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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육의 문제: 시설사회라는 식민주의, 쇠사슬과 불법 집회라는 포스트콜로니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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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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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 문화인류학과 대학원 2021-1 인터아시아문화연구
국가가 ‘장애인의 날’로 지정한 4월 20일을 장애인 인권운동가들은 ‘장애인차별철폐의 날’이라고 부른다. 2021년 4월 20일 장애인차별철폐의 날, 진보적 장애인 운동 계열 단체는 행정부처가 밀집된 세종특별자치시에서 기습시위를 벌였다. 6차선 도로를 예고 없이 점거한 이 집회에서는 경찰들과의 무력 충돌이 일어났고, 위 사진은 한 비장애인 활동가 A가 경찰들에게 둘러싸여 길고 가느다란 물체에 목이 눌려 눈을 잔뜩 찡그린 장면을 담고 있다. 그의 뒤에는 경찰 인파가, 옆에는 카메라를 들고 채증(採證)을 하는 공무원이, 앞에는 경찰의 행렬에 대항하여 A가 버틸 수 있도록 그의 곁을 지키는 활동가들이 보인다. 이 장면의 배경에는 패스트푸드 식당, 한의원, 학원, 카페가 가득 들어찬 지극히 평범한 상가 건물과 새로 지어진 네모반듯한 아파트가 있고, 교통이 멈춘 공간에서 일반 시민들은 욕을 하거나 상황을 구경한다. Ⓒ 안희제
부재중 전화 그의 이름이 두 번 찍혀 있다
안부 전화거나 연대 사업에 관한 일 때문이겠지만 어쩌면 최악의 경우일 수도 있다
자살과 살인이 문장과 문단마다 번갈아 등장하는 글을 써야 할 수도 있다
내가 『비마이너』 객원기자가 된 후 처음으로 취재한 현장은 ‘송파 세모녀 7주기 추모 기자회견’이었다. 대한불교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 빈곤사회연대, 장애인과가난한이들의 3대적폐폐지공동행동, 기초법바로세우기공동행동, 한국한부모연합이 공동주최한 이 기자회견의 핵심은 ‘부양의무자기준 폐지’였다(비마이너, 2021.2.26.일자). 장애계와 빈민운동은 오랫동안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를 폐지하자고 함께해 왔다. 이들의 연대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빈민운동은 1970년대 박정희 정부가 도시빈민과 노동자들의 삶을 희생시키며 추진한 경제정책에 대해 진보적 지식인과 종교인들이 빈민들과 연대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1987년 6월 항쟁을 통해 정치적 공간이 확대되었고, 빈민운동 조직도 이 시기에 본격적으로 건설되기 시작했다. 이는 당시 국제적인 행사를 앞두고 ‘거리질서 확립’이나 ‘도시환경 정화’라는 명목으로 노점상들을 대대적으로 단속하는 국가에 대항하기 위한 노점상의 투쟁과 조직화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빈민운동과 장애인 운동은 장애인 노점상들의 사망을 계기로 긴밀하게 결합하기 시작했다. 1995년 3월 장애인 노점상 최정환의 분신 사망사건을 계기로 ‘장애인자립추진위원회’가 결성되어, 청계천과 인천 아암도에서 장애인과 노점상의 연대가 이루어졌다. 같은 해 11월 사망한 장애인 노점상 이덕인의 사인을 둘러싸고 ‘진상규명공동대책위’가 결성되었고, 대대적인 투쟁이 전개되었다. 이는 1995년 ‘장애인고용촉진법 개악저지’ 등의 투쟁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그 연대는 2001년 12월 장애인 활동가이자 노점상인 최옥란의 자살을 거쳐 최근의 반빈곤운동에까지 이어지고 있다(최인기 2013: 91-99).
그러나 얼핏 필연적인 듯한 빈민운동과 장애인 운동의 결합은 그리 자연스럽지 않았다. 광주항쟁 이후 다양한 민중운동이 성장하던 1980년대에는 대학에 진학하는 (주로 소아마비인) 장애학생들도 늘어났고, 이들은 학생운동과 민중운동의 영향을 받아 청년 장애인 운동 조직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들은 장애인이 소위 ‘정상적인’ 자본주의 노동시장에 진입할 수 없어 시혜와 동정에 의존해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실에 비판적이었고, 이는 1989년 12월 ‘장애인복지법’과 ‘장애인고용촉진법’의 제정으로 이어졌다(김도현 2007: 41-50).
하지만 ‘장애인고용촉진법’의 핵심 중 하나였던 ‘장애인 고용할당제’는 사실상 소수의 경증장애인에게만 유의미했고, 대다수의 장애인은 여전히 노동시간 바깥의 ‘비공식 경제 부문’에서 생계를 유지해야만 했다. 주로 앵벌이, 행상, 노점상, 야시장, 신문판매원 등을 포함하는 ‘비공식 경제 부문’에 속하는 장애인들을 언론은 ‘영세 장애인’으로 불렀다. 정부는 1988년 서울올림픽 등 대규모 국제행사들을 앞두고 도시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이들을 단속해 보이지 않는 곳으로 내쫓기에 바빴는데, 같은 시점 비슷한 상황에서 투쟁을 이어가던 도시 빈민운동과의 접점은 생각보다 적었다. 1970년대 이래로 도시 빈민운동의 주된 관심사는 철거와 재개발에 맞선 주거권 투쟁과 새로운 정착지 건설이었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청년 장애인 운동 조직의 투쟁에서도 영세 장애인의 문제는 주변화되었다. 앞서 언급한 ‘장애인자립추진위원회’는 그 안에서 영세 장애인의 문제를 통해 사회 변화에 기여하고자 했지만, 운동의 주류에서 밀려나서 1990년대 후반에 해산했다(하금철 2020: 297-300).
그러나 빈민운동과 주류 장애인 운동의 연대, 빈민운동과 영세 장애인 운동 사이의 거리감과 영세 장애인 운동의 주변화는 모두 같은 뿌리로 거슬러 올라간다. 발전국가 시기와 그 이후 대한민국에서 ‘부랑인’, ‘빈민’, ‘불구자’ 혹은 ‘장애자’ 혹은 ‘장애인’은 단지 빈곤으로 내몰려 구제받지 못한 존재가 아니라, 복지 지출을 최소화하고자 하는 국가와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복지법인들의 이해관계 안에서 경제적 이익을 위해 희생된 존재들이다. 국가는 공식적인 재정 지출을 통해 자활이나 복지를 달성할 생각이 없었고, 공적인 구호를 던져둔 다음 그것의 달성은 민간 부문에 맡겼다. 하지만 애초에 목표가 비용의 최소화였기에, 자활이나 복지가 실제로 잘 이루어지는지와 무관하게 그들의 공조는 성공이라고 자축되곤 했다.
