대중교통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비장애인들만의 ‘매끈하고 위생적인’ 세계는 언제나 정부 권력과 자본의 주도를 통해서만 가능한 수행적 폭력이었다.⁽¹⁰⁾ 접근성을 중심에 둔 권력과 자본의 폭력은 이제 기묘한 방식으로 세공되었다. 지하철에는 여전히 엘리베이터도 충분히 설치되지 않았지만, ‘완전히 배리어프리’한 스타필드나 백화점 등의 자본 집약적 거대 상가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물론 들어갈 수 있는 장소가 늘어나는 건 좋은 일이다. 그러나 접근성 실현이 자본과 권력만의 책임으로 규정되고 권리는 단지 그것을 요구할 기회가 될 뿐이라면, 그래서 접근성이 실현되거나 실현되지 못하거나 하는 1과 0의 문제가 된다면, 오히려 더 근본적인 접근성은 무력화된다.
내가 대학에서 장애인권 활동을 할 때, 우리의 접근성 지도 그리기에서 공간에 대한 물리적 접근성은 특정한 분위기와 경험에 대한 접근성으로 변해 갔다. 턱의 높이나 통로의 너비 등에서 모든 조건을 만족하는 상가는 거의 없었지만, 우리는 당연히 매일 같은 곳에서 같은 것만 먹을 수 없었다. 접근만 가능한 식당들이 지긋지긋해지기 시작했다. 다른 곳에 가고 싶었다. 때로는 수동휠체어를 뒤에서 기울여 잡아당기며 계단을 세 칸씩 올랐다. 어떤 녀석은 전동휠체어로 턱을 오르는 기예를 터득했다. 무슨 수를 써서든 들어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는 완전히 매끈한 상가의 목록이 아니라, 진입을 위해 (누구의 어떤) 보조가 필요한지까지 기록하는, 더욱 상세하고 매뉴얼과는 멀어진, 표준화되기 어려운 엑셀 파일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 경험은 친구 혹은 연인과 놀러 가기 좋은, 혹은 가족끼리 갈 만한 ‘좋은’ 공간을 찾아서 기록하고, 접근 불가능하다면 경사로 설치까지 연계하는 방식의 사업과 접속했다. 접근성은 정도의 문제이자 욕망의 문제였다. 아니, 정확히는 욕망이 접근성을 정도의 문제로 만들었다.
이제 중요한 것은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닌 ‘들어가고 싶은 곳’, 제약보다 취향이었다. 우리는 힙한 카페에 함께 가고 싶었다. 맛있는 음식 먹고 사진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리기를 좋아하는 친구는 가고 싶은 곳이 많았다. 크고 넓고 엘리베이터 있고 사람 많은 새 건물 말고, 작고 좁고 엘리베이터도 없는데 사람은 좀 많은 오래된 건물에 가서 같이 사진도 찍고 싶었다. 특정한 미감과 재미를 향한 우리의 욕망은 약간의 틈이라도 보이면 어떻게든 그리로 올라가 보려 안간힘을 쓰게 만들어서, 접근성을 1과 0이 아닌 정도의 문제로 만들고야 말았다. 덜컹거리는 우리의 여정에는 흠결이 많았다. 내가 영세한 접근성이라고 부르는 건 바로 이러한 상황 혹은 경험이다. 그래서 영세한 접근성을 고려하는 것은 우리의 별것 아니지만 소중한 욕망들로부터 출발하여 작은 상가들에 접근성을 확보하기 위한 예산이나 지원 사업, 접근성 조례의 의무화 등을 고민하며 작은 공간에서 일하는 사람들, 그 공간을 소유한 사람, 그런 운동을 하는 시민 단체 등이 다 같이 연합하는 연대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일이다. 