소준철은 주로 부랑인을 대상으로 사용된 ‘자활’이라는 용어가 이승만 정권부터 박정희 정부 시기까지 구호 수준에 머물렀고, 이후에는 ‘직업보도사업’을 활성화해 하층민을 자활시키겠다는 취로사업이 정부와 하층민이 아닌 정부와 시설을 연결함으로써, 국가의 ‘자활정책’과 시설의 ‘자활사업’이 서로를 지탱하는 구조로 이어졌다고 밝힌다. 개인의 경제적 독립을 목표로 정당화되는 국가와 시설 사이의 이러한 관계는 지금까지도 여전하다(2021: 164-165). 이 시기의 ‘자활’은 사회복지시설이 직업훈련을 빌미로 수용자를 이익사업에 동원할 수 있는 명분이기도 했다. 1970년대에 이미 시작된 사회복지시설과 정부의 공모는 1980년대 초에 더욱 강화되었다. 사회복지시설은 이전부터 운영해 오던 수익사업을 직업훈련의 일종인 ‘자활사업’으로 변용했으며, 정부는 이를 명목으로 보조금을 지급했다.
정부는 시설을 금전적으로 지원하되 구체적으로 시설이 수용자의 ‘자활’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당시의 자활사업 혹은 자활정책은 민간 주도로 이루어졌다. 정부는 시설의 수익사업과 수용자 인권 침해를 막지 않았고, 수용자들이 지역사회로 복귀할 가능성도 염두에 두지 않았다. 이는 비용의 최소화와 거리를 ‘정화’하겠다는 목표 사이에서 이루어진, 공적 개입의 부족을 민간 영역과의 탈법적 관계로 채우며 부랑자들을 철저히 도구화하는 과정이었다(추지현 2021: 99-104; 김일환 2021; 소준철 2021: 166-183).
‘장애인 문제’에서도 비슷한 구조가 발견된다. 하금철은 장애인 운동의 본격적인 조직화가 이루어졌다고 평가되는 1980년대 이전에 존재한 상이군인 원호 정책과 당사자들의 대응을 밝힌다. 당시 상이군인들에 대한 사람들의 이미지는 폭력, 구걸, 강매와 같은 것들로, 부랑인에게 씌워진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낙인이었다. 전쟁이 상이군인들에게 남긴 폭력은 전후에도 지워지지 않은 채 일상생활 속에서 재생산되었고, 이에 대한 이승만 정부의 원호 정책은 실효성이 없었다. 그래서 당시 상이군인 단체는 비공식적으로 미군 부대 폐기물 처분권, 공설시장 관리권, 버스 배차 업무, 혹은 정부가 요구하는 ‘청부 폭력’(판자촌 철거 등)과 같은 ‘이권 사업’에 개입함으로써 생존권을 확보하고자 했다. 한국 복지정책의 시초가 되는 이승만 정부의 상이군인 원호 정책은 원호 대상자의 수를 축소하는 것을 목표로 했고, 이를 위해 일부 상이군인 단체에 비공식적인 방식으로 이권을 배분한 국가에 상이군인 단체도 순응하면서 둘 사이의 공모 관계가 형성된 것이다(하금철 2020: 302-303). 이렇게 볼 때, 전후 대한민국이 빈민, 부랑인, 장애인을 대하는 방식은 ‘비용의 최소화’와 ‘정치위생학(political hygiene)’이라는 두 개의 키워드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위생학이란 “특정 대상에 대한 감각적이고 직접적인 혐오(disgust)를 기반으로 하여 정치·문화 질서를 변증하고 유지하는 담론과 제도의 복합체를 구성”하는 사고회로를 의미한다. 더럽거나 상처 입었다고 여겨지는 부랑인과 장애인의 몸에 죽음이나 질병을 상기하는 “원초적 불쾌감”이 투사됨에 따라 이들의 몸은 국가를 건설해 나가는 과정에서 제거해야 한다고 여겨졌으며, 바로 이 사고회로를 토대로 부랑인과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배제가 비용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 사람들이 나서서 부랑인이나 상이군인에 대한 낙인을 재생산한 모습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정치위생학은 “일상 차원에서 내면화되어 타자와의 수행적 관계를 규정했기 때문이다.”(김항 2021: 92, 104)
요컨대, 빈민운동과 장애인 운동이 결합하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지만, 이 두 운동이 공동으로 마주하는 억압의 뿌리에는 빈민, 부랑인, 장애인을 사실상 ‘오물’이라는 하나의 집단으로 묶어서 ‘처리’하는 정치위생학이 존재했고, 이는 국가가 공적으로 이들의 삶에 직접 개입하는 대신 사회복지시설이나 장애인 이권 단체와 같은 민간 부문과 “합법과 탈법의 모호한 제도적 경계 속에서”(김일환 2021: 158) 공모함으로써 비용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실현되었다. 그리고 여기서 부랑인들과 장애인들은 경제적 목적으로 이용되었는데, 특히 사회복지시설과 연계된 경우에는 거의 예외 없이 시설 수용으로 이어졌다.
당시 대한민국의 정치위생학이 형제복지원과 같은 시설로의 수용으로 연결된 것은 자연스럽다. 시설은 물리적인 장소만이 아니라, ‘오물’을 배제함으로써 “이상적인 인간의 상이 무엇인지를 호명하는 메커니즘”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김순남 2020: 36). 그러나 여기서 시설은 기존의 연구들과 달리 ‘오물’을 ‘정화’하는, 즉 부랑인이나 장애인을 실질적인 ‘갱생’ 혹은 ‘자활’로 이끄는 장소가 아니었고, 그렇다고 해서 이들을 효율적으로 ‘절멸’시키는 장소도 아니었다(박해남 2021: 59-62). 대한민국의 맥락에서 정부와 사회복지기관의 공모 안에서 탄생하고 유지된 ‘시설’의 가장 전형적인 구조를 보여주는 형제복지원에 관한 연구들을 보면, 오히려 대한민국의 ‘시설’은 ‘오물’을 치우는 공간일 뿐 아니라, ‘대충 오물인 것 같은’ 사람들을 모조리 잡아다가 ‘실제 오물’로 만드는 공간이었다.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한종선은 형제복지원 수용자의 대부분이 “신체가 멀쩡한 상태로 잡혀 와 상당수가 정신이상자가 되거나 지체장애인이 되었다”라고 쓴다(2013: 18). 또한, 적지 않은 수의 피해생존자들은 자신이 부랑인이 아니며, 자신이 친구와 가족 등 사회에 연고가 있다고 말했으며, 한종선 또한 그러한 사람들을 형제복지원 안에서 많이 봤다고 말했다. 당시 형제복지원은 수용 인원의 수에 비례하여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받고 있었으며, 따라서 ‘부랑인’에 대한 굉장히 모호한 규정을 통해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수용하고 있었다. 형제복지원 사건이 공론화되었을 때 가장 경악스러운 문제로 다루어졌을 만큼, ‘부랑인’에 대한 규정은 언제나 모호했다(이소영 2014: 255). 일제강점기인 1912년, 「경찰범처벌규칙」 1항에 ‘부랑인’이라는 용어가 한반도 최초로 정의되었다. 이때의 의미는 “일정한 주소 또는 생업 없이 각 지역으로 배회하는 자”로, “무절제하고 약한 자의식, 의존감 등의 성격적 결함, 규율과 통제 부족”과 같은 특징이 있다고 여겨졌다. 이는 조선 상류층 자제들의 부도덕과 나태를 부각하기 위함이었는데, 이후에는 수많은 걸식아동, 행려병자, 정신병자, 미아, 기아, 걸인 등이 고아원이나 부랑자 수용소로 격리되었다는 사실은 ‘부랑인’이 그 자체로 의미가 고정된 집단이 아니라 일본 제국의 조선 지배에 필요한 방식으로 의미가 쉽게 변할 수 있는 범주였음을 드러낸다. 즉, ‘부랑인’이라는 범주의 등장은 그 자체로 “근대적이며 식민주의적 현상”이었다(김재형 2021: 28-29).
이러한 모호함은 대한민국 성립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박정희 정부 시기 「내무부 훈령 제410호」(1975)에서 부랑인은 “건전한 사회 및 도시 질서를 저해”하고, “사회에 나쁜 영향을 주는 자”로, ‘걸인, 껌팔이, 앵벌이, 노변행상, 빈 지게꾼’ 등의 ‘직업’으로 범주화되기 시작한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사회정화’를 통해 도시를 깨끗이 만들겠다고 천명하였는데, 다른 단속 대상들과는 달리 부랑인들에게는 단속과 검거 이후 사회로부터의 격리·수용까지 이루어져야 했다. 당시 법령을 통해 이러한 방식으로 규정된 부랑인이라는 집단은 신문 기사나 지식인들의 저술 안에서 동정이나 혐오의 대상으로 여겨졌고, 이는 지역사회 차원의 비가시화로도 이어졌다. 형제복지원이 있던 부산의 대표적 지역신문인 『부산일보』에서는 부랑인들로부터 사회를 보호하기 위해서든, 사회로부터 부랑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든 필요한 것은 시설 수용을 통한 분리 조치라는 기사를 반복하여 발행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형제복지원 수용자들은 범죄자, 구호 대상으로만 그려지거나 그저 삭제되어 버렸다. 나아가 복지원 내부의 폭력은 이들을 정말 “‘부랑인’의 행색으로, 부랑인이라 말해도 저항할 수 없는 이들로 만들어” 버렸다(박해남 2021: 67, 75-79).
이처럼, 당시 정부와 시설은 ‘부랑인’이라는 범주를 법령에 새겼고, 언론은 이들을 특정한 방식으로만 표상함으로써 법령에 새겨진 ‘부랑인’이라는 범주를 더욱 정당화·강화했으며, 정치위생학의 작동에 따라 사람들은 그러한 범주를 일상적으로 재생산하였다. 이는 에드워드 사이드가 오리엔탈리즘을 규정하는 과정에서 사용한 문서 의존성(textuality)과도 관련이 깊다. 그는 오리엔탈리즘을 ‘동양’과 ‘서양’이라는 지정학적 지식을 다양한 학술적 작업을 통해 ‘문서로 배분’하는 것이자, “우리들의 세계와 다른 점이 일목요연한(또는 우리들의 세계와 대체될 수 있을 정도로 새로운) 세계를 이해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지배하고, 조종하고, 통합하고자 하는 일정한 ‘의지’나 ‘목적의식’ ‘그 자체’”라고 설명한다(사이드 1991: 32-33).
식민주의적 사고방식을 설명하는 데에는 다양한 방식이 존재하지만, 여기서 사이드가 ‘문서(text)’에 집중한 이유는 그것이 체계적으로 생산되고 쌓이면서 하나의 지식 체계를 이루게 되고, 나아가 사람들이 문서 안에 담긴 대상의 실체보다 문서의 내용을 신뢰하게 되는 과정을 포착하기 위함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부랑인’을 둘러싸고 작성된 법령, 훈령과 같은 문서들, 지식인들의 저술이나 신문 기사, 형제복지원의 잡지 『새마음』과 같은 것들은 ‘부랑인’을 규정하고, 그들을 지배·조종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실현된 경로가 ‘시설 수용’이라는 점은 ‘시설화’가 일종의 문서 의존화(textualization)의 과정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시설은 문서 의존화에 가장 적합하고 효율적인 총체적 기관으로, 위험하다거나 보호·교정·치료가 필요하다고 문서로 규정된 이들을 가두어 실제로 그런 사람으로 만들어낸다. 그래서 지역사회로 나오지 못하는 것을 정당하게 만들어낸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그 사람들의 실제 삶보다 문서를 신뢰하게 되고, 이렇게 강화되는 편견은 정치위생학과 결합하여 ‘부랑인’들에 대한 타자화를 더욱 강화한다. 즉, 시설은 수용자들을 실제 ‘부랑인’으로 만들어내는 공간인 동시에, 시설 바깥 사람들의 사고를 문서 의존적(textual)으로 만드는 공간이다.
이렇게 될 때, 지역사회는 치안을 제외하면 부랑인들의 존재에 대비할 필요가 없어진다. 실제로 당시 국가는 이들을 적극적으로 격리하고자 했고, 시민사회는 이들에 대한 포용·통합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수용자들은 수용소 안에서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존재가 될 능력을 상실했고, 실제로 수용시설을 나온 이후에도 사회에서 배제되고 고립되었다(박해남 2021: 78-80). 지역사회에서 형제복지원의 수용자들이 “양아치, 거지, 쓰레기”로 인식되는 상황에, 시설을 나온 이들이 “일반인들처럼 살고 싶었으나 사회가 나를 받아주지 않”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은 필연이었다(소준철 2021: 191; 한종선 2013: 93)
이러한 상황에서 박해남은 수용자들이 “수용시설 바깥을 염두에 둔 사고와 행동을 상실”한다고 설명한다(2021: 80). 수용시설 안에서는 운이 좋으면 조장이나 소대장처럼 직급을 얻을 수도 있지만, 지역사회에서는 어떻게도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매일같이 죽음을 마주하면서도 단지 그 안에서의 생존을 이어갈 뿐, 시설 바깥의 삶을 상상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형제복지원은 명백히 발전국가 시기 대한민국의 ‘내부 식민지’였고, 따라서 대한민국을 시설사회라고 부를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시설사회라는 식민주의는 대한민국에 뿌리 깊게 박혀 있다.