장애인의 경험과 미감이 계급과 신체의 마주침의 문제임을 인식하는 일이다. 따라서 이것은 단지 장애인만의 일이 아니며, 장애인에서 출발하여 여기저기 이모저모의 작고 절박한 연대를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데이비드 기슨의 <블록 파티: 자립의 삶으로부터 장애 공동체를 이루기까지>와 리처드 도허티의 <농인 공간>은 건축의 차원에서 이루어진 접근성 정치의 미학화다. 기슨의 작업이 특정한 동네 자체를 접근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 사유지들 사이의 틈새 공간을 활용하여 동네 자체의 물질적 조건을 재배치하는 절박한 실험이라면, 도허티의 작업은 농인의 대화 장면을 그 자체로 공간의 형태로 구체화함으로써 공간에는 언제나 특정한 방식의 경험이 파묻혀(embedded) 있음을 보여주고,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특정한 경험을 통해 새로운 형태의 공간을 건설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데까지 나아간다. 농인에게 필요한 시각 정보를 위해 채택된 선명한 색의 구조물들은 전시의 주제에 포함된 노화를 경험하는, 특히 인지 능력에서의 저하를 경험하는 이들의 공간 접근성에도 큰 영향을 준다. 두 작업 모두에서 장애인의 경험은 공간 자체의 재배치로 이어지고, 공간의 재배치는 다시금 장애인의 경험을 바꾼다. 여기서 발견되는 접근성의 수행적이고 회절적인 성격은 가치관과 디자인의 결합을 통해 공간의 성질 자체에 개입하는 윤충근의 <미술관 디자인 비평>, 그리고 국립현대미술관 계단 입구를 선명한 색의 의자로 가로막는 구조물 설치 작업 등을 통해 더욱 일상적인 장면에서 형상화된다. 주변화된 몸들의 욕망과 공간은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물질화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원하는 바로 그 경험이 우리에게 도착할지는 알 수 없다. 즐거운 경험도 우리가 원하던 그것은 아닐 수 있고, 피곤하고 구질구질한 경험이 의외로 우리에게 더 많은 걸 남기기도 하기 때문이다.
바깥과 안 사이
눈과 귀 사이에서 감각은 언제 도착할지도 모르는 우편이 되어 움직이고, 욕망과 공간 사이에서 경험은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해보려는 이들의 관계 안에서 그때마다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임의적이고 우발적으로 발생함으로써 욕망과 공간을 모두 변형한다. 접근성의 맥락에서 감각과 경험은 어떤 감각들 혹은 영역들 사이를 매개하고, 각자가 원하는 바를 현실적 제약 안에서 가까스로 조율하고, 그러한 조율을 통해 매개된 항들을 불가피하게 모두 변형시킨다는 바로 그 점에서 번역이다.⁽¹¹⁾ 눈과 귀 사이, 그리고 욕망과 공간 사이에서의 번역이 무수한 다른 사람들과 사물들을 조율하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무수한 우체국들에서 발신한 우편은 결국 우리에게 도착하지 않을지 모른다. 우리는 언제나 어느 정도 잃어버린, 어느 정도 여전히 알 수 없는 감각과 경험을 얻는다. 즉, 우편적 접근성은 접근성이 정도의 문제임을 내포한다.