진압 경찰을 노려보던 그의 충혈된 눈동자 그날 거기서 어떤 변화가 시작됐다
다른 쇠사슬에 얽매인 평등하지 않은 두 남자가 분노 때문에 계급 밖으로 동시에 도약했다
한끝을 짓밟으면 다른 끝이 몇 년 후에 절규하는 무너지는 세계 속의 보이지 않는 인과율이 우리 눈앞에 잠시 폭로됐다
내가 두 번째로 취재한 현장은 코로나19 참사 속에서 ‘탈시설(deinstitutionalization)’이라는 용어조차 피하려는 서울시를 규탄하며, 집단감염이 발생한 송파구 신아재활원 수용자들의 전면 탈시설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이었다(비마이너, 2021.3.4.일자). 서울시청 뒷문에 설치된 해당 기자회견장에서는 탈시설 당사자들이 시설 안의 인권 침해를 증언하며 탈시설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었고, 방패를 든 경찰들은 기자회견장을 둘러싸고 진영을 유지하고 있었다.
기자회견이 진행되던 중, 한쪽에서 갑자기 고성이 오가기 시작했다. 나는 바로 카메라를 들고 해당 현장으로 이동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충돌이 있었던 것인지는 알기가 어려웠다. 시청 지하주차장에서 나오는 길을 막은 활동가들은 경찰들과 대치하고 있었고, 이들이 경찰과 주고받는 말은 기자회견 소리, 그리고 경찰들이 확성기로 송출하는 경고 메시지와 겹쳐서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다만 거기서 반복해서 나오는 이야기는 하나였다. 정확한 문장은 들을 수 없었지만, 의미는 다음과 같았다. ‘장애인들은 수십 년을 갇혀 살았는데 지하주차장 입구를 막는 게 대수냐.’
이는 비단 탈시설 집회에서만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버스를 막고, 지하철을 연착시키는 이동권 집회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는 반복된다. 여기서 생긴 궁금증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인과관계 혹은 정당성의 문제로, 장애인들이 이동권을 보장받지 못했거나 시설에 갇혀야 했다고 해서 현재 비장애인의 교통을 방해하는 것이 필연적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둘째는 그 현장에서 지하주차장을 막는 것의 목적으로, 이미 기자회견장이 확보되어 집회가 수월하게 진행되고 있었음에도, 기자회견 소리가 방해받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지하주차장 입구를 막을 이유가 무엇인지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집회, 시위의 자유만으로도 해당 상황에서 논리적으로 적법성 혹은 정당성을 확보하기에는 충분한데, 활동가들은 그런 수사를 사용하지 않았다. 잘 진행되고 있는 기자회견장 옆에서 뚜렷한 이유 없이 충돌을 만들었다. 얼핏 보기에 오히려 소모적이고, 소위 ‘폭력적인’ 이런 전략은 ‘민주화’가 이루어진 2021년에 어떤 이유에서, 무엇을 위해 채택된 것이었을까?
“아 씨발, 안 놔? 내 거야, 씨발.”
세 번째로 취재한 현장은 2021년 4월 20일 장애인차별철폐의 날을 맞아 세종특별자치시에서 국토교통부, 기획재정부, 보건복지부, 고용노동부에 장애인 인권에 관한 정책들을 논의하자고 요청하는 집회였다(비마이너, 2021.4.20.일자). 그날 세종시에서는 동시다발적으로 집회가 열렸는데, 그중에서도 내가 취재한 곳은 ‘비택’이었다. 이는 “비밀스럽고 갑작스러운 시위, 점거, 농성을 모두 일컬어”⁽¹⁾ 말하는 것으로, 흔히들 말하는 ‘불법 시위’에 속한다. 활동가들은 약속한 때가 되자 바로 앞에 있던 차별버스⁽²⁾ 앞을 막고 도로를 점거하기 시작했다. 사방에 활동가들의 요구안이 적힌 스티커가 붙었고, 같은 내용의 현수막이 펼쳐졌다.
곧 현장에 도착한 경찰들은 활동가들을 멈춰 세우기 시작했고, 현수막을 빼앗으려 했다. 나는 현수막을 두고 몸싸움을 벌이는 현장에 사진을 찍으러 갔다가 상황에 휘말려서 경찰들로부터 현수막을 보호하기 시작했는데, 그때 나와 함께 현수막을 잡아당기던 활동가의 입에서 욕이 나왔다. 내가 집회 현장에서 그를 마주친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평소에 알던 그의 얼굴은 대체로 온화했고, 항상 친절한 웃음으로 나를 맞아주었다. 하지만 그날 그는 경찰과 눈도 똑바로 마주치지 않고 이 말을 뱉었다. “아 씨발, 안 놔? 내 거야, 씨발.”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의 표정에는 처음 보는 살기가 가득했다. 경찰이 아닌 나를 보고 있음에도 바뀌지 않는 그의 눈빛에 나는 순간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멈춰서야 했다.
쇠사슬에 묶인 활동가. Ⓒ 안희제
그런 눈빛, 표정, 욕설은 충돌이 일어나는 모든 현장에 가득했다. 6차선 도로를 점거한 집회에서는 경찰들과 활동가들이 충돌할 공간 또한 많았다. 집회가 진행되는 6시간 정도 동안 군데군데에서 갑작스러운 충돌이 끊이지 않았는데, 그 충돌은 대부분 쇠사슬이나 사다리 같은 사물들을 중심으로 벌어졌다. 충돌 없는 상황이 이어지다가도, 활동가가 보도용 사진을 찍기 위해 쇠사슬을 꺼내면 주로 지시를 내리는 경찰 한두 명이나 공무원에 이어 방패를 든 경찰들이 떼로 몰려들었다. 경찰들은 단 한 번도 경찰이나 일반 시민을 향하지 않은 쇠사슬을 ‘위험하다’라는 이유로 빼앗아갔다. 오히려 그 과정에서 활동가들은 쇠사슬에 걸려서 다치곤 했다. 하지만 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람 몸이 아니라 휠체어 하단부에 쇠사슬을 두르는 것에 경찰들은 반응하지 않았다.
쇠사슬, 무력 충돌, 활동가들의 욕설, 경찰들의 과잉진압은 수시로 아비규환을 불러왔다. 충돌의 양상은 매번 조금씩 달랐지만, 그 중심에는 보통 쇠사슬이나 휠체어가 있었다. 장애인 운동 집회 현장에서 활동가들이 드러내려 하고, 경찰들은 감추려고 하는 쇠사슬의 의미는, 결코 그 순간에 한정되지 않은 것 같은 활동가들의 욕설과 눈빛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내가 이름이 뭐냐고 물어보자 그는 죽은 이들의 이름을 보여주고 그중에 하나를 고르라 했다
내가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그것이 그의 이름이라 했다
같은 목록에서 이제 내 이름을 찾아보라 했다 그날 거기서 어떤 변화가 시작됐다
곽귀병은 형제복지원 안에서 일어난 폭력이 수용자의 신체나 규율과 같은 목적이 아닌 폭력 그 자체를 위한 자기목적적 폭력(autotelic violence)으로 나아간 과정을 분석한다. 형제복지원은 “개인에게 기관에 대한 총체적 헌신(total commitment)을 요구하는” 총체적 기관(total institution)으로, 이곳에서 수용자는 사회적 자아에 심각한 손상을 입는다. 나아가 총체적 기관은 외부의 사회적 규칙에 구속되지 않고, 괴롭힘(bullying violence)을 조장한다. 그러나 기존에 분석된 총체적 기관의 구조와 달리, 형제복지원에서는 관리자와 수용자의 구분이 엄격하지 않았다. 박인근 원장은 수용자 중에서 중대장 1명을 임명하고, 간부들은 또한 수용자 중에서 소대장, 서무, 조장 등을 임명하여 수용자들을 관리했고, 이렇게 임명된 관리자들은 언제든 간부의 뜻에 따라 다시 일반 수용자가 될 수도 있었다. 즉, 관리자와 수용자 사이에 “상층이동과 하층이동이 가능”했다(곽귀병 2021: 198-204).
한종선은 관리자들이 이곳의 관리자들이 “일반 소대원들이 얼마나 고통과 두려움에 떨면서 생활하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일반 수용자라는 원래의 위치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서 상부의 명령을 지키고 따랐다고 밝힌다(한종선 2013: 35). 탈출 시도 경력이 있는 수용자는 원칙적으로 간부가 될 수 없었다는 점 또한 형제복지원 내부의 폭력에 순종하는 사람을 골라내기 위한 지침이었다. 탈출이 성공할 경우 수용자의 수가 줄어들어 국가보조금 또한 감소하고, ‘부랑자’가 거리에서 포착되기에 형제복지원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음이 드러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곽귀병 2021: 215). 따라서 탈출 시도는 형제복지원에서 가장 심각한 규율 위반이었고, 이 점에서 형제복지원의 관리자들은 탈출 시도 경력이 없고, 다른 사람의 탈출 시도 또한 막는 존재여야 했다. 탈출 시도에 실패하면 사망으로도 이어질 수 있는 물리적 폭력에 마주해야 했으므로, 인종주의와 같은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작동하는 기존의 총체적 기관들의 관리자와 달리, 형제복지원에서는 자신이 얻어맞거나 죽을 공포에서 관리자가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탈출 시도와 관련한 경우가 아니더라도 형제복지원에서는 자주 수용자의 사망으로 이어지는 강도 높은 물리적 폭력이 일상적으로 발생했다. 형제복지원은 “군대와 똑같다”라는 말이 나올 만큼 “철저하게 군대와도 같은 상명하복 체계였다.” 관리 체계에서만이 아니라 ‘군기(軍氣)’를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온갖 폭력이 자행되고, 하루도 안 빠지고 군가를 불러야 했으며, 군대식 제식 교육이 이루어지기까지 했다. 게다가 “명치에 잘못 맞아 숨이 끊어지더라도 우선 때릴 때는 무조건 맞아야만 한다”라는 말에서도 단적으로 드러나듯, 수용자들에게 죽을 수 있다는 공포는 일상적이었고, 실제로 수많은 이들이 수용소 안에서 가혹 행위로 인해 사망하거나 탈출을 기도하다 목숨을 잃었다. 단지 관리자가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로 얻어맞고, 이유 없이 ‘빳따 치는’ 일상에서 언제나 수용자들은 자신 혹은 옆 사람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어야 했다(한종선 2013: 36, 41, 44, 50, 206; 유해정 2018: 400).
수용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살려주세요!”, (어떤 행동이 문제가 되었는지도 모르지만)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르지만 습관적으로 연발하는) “잘못했습니다!”와 같은 말들, 그리고 때로는 “제가 대신 맞겠습니다!”와 같은 말들은 폭력이 멈추리라는 어떠한 확신도 없지만 멈춰달라는 말을 하지 않을 수는 없는 순간에, “맞고 있는 이보다 그것을 지켜보면서 더 떨어야 하는 공포감”에 터져 나왔다. 눈앞의 폭력이 “이미 남의 일일 수 없”으며, 자신 혹은 타인의 죽음이 목전에 닥쳤을 때, 죽은 혹은 죽어가는 자의 “곁에 있는 사람의 얼굴”에서 나오는 그런 말들은 형제복지원 안의 “매일매일이 그렇게 끔찍한 전쟁터”였음을 암시한다(한종선 2013: 40, 48-58; 도미야마 2002: 11).
도미야마 이치로는 ‘일본인’이 되는 과정을 “일상생활과 전장 동원이 하나로 연출되어 나가는 과정”으로 파악했다. 그는 ‘일본인’이라는 정체성의 형성 과정에서 ‘오키나와인’이라는 타자성이 발견 혹은 발명되고, 그것이 자신에게 더는 ‘침투’하지 못하도록 하는 신체적 실천이 사람들의 일상에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여기서 ‘일본인’이 되는 과정의 핵심은 전장을 일상화하여 모든 이를“죽을 것을 뻔히 알고 있는 상황 속으로” 동원하는 ‘전장 동원’이다(2002: 30-35).
형제복지원의 폭력으로 사람들의 몸은 실제로 바뀐다. 폭력은 너무도 일상화된 나머지 수용자들의 놀이 안에까지 스며든다. 형제복지원에서 하루에 30~60분 정도 주어지는 자유시간에 하는 놀이 중에 ‘기마전’은 서로 다른 소대끼리 육탄전을 벌이는 것으로, “놀이가 끝나고 나면 발을 잡고 있는 아이는 코뼈가 부러졌거나 이빨이 나가 있다. 나머지 아이들도 피떡이 되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한종선 2013: 40) 매일 죽기 직전의 상태로 가거나, 다른 이들이 죽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정신질환과 신체장애를 겪고, 수용소에 들어오기 이전과는 다른 존재가 되어 간다.