접근성이 정도의 문제라는 점에서, 접근성은 유리수적이라고 이야기해 볼 수 있다. 한 종류의 접근성에서 어느 두 수준을 고르더라도 그 사이의 타협점으로서 내분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기존에 알던 방식만으로는 발견할 수 없는 타협점들이 존재한다. 여기서 접근성에서의 데데킨트 절단, 혹은 접근성의 무리수적 절단으로 접근성을 재발명해야 한다. 데데킨트 절단은 이미 알고 있는 유리수만을 통해 무리수를 발견=발명하는, 이미 우리가 알고 있던 것이 불가능해지는 바로 그 지점을 파헤치는 방법이다. 제곱을 해서 2가 나오는 숫자는 분명 1과 2 사이에 있다. 1.5의 제곱이 2.25이고 1.4의 제곱이 1.96이니까 1.4와 1.5 사이로 좁힐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계속 좁혀도 내가 원하는 값을 구할 수는 없다. 둘 사이의 비율을 구하는 유리수적인 방식만으로는 불가능하다. 데데킨트 절단 혹은 무리수적 절단은 바로 이 불가능의 지점을 생성의 장소로 삼는 것이다. 질 들뢰즈라는 프랑스 철학자는 현대 영화의 몽타주에서 나타나는 중요한 특징을 ‘무리수적 절단’으로 명명했다. 이것은 쇼트들 사이를 매끄럽게 이어서 완결성 있는 서사를 만들기보다, 쇼트들 사이에 덜컹거리는 틈을 만들어 작품이 무너지는 지점, 혹은 작품의 ‘바깥’을 마주하게끔 만드는 것이며, 여기서 우리는 아직 알지 못하는 것을 사유할 수 없다는 어쩌면 새삼스러운 우리 자신의 ‘무능력’을 감각한다. 바깥이 침입한다. 여기서 사유가 시작된다. 이제 문제는 특정 작품의 차원을 넘어선다. 작품 속의 틈새들을 통해 바깥을 사유하기 시작한 관객들의 시간이다.⁽¹²⁾
들뢰즈에게서 이것은 익숙한 내러티브 중심의 구성을 벗어난 현대 영화의 특징에 관한 이야기였지만, 내가 이것을 문화예술 일반과 장애인 접근성의 문제에 접붙임으로써 확장하는 것은, 장애가 매끄러워(seamless) 보이는 장소에서 어떤 틈새(seam)를 마주하고, 이를 통해 지금의 바깥을 사유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계기에 붙여지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장애는 단지 특정한 몸의 형태나 특징이 아닌, 몸과 사물과 세계 사이의 무수한 마주침들 안에서 생겨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경험의 한 양태이며, 무엇보다도 그 마주침이 내포하는 불가능성의 경험이다. 어떤 몸들과 어떤 물질적 조건들이 연결될 때, 매끄러워 보였던 세계 안에서 무수한 빈틈이, 혹은 바깥이 드러나기 때문이다.⁽¹³⁾ 특정한 몸들이 특정한 환경에서 선택의 여지 없이 무언가를 겪고 견디길 요구받는 장면들에서 불가피하게 발견되고 작동하는 역량이자 주체성.
중요한 것은 여기서 ‘바깥’이 체제의 외부이기보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의 바깥이지만 여전히 체제 안에서 미지의 영역을 지시한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원래 아는 것들을 바탕으로 더 많은 것을 지식화하는 매뉴얼은 유리수적이다.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매뉴얼이 (유리수처럼) 아무리 조밀해도 포함하지 못하는 것은 (무리수만큼) 무한히 많다. 몸의 경험이란 결코 유리수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매뉴얼의 바깥이자 일상의 내부에 있는 것들에 언제나 예비하는 것, 혹은 예비할 수 없는 불가능의 경험을 마주하는 것이며, 그럴 수 있는 물질적 조건을 마련하는 것이다. 이러한 고민은 일부 전문가만의 몫도 아니며, 전문가만이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전문가만이 해서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러므로 접근성에 대한 접근성까지 갖추어져야 진정한 의미에서 접근성은 (실수처럼) 완비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접근성의 문제는 언제나 예상치 못한 변수와 맞닥뜨리는 현실적인 실천의 영역이다. 완비된 매뉴얼이나 표준화된 체계를 통해서만 해결되지 않기에, 우리는 필연적으로 ‘아마추어적인’ 감각과 태도—즉 브리콜라주적 접근—으로 문제를 풀어나가야만 한다. 