그런데 사람들이 ‘오키나와인’이라는 자기 안의 타자성을 발견하고 그것을 애써 거부하려 노력함으로써 ‘일본인’에 다다르려 한 오키나와에서의 ‘생활개선’과는 달리, 대한민국에서 외쳐진 ‘습속개선’이나 ‘사회정화’와 같은 구호들에서는 자아와 타자의 관계가 훨씬 명확했다. 방언, 출신 지역과 같은 비교적 구체적인 기준이 있던 ‘일본인’ 만들기의 과정보다 모호한 규정으로 가득한 ‘부랑인’ 만들기가 결과적으로 더 명확했던 이유는 모호한 존재들까지도 수용소로 모두 끌려가서 실제로 ‘부랑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즉, 죽음으로의 동원이 일상화된 형제복지원에서 일상이 전장이 되어버린 수용자들은 ‘국민’이 되어가기 위해 동원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철저히 비(非)국민, 즉 ‘국민이 아닌 존재’가 되기 위해 동원된 것이다.
‘습속개선’이나 ‘사회정화’라는 정치위생학은 ‘국민’의 신체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이었고, ‘생활개선’은 ‘일본인’의 신체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이었다는 점에서 둘은 유사해 보인다. 그러나 생활개선이라는 단속과 감시가 오키나와의 일상에서 자기 안의 타자성에 대한 자기부정을 불러왔다면, 대한민국의 정치위생학은 형제복지원을 물리적으로 분리하고 수용자들에게 끊임없이 자신이 ‘쓰레기’임을 주입했다. 그들은 국민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국민이 확실히 아닌 존재가 되기 위해 그곳에 끌려간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존재 이유는 오직 국가의 비용 최소화와 사회복지시설의 이윤이었다. 즉, 그들은 형제복지원에서 ‘구제 불능이기 때문에 유의미한’ 존재일 수 있었다.
도미야마는 “생활개선은 노동의 문제”라고 강조하며,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신용’이라는 관계 바깥에 놓인, “자본을 위해서는 결코 힘이 되어주지 않는 존재”인 부랑자, 범죄자, 매춘부와 같은 ‘룸펜 프롤레타리아트’를 언급하며 이들에게서 정치적 가능성을 찾는다(2015: 228-229). 그러나 형제복지원의 사례에서 부랑자들, 범죄자들은 오히려 대한민국과 사회복지시설이 자본을 확보하는 가장 초기 단계에 동원되어 오로지 자본만을 위한 도구가 되었다. 이들은 줄어들어도 곧 다시 채워질 ‘머릿수’에 불과했다. 이들이 만든 제품은 품질이 떨어지더라도 국가와의 공모 안에서 어떻게든 공기관에 팔렸고, 중요한 것은 이들을 사회로부터 철저히 감추고 시설 바깥을 상상하지 못하도록 하여 수익사업의 전제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곽귀병은 형제복지원 내부의 폭력이 비효율적이고, 그 목적이 오로지 집단적 수용 질서의 유지와 수용자들의 통제라는 이유에서 형제복지원 안의 폭력을 자기목적적 폭력으로 분류했다. “저항을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만드는 효과”를 불러온 그런 폭력이 노동이나 생산물의 질이라는 측면에서 비효율적이라는 것이다(곽귀병 2021: 206-210, 215). 하지만 이는 수용자들의 노동이나 그들이 생산한 상품이 아니라, 수용자의 ‘수’와 ‘구제 불능의 부랑자’라는 ‘상태’를 매개로 하는 국가와 시설 사이의 공모, 그 안에서 거래되는 ‘감세’, ‘치안’과 같은 것들이 자본 축적을 위한 핵심임을 간과하는 주장이다.
생산물 자체보다 중요한 것이 세제 혜택이었고, 생산된 것은 공기관에 어차피 우선 거래되므로 ‘아무렴 상관없는’ 것은 오히려 상품의 질이었으며, 극도로 폭력적인 노동 과정은 합목적적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폭력은 시설이 다양한 수익사업을 벌이고, 국가가 사회 통제 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한 토대를 닦는 ‘시초축적’이라는 목표에 정확히 들어맞는 ‘도구적 폭력(locative violence)’이었다. 실비아 페데리치가 시초축적의 도구로써 여성의 신체가 겪은 역사를 설명한 문장을 지금 맥락에 맞게 바꾸자면, ‘부랑자의 신체는 국가와 시설에 의해 전유되고, 비용의 최소화와 자본의 축적을 위한 수단으로 기능하도록 강제된다.’ 페데리치는 나아가 “생명이 이윤생산에 종속된 시스템에서 노동력의 축적은 극단적인 폭력을 통해서만 성취할 수 있”다고 말하는데, 여기서 ‘노동력’이 결국 자본의 축적을 위한 조건임을 생각한다면 형제복지원 수용자들의 노동과 죽음, 비(非)국민화가 극단적인 폭력을 통해 성취된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합리적인’ 과정의 결과물일 수 있다. 페데리치가 마리아 미즈의 표현을 빌려 썼듯, 여기서 “폭력 그 자체는 가장 생산적인 힘”이 되는 것이다(페데리치 2011: 37-39).
요컨대, 수용자들은 인간이 아닌 존재, 오로지 자본을 실어나르는 시초축적의 요소인 ‘머릿수’와 사회복지법인의 ‘공익’이라는 허울로만 환원되기 위해 군대식 체계 안에서 죽음으로 동원되었고, 이는 그들이 국민이 되는 과정이 아니라 정반대로 국민 아닌 존재가 되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시설 안에서의 폭력은 지금까지도 끝나지 않았다. 한두 개의 대표적인 사례를 들기 어려울 만큼 수없이 보도되는 장애인 시설 내의 인권 침해 사건들은 형제복지원에서 드러나는 국가와 사회복지법인의 공모 관계에 근거한 것이다. 장애인은 시설이 국가의 보조금을 받을 수 있는 근거로서의 ‘머릿수’로 환원되고, 폭력에 익숙해져 시설 바깥을 상상하지 못하게 되며, 나아가 실제로 자립할 수 없는 신체로 변해 간다. “끊임없이 터져나오는 시설의 문제를 볼 때, 과거와 현재는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소준철 2021: 194)라는 문장은 과장이 아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등 탈시설, 생존권·이동권 문제를 주로 다루는 진보적 장애인 운동 단체의 활동가들은 그러한 시설들에 맞서 싸운 투쟁과 죽음의 역사를 기억한다. 형제복지원 안에서 벌어진 말 그대로 ‘전쟁과도 같은’ 폭력과 비국민화, 비인간화는 지금도 적지 않은 장애인 시설들에서 반복되고 있고, 피해생존자들이 겪은 폭력의 이야기는 그것을 듣는 활동가들의 근육에 쌓인다. 혹은 피해생존자가 직접 활동가가 되기도 한다. 형제복지원이라는 시설에서 “밑에서 위로 치켜뜬” “짐승과도 같은 눈”(한종선 2013: 94)과 욕설이 피해생존자의 근육에 새겨져 버린 것처럼, 탈시설 당사자들은 한동안 스스로 ‘왜?’를 묻지 못하는 무기력과 싸우기도 하고, 집회 현장에서 온 근육을 다해서 시설 안의 폭력을 고발하기도 한다. 형제복지원과 같은 시설들의 폭력은 ‘탈시설’ 의제에 결합하면서, 폭력의 역사로서 활동가들의 근육에 쌓인다.