브리콜라주를 하는 주체인 브리콜뢰르는 ‘손에 잡히는 아무것이나’로 당장 필요한 무언가를 뚝딱 만들어내는 존재다. 이들은 목적에 맞는 완벽한 도구나 재료가 아닌, 그저 잡다한 것들로 문제에 대응하며, 설계도가 아닌 경험과 즉흥성으로 일상을 구성한다. 접근성을 고민하는 우리는, 바로 그런 브리콜뢰르처럼 어떻게든 삶의 ‘틈’을 채워야만 하는 아마추어다. 조밀한 영역 바깥, 빈틈을 감지하고, 그 빈틈에 대처할 매뉴얼 없이 임기응변으로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하는 이들. 무엇보다도 이것은 이들에게 “달리 이용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¹⁴⁾ 조밀성과 완비성 사이에서 작업하는 브리콜뢰르는 기존에 주어진 모든 것을 닥치는 대로 먹어 치우고 가져다 접붙이며 너저분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치욕스럽게도 불순한 정치성”⁽¹⁵⁾으로서의 급진성을 갖고 있다. 이것이 ‘치욕스럽게도 불순한’ 이유는, 비평가 진송의 아마추어리즘에 관한 문장을 빌리자면, 그러한 급진성이 ‘아버지’에 대한 거부와 ‘바깥’에의 지향보다 “아버지의 몸도 마음도 뼈도 살도 다 먹고 어머니의 피와 골수까지 다 마시고 갓 태어난 아이들로부터 혈청을 채취해서 제 몸에 이식하면 된다는 마음가짐”에 있기 때문이다.⁽¹⁶⁾
브리콜뢰르로서의 아마추어, 브리콜라주로서의 아마추어 접근성.⁽¹⁷⁾ 이것이 접근성 자체를 접근 가능하게 만든다. 모두를 위한 접근성은 언제나 모두의, 모두에 의한 접근성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이것이 접근성의 접근성이다. 사라 헨드렌의 <집에서 엔지니어링 하기>는 접근성의 접근성으로서 브리콜라주의 한 사례를 보여준다. 막대한 자본과 기술력, 당대 최고의 과학자·기술자·공학자 등을 투입하여 개발한 로봇 의수가 실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고, 오히려 별것 아닌 사소한 도구들을 접붙여서 만든 임기응변의 결과물들이 일상에 훨씬 큰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다. 거대 자본과 첨단 기술은 결코 일상과 몸의 문제를 단번에 해결해 주지 못하며, 지극히 ‘하찮은’ 손재주에 의해 권위를 잃는다. 그런 맥락에서 이 작품의 제목은 ‘엔지니어링’이라는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영역을 ‘집에서 하는’ 아마추어적인 것으로 개입하면서 접근성의 접근성을 확보하는 하나의 사례이자 일상적이기에 발본적인 문제 제기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어떤 감각과 경험의 우체국이자 아마추어 배달부다. 우리는 모두 어디서 왔는지 불분명하며 어디로 보내야 할지 헷갈려서 망설여지는 우편을 무수히 나눠 갖고 있다.
외상과 응답 사이
“우리는 서로로 인해 와해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뭔가를 놓치고 있는 것이다.”⁽¹⁸⁾
누가 우편을 기다리나? 왜 기다리나? 아니, 좀 더 정확히 묻자. 분명 어떤 우편은 누군가에게 실제로 도착하거나, 도착했다는 믿음을 준다. 오배송된 우편이지만 나에게 온 것이 맞다는 착각을 받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오류를 오류가 아닌 것처럼 덮는가? 거꾸로, 어떤 계기로 인하여 우편이 실은 도착하지 않았으며, 나에게 온 우편의 수신인도 실은 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가? 등 뒤에서 발화된 ‘거기, 당신!’이라는 호명⁽¹⁹⁾에 나는 왜 돌아보지 않는가? 나는 여기에 아주 단순한 신체적 은유로 답하고자 한다. 손으로만 글을 읽는 이는 자신이 받은 우편에 점자가 없을 때 그것이 자신을 위해 쓰인 것이 아님을 알며, 입 모양과 소리를 종합해야만 말을 ‘들을’ 수 있는 이는 등 뒤에서의 부름을 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몸에 닿지 않기 때문이다. 몸과 우편과 호명이 물질성으로 인해 불화하는 그 순간. 우편이 반송되고 호명이 흩어지는 바로 그 순간.
그러나 문제는 수취의 보편성, 혹은 그것에 대한 믿음이다. 분명 다른 모든 이는 어떤 우편들을 받고, 읽고, 이해하고, 그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듯하기 때문이다. 나만이 어떤 우편을 받지 못했음을, 나만이 어떤 이에게 등을 돌려 그와 마주하지 못했음을 안다. 그럼으로써 나만이 무언가가, 정말이지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다른 이들은 분명 아는 듯한 무언가가 되지 못했음을 안다. 모두가 편지를 받고 그것에 울거나 웃을 때 나만 나의 편지를 영원히 기다리는 그 마음은 답답함이다. 억울함이다. 분노다. 수치심이다. 속상함이다. 외로움이다. 나에게만 오배송이 반복된다는, 내 주소지만 제대로 적혀 있지 않은데 그걸 정정할 방법도 없다는, 배제의 폭력에 의한, 상처다. 상처 입은 몸은 위태롭다. 구나의 <몸의 심야>는 탁하고 미세한 주름과 흠집으로, 그을음이나 얼룩으로, 혹은 깊숙이 뚫린 관통의 흔적으로 그러한 폭력과 상처를 증언한다. 그 흔적들은 오배송된 편지들이 남긴 상흔이다.
하지만 두 조형물은 묘하게도 안정적으로 땅에 뿌리 내리고 있다. 훼손의 흔적을 감추지 못하는 채로, 그러나 당혹스러울 만큼 굳건하게 버티고 있다. 자, 이것이 나의 몸과 마음이다. 여전히 나는 우편을 기다리고 있고, 여전히 오배송은 나를 상처 입히지만, 그럼에도 나는 이곳에서 기다리겠다. 어차피 선택의 여지는 버티며 기다리거나 쓰러져 기다리거나, 둘 중 하나뿐이기 때문이다. 상처 입지 않을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오히려 나에게 오는 고통을, 어쩌면 영원할지 모를 고통을 적극적으로 집어삼키겠다. 장애와 섹슈얼리티의 관계를 탐구하는 판테하 아바레시의 작업이 BDSM 실천에 대한 실험과 결부되어 있는 것은 그런 맥락에서 자연스럽다. 불문학자 리오 버사니는 인간의 섹슈얼리티를 거대한 고통을 성적 쾌감으로 변환하여 견딜 수 있게 하는, 근본적으로 사도마조히즘적인 것으로 설명했다.⁽²⁰⁾ 아바레시의 작품들은 적극적으로 섹슈얼리티와 욕망을 탐색하는 도구이기도 하고(<새로운 인공물>, <잴 수 없는 변칙>), 그것을 탐색하는 몸이기도 하고(<사물 욕망>), 자신이 감각하는 몸의 해부도가 되기도 한다(<닫힌 시스템>).
발신과 수신, 중간 배달의 무수한 반복 안에서 오배송이 발생한다면, 우리는 오배송의 반복에서 상처를 입는다. 상처는 우리를 아프게 하지만, 이를 피할 수 없기에 우리는 그것을 견디는 방법을 찾아내고야 만다. 접근성은 무수한 조율, 협상, 타협의 과정이라는 점에서 무수히 부딪히는 경험이고, 따라서 다른 이들로부터 상처를 입는 일이기도 하다. 상처를 입는다는 것은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나에게 틈새가 생긴다는 것이다. 바로 그 틈새는 또 다른 우편이 꽂힐 수 있는 자리가 된다. 언제 올지 모를 나의 우편을 기다리며 나는 영영 그 틈새를 완전히 메우지 못한 채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우편이 도착하지 않는 시간을 견디는 것은 그 자체로 오지 않는 우편에 답장을 쓰는 하나의 방식이다.
견딤조차 하나의 답장이라면, 나는 응답에 관한 이야기로 이 비평을 마무리할 수밖에 없다. 미국의 퀴어 페미니스트 철학자 도나 해러웨이는 응답-능력(response-ability)으로서의 책임(responsibility)을 말했다.⁽²¹⁾ 이것은 책임이 단지 윤리나 태도, 가치관의 문제가 아니라, 꾸준하고 반복적인 실천을 통해 훈련될 수 있음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취약함을 주제어로 삼는 이번 전시에서는 제목처럼 서로에게 ‘기울인 몸들’이 자주 등장하며, 그러한 기울임은 자주 마주함이고, 서로를 견디는 일이다. 천경우의 <힘이 되거나 짐이 되거나>에 등장하는 모든 손은 맞잡고 있다. 잡는 것은 언제나 동시에 잡히고 있다. 때로 힘은 짐이 되고, 짐은 힘이 된다. 크리스틴 선 킴의 <일상의 수어>에서는 수어를 하는 하나의 손짓이 서로의 시선에서 대칭을 이룸으로써, 시선들의 서로를 향한 기울임을 통해 하나의 의미를 구성한다.