1990년대부터 점화된 탈시설 운동과 생존권·이동권 투쟁의 적지 않은 수는 소위 ‘불법 집회’나 ‘폭력 시위’의 형태였고, 활동가들은 당시에 죽은 이들을 ‘열사’로 기억하며 그 죽음을 근육에 새기고 살아간다. 영세 장애인의 투쟁 과정에서 사망한 최정환과 이덕인을 장애인 운동에서는 ‘열사’라고 부른다. 서초구청 단속반에게 폭행을 당해서 중상을 입은 경험이 있는 최정환 열사는 1995년 3월, 빼앗긴 물품을 되찾으러 구청에 갔다가 모욕을 당하고 분신했다. 3월 21일에 그가 숨지자 활동가들은 연세대학교 노천극장에서 장례를 치르려 했지만, 경찰이 대규모 장례를 불허하며 영안실을 봉쇄했을 뿐 아니라 열사의 시신마저 빼앗았다. 1995년 6월부터 노점을 시작한 이덕인 열사는 11월 24일에 공권력과 용역 회사 직원 1500여 명이 동원된 노점상 철거에 맞서 망루에 올라가 농성을 벌였다. 이후 실종된 그는 상의와 신발이 벗겨지고, 손목과 팔이 함께 뒤로 묶인 채, 온몸에 상처와 피멍이 가득한 상태로 4일 뒤에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다음 날 새벽에 1,000여 명이 넘는 경찰이 병원에 난입하여 시신을 탈취하였고, 국립과학수사연구소로 옮겨진 시신은 1시간 만에 부검할 수 없을 만큼 훼손된 채 돌아왔다. 위 두 사건 이후 활동가들과 경찰들 사이에는 격렬한 충돌이 발생했다(김도현 2007: 78-82).
2002년에는 발산역에서 장애인 리프트 사고로 장애인이 사망했고, 이에 활동가들은 이동권 투쟁을 이어갔다. 그들은 국가인권위원장실을 점거하고 단식 농성을 벌였는데, 당시 노들 장애인 야학의 교장으로서 투쟁에 참여한 박경석은 단식으로 쓰러져 가는 동지들을 보며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라고 쓴다. 단식 농성 31일째 되던 날에 활동가들은 시청역 철로를 점거했는데, 경찰은 전기 충격기 등을 활용하여 집회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이때까지도 국가인권위원회에서는 장애인 이동권에 호의적이지 않았고, 위원회의 입장이 바뀐 이후에도 서울시는 사고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박경석 2013: 118-122). 이처럼 생존권, 이동권 투쟁 과정에서 활동가들이 마주한 것은 장애인 동지들의 죽음, 이에 대한 공권력의 무관심과 폭력이었다.
현재 장애인 운동 집회에 참여하는 이들은 1990년대 중후반 혹은 2000년대부터 활동을 시작하여 그 역사를 직접 겪은 이들, 그리고 그들과 함께하며 직접 겪지 않은 기억을 체화한 활동가들이다. 현장에서 활동가들이 보이는 반응, 욕설이나 물리적 충돌과 같은 소위 ‘폭력’은 그러한 역사에 기인한다. 거리에서의 투쟁, 거기서 겪은 공권력에 의한 폭력이 생생한 사진기록과 활동가들의 직접 경험으로 남아있다면, 직접 겪지 않은 시설 안에서의 폭력의 역사는 그런 경험들과 결부되어 근육에 각인된다. 목격자 혹은 ‘곁’이라는 위치에서 그러한 경험들이 나의 것이 된다. 여기에 현재 진행형인 시설과 공권력의 폭력, 시민들의 무관심과 비난이 쌓인다.
박경석은 “지하철 연착 투쟁이라는 불법(?) 행위”의 이면에는 장애인들에게 가해진 사회의 차별이 담겨 있고, 이 연착 투쟁은 장애인들이 대중교통을 이용하다가도 “떨어져 다치고 죽어야만 하는 현실에 대한 분노와 저항”이라고 말한다(2013: 114-115). 장애인 운동은 그런 이름들에서 길어 올려진다. 빛나는 경제 성장과 도시화, 국제 관계의 발전과 첨단 문명이라는 ‘현재’에도 여전히 시설과 같은 ‘과거’에서 살아가고 죽어가는, 죽은 사람들의 이름들 말이다. 교과서나 박물관 같은 승리자들의 역사에 기록된 열사들이 민주화 운동의 빛나는 성과로서의 민주주의를 그려내는 장치로 작동한다면, 장애인 운동이 ‘열사’를 기억하는 이유는 여전히 유효한, 그들이 죽음으로 부탁한 “복수”를 잊지 않기 위함이다.
2021년 4월 20일 밤, 취재를 끝내고 기자들과 함께 탄 택시에서 택시 기사는 자신이 80년대 학번으로 서울에서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다고 말하며 장애인차별철폐투쟁의 날 집회가 ‘설득력이 없다’고 말했다. 화염병과 같은 ‘폭력’의 정당성은 독재정권에 근거했던 것이지, ‘지금처럼 민주화된’ 세상에서는 다른 투쟁이 필요하다고. 아니, 그렇지 않다. “이 시대가 목숨을 걸고 싸울 필요가 없는 평온한 시대라는 환상”은 우리에게 “지나온 모든 시대는 ‘비상사태’였고, 이대로 역사가 흘러간다면 앞으로도 그러할 것임을 은폐”하고(비마이너, 2019.9.26.일자), 나아가 독재와 민주라는 이분법으로 대한민국의 역사를 환원함으로써 시설사회라는 현재 진행형의 역사를 은폐한다.