이는 무엇보다도 김원영과 윤상은의 작업에서 두드러진다. 김원영의 <보철(물)로서 움직이기 – 머신/어포던스/케어〉에서 두 무용수는 서로의 보철이 되어 움직인다. 특히 업는 듯 아래에 있는 사람이 업힌 듯 위에 있는 사람의 다리에 기대어 걸을 때, 누가 업었고 업힌 건지 알 수 없는 장면은 보철이라는 것이 내 몸에 속한 것도, 속하지 않은 것도 아님을, 무엇보다도 그런 맥락에서 서로 다른 몸들 또한 서로에게 속한 듯 속하지 않은 듯한 채로 존재함을 보여준다. 보철이 된 몸들이 서로의 무게를 견디고, 속도를 견디며 움직이듯, 윤상은의 <어딘가의 발레>에서 ‘모두를 위한’ 안무는 결국 몸들이 직접 닿고 연결되는 동작을 요구하게 되어 있다.
연결이 순간이 아닌 지속이라면, 그것은 유지보수이며, 돌봄이며 땜질이고, 서로를 견디는 일이다. 나의 바깥으로부터 무언가가 나에게로 침투하는 폭력적인 경험을 감수하면서 이를 통해 변화하는 역량으로서의 감수성(patiency)은 서로를 견디고 변용되어 가는 과정에서 생겨난다. 다른 몸의 무게와 속도를 느끼고 견디고 기다려 줄 때 비로소 생겨나는 역량과 마음이야말로 ‘모두를 위한’ 무언가를 고민할 때 가장 중요한 지점이 아닐까? 연결은 결코 매끄럽지 않고 언제나 덜컹거리며, 대체로 영세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는 그럼에도 어떻게든 감각과 경험을 소통하려 아등바등한다. 이러한 역량과 마음을 만들어내는 작은 실천들 하나하나가 서로에 대한 접근성을 구성한다. 나와 너의 경계가 불분명해지는 폭력에서 생기는 온갖 상처, 훼손, 무엇보다도 외상들을 비집고, 또 다른 우편이 (잘못?) 도착한다.
반복되는 오배송의 외로운 경험에서, 우리에게는 고작 상처받은 만큼의 용기가 있을 뿐이다. 나에게 침입한 것들에 응답하며 살아갈 뿐이다. 배제와 폭력의 흔적 안에서 웅크리고 펴길 반복하며 또 다른 타자의 폭력에 예비할 뿐이다. 너로 인해 찢어지고 여태 아물지 못한 만큼 벌어져 있을 뿐이다.⁽²²⁾ 그리하여 상처투성이인 내가 결국 상처받을지 모를 너에게 접근할 것이 아니라면, 그리고 나의 상처를 틈새 삼아 너의 몸과 마음이 나에게 기울고 침입할 것이 아니라면, 그렇게 우리가 서로를 견디고 서로에게 응답하며 변용될 것이 아니라면, 왜 우리는 오지 않는 우편을 기다리고, 왜 상처는 흉터를 흔적으로 남기며 아물겠는가?
참고문헌
⁽¹⁾ 아즈마 히로키, 『존재론적, 우편적: 자크 데리다에 대하여』, 조영일 옮김, 도서출판 b, 2015, 17~27쪽
⁽²⁾ 문영민, 김원영. 「시·청각장애인의 문화예술 접근성 연구: 공연예술 접근성을 중심으로」, 『재활복지』, 19(2), 2015, 99-128.
⁽³⁾ 안희제, 「종합에서 대체로, 감각의 새로운 가능성: 예술 경험의 장벽을 넘어서」, 『arte365』, 2021년 8월 2일.
⁽⁴⁾ 이동휘, 「예술은 사적이다」, 이동휘·이여로, 『시급하지만 인기는 없는 문제: 예술, 언어, 이론』, 미디어버스, 2022, 28, 31, 35쪽.
⁽⁵⁾ 이여로, 「소리 연습: 예술이라 부르기 전에」, 같은 책, 54쪽.
⁽⁶⁾ 이동휘, 「예술과 개념」, 같은 책, 68쪽.
⁽⁷⁾ 자크 데리다·마우리치오 페라리스, 『비밀의 취향』, 김민호 옮김, 이학사, 2022, 21/127 (ebook)
⁽⁸⁾ 수전 손택, 『은유로서의 질병』, 이재원 옮김, 이후, 2002.
⁽⁹⁾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형제복지원 연구팀 엮음, 『절멸과 갱생 사이: 형제복지원의 사회학』,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21.
⁽¹⁰⁾ 김항, 「육체 없는 국민의 건강과 혐오 - 현대 한국의 ‘정치위생학’ 비판」, 『상허학보』, 61, 2021, 89-130.
⁽¹¹⁾ 브뤼노 라투르, 『젊은 과학의 전선: 테크노사이언스와 행위자-연결망의 구축』, 황희숙 옮김, 아카넷, 2016, 235쪽.
⁽¹²⁾ 이지영, 『들뢰즈의 영화철학: 『시네마』를 넘어서』, 이학사, 2025, 239~257쪽.
⁽¹³⁾ 이것은 다음의 책의 논의를 약간 변형하며 인용한 것이다. 김초엽·김원영, 『사이보그가 되다』, 사계절, 2021.
⁽¹⁴⁾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야생의 사고』, 안종남 옮김, 한길사, 1996, 70~71쪽.
⁽¹⁵⁾ 주디스 버틀러, 『안티고네의 주장: 삶과 죽음, 그 사이에 있는 친족 관계』, 조현순 옮김, 동문선, 2005, 20쪽.
⁽¹⁶⁾ 진송, 「아마추어리즘, 부친살해, (그게 아닌) 근친상간」, 『진진송의 블로그』, 2025년 2월 28일.
⁽¹⁷⁾ 본문에서 ‘아마추어’는 비체계성으로 체계 내부로부터 체계에 개입하는, 무지와 미숙련에서 비롯될 수 있는 체계 내부의 임기응변과 유연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해당 단어를 처음 접한 것은 비평과 아마추어(리즘) 담론이며, 이것이 본문의 맥락과 어디서 맞닿거나 멀어지는지는 다음의 글들을 참고하라. 이여로, 「아마추어리즘의 사회, 그리고 예술」, 『문학과사회』, 34(3), 2021, 107-131.; 이여로, 「아마추어의 기원, 아마추어로서 우리」, 『릿터』, 40, 2023.; 강덕구·이여로·이연숙, 「SeMA 비평연구 프로젝트: 2022 라운드테이블 2. 아마추어리즘과 비평」, 『세마 코랄』, 2023년 2월 13일.; 진송·팔도, 「마테리알 제3회 오픈스페이스 Session 4: <아마추어, 돈, 여자 2> 녹취」, 『누워있기협동조합』, 2024년 6월 19일.
⁽¹⁸⁾ 주디스 버틀러, 『위태로운 삶: 애도의 힘과 폭력』, 윤조원 옮김, 필로소픽, 2018, 52쪽.
⁽¹⁹⁾ 루이 알뛰세르,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아미엥에서의 주장』, 김동수 옮김, 솔출판사, 1991, 118~119쪽.
⁽²⁰⁾ 리오 버사니, 『프로이트의 몸: 정신분석과 예술』, 윤조원 옮김, 필로소픽, 2021.
⁽²¹⁾ 도나 해러웨이, 『트러블과 함께하기: 자식이 아니라 친척을 만들자』, 최유미 옮김, 마농지, 2021.
⁽²²⁾ 주디스 버틀러, 『권력의 정신적 삶: 예속화의 이론들』, 강경덕·김세서리아 옮김, 그린비,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