불을 꺼뜨리는 물이 있다면 물을 증발시키는 불도 있다 무너지는 세계 속에서 뭔가 시작하려는 역설, 진동, 이끌림, 자기장의 형성
내가 군중 앞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평범한 말들에 불을 붙이듯이 내 이름이 아주 길어지거나 아예 사라지듯이 내가 동지라는 어색한 명칭으로 불리듯이
그날 거기서 어떤 변화가 시작됐다
서울시청에서의 탈시설 집회가 완전히 끝나기 전에 나는 두 번째 취재를 마쳤다. 내가 자리를 뜬 이후에 경찰들과 더욱 거센 충돌이 있었고, 어떤 집회 참가자들은 다치기도 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나는 당일의 현장을 글로 남겼고, 다른 기자들은 이를 다듬어서 기자 칼럼으로 실어도 좋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다듬어서 온 글에 대해 기자들은 ‘현장을 제대로 담지 못한 것 같다’라는 의견을 남겼다. 조금 더 정확히는, 현장이 너무 건조하거나 혹은 낭만적으로 그려졌다는 의견이었다. 그 글은 결국 실리지 않았고, 나는 의견을 수용했으나 글을 더 수정하지는 못했다. 정확히 어떻게 글을 고쳐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 번째 취재였던 4월 20일 장애인차별철폐의 날, 그날 나의 글에 집회의 본질인 근육의 문제가 부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두 번째 취재에서 쓴 글은 철저히 관찰자의 시선을 담고 있었다. 실제로 나는 그때 혼자서 튀는 은색 패딩을 입고, 기자회견 내용을 받아적기보다 현장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필드노트에 기술하는 데에 집중하고 있었다. 경찰과 활동가 사이에 충돌이 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충돌 상황에서 떨어져 나와 상황을 관찰했다. 집회 참가자들도 내가 어디서 온 사람인지 알지 못해서 다소 경계를 하는 눈빛이었다. 취재를 마치고 어두운 시청 뒷문에서 나오자 조용하고 밝은 거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한 그 평화가, 고작 30m 정도 떨어진 거리와 기자회견장 사이의 차이가 너무도 기이하고 모순적으로 느껴졌다.
“야, 안 놔? 놓으라고! 경찰들 때문에 다치는 거 아냐 지금! 경찰들이 먼저 놓으라고 씨발.”
세 번째 취재를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나는 여전히 두 번째 취재 때와 비슷했다. 하지만 점거된 도로를 뛰어다니며 사진을 찍고 현장을 눈에 담으면서 조금씩 내 몸이 집회 현장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평소에 바닥에 잘 앉지 않는 나는 무지개 색깔로 한 외국 유명 밴드의 마크가 그려진 검은색 티셔츠를 입고 다급한 표정으로 사방을 뛰어다니며 무릎을 꿇거나 아스팔트에 엎드려 사진을 찍고 있었고, 급기야는 어느샌가 카메라를 놓고 쇠사슬을 쥐고 있었다. 경찰들과 활동가들의 충돌을 영상으로 담던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한 남성 경찰과 눈을 똑바로 마주하고 고성으로 욕설을 주고받고 있었다. 바로 10분 전쯤 현수막을 두고 대치할 때 나를 당황시킨 활동가의 욕설과 표정이 내 얼굴에서 나오고 있었다.
경찰들이 쇠사슬을 빼앗으려 힘껏 잡아당기는 과정에서 쇠사슬에 말려 들어간 내 왼쪽 새끼손가락은 그 순간 나에게 고통보다 정당성이나 무기로 느껴졌다. 손가락에 쌓이는 폭력은 나의 욕설과 표정의 근거가 되었다. 아프다고 지르는 비명, 대치 상황에서 경찰에게 붙들려 나온 뒤에도 여전히 떨리는 온몸의 근육은 나에게 온갖 기억들을 불러일으켰다. 2015년 4월 18일에 광화문에서 세월호 유가족을 향해 직사(直射)되던 물대포, 유가족들이 마실 물조차 전달하지 못하게 하던 시커먼 방패의 경찰들, 같은 해 5월 1일에 모든 퇴로가 막힌 안국역 삼거리에서 우리 쪽에 쏟아진 허여멀건하고 칼칼한 물대포와 내 친구를 에워싸고 끌고 가려던 경찰들.
2015년 5월 1일 노동절의 안국역 Ⓒ 안희제
떨리는 근육이 조금씩 진정되면서, 내가 직접 겪지 않은 장면들이 하나씩 빠르게 머리를 스치기 시작했다. 두 번째 취재 날에 농성 텐트를 설치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무력 충돌에 대해 전해 들은 것, 박종필 감독의 다큐멘터리 <버스를 타자>에 나온 대중교통 점거 투쟁 장면, 신아재활원 앞에서 쇠사슬을 두르고 철 사다리에 목을 끼운 활동가들의 모습, 광화문역을 수없이 지나치며 본 ‘부양의무제·장애등급제 폐지’ 농성장, 그곳에 줄지어 놓여있던 영정사진들이 머릿속에서 포개어졌다. 근육의 떨림이 가라앉는 것은 분노가 진정되는 과정이 아니었다. 다만 여전히 눈앞에서 쇠사슬을 두고 대치하고 있는 아비규환, 아마 이 상황이 진정되고서도 반복될 충돌을 예비하는 과정이었다.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친 장면들은 옳고 그름의 틀로 ‘파악’되지 않았다. 그것은 오히려 그 자체로 “씨발놈들.”과 같은 중얼거림과 얼얼한 얼굴 근육, 새끼손가락의 통증과 비슷한 종류의 것이었다. 어떤 기억들과 역사들은 머리를 잠시 스쳐 곧장 근육에 쌓인다.
활동가들이 보건복지부, 기획재정부, 고용노동부, 국토교통부에 무엇을 요구하는지 자체는 이미 핵심이 아니었다. 문제는 빠르게 뛰는 심장과 통제할 수 없는 근육이었다. 촛불시위나 퀴어퍼레이드에서 오랫동안 구호를 외치기 위해 나는 중저음으로 목소리를 통제하곤 했지만, 이런 충돌의 장면에서 그런 통제는 불가능했다. 치켜뜨는 눈과 입꼬리가 일그러진 채 벌어지는 입, 통제를 벗어난 목에서 나오는 건 주장도, 말조차도 아니었다. 그것은 폭력이었다. 당장 쇠사슬을 빼앗으려는 경찰을 눈앞에서 치워버리고 싶다는, 기회만 되면 그의 방패를 빼앗아 내동댕이치고 싶다는 폭력이었다.
점거된 도로를 뛰어다니며 사진과 동영상을 찍고 경찰들과 대치하는 사람은 많았다. 충돌이 잠시 멈췄을 때 나는 가방을 내려 둔 버스정류장으로 가서 바닥에 철퍼덕 앉았다. 그때 한 활동가가 나에게 물을 건넸다. 장애인 운동 집회 현장에 몇 번 간 적도 없고, 내가 입은 옷은 평범한 티셔츠였는데도 그는 나를 알아봤다. 곧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몰아쉬는 숨과 진정되지 않은 눈 근육, 아무렇게나 풀어져 버린 몸의 자세가 ‘동지’의 징표였다. 집회는 근육의 문제였다.
표정을 갖는다는 것은 감정이 아니라 근육의 문제였다 자살과 살인, 죽음, 삶, 죽음의 죽음, 삶의 삶…… 그 모든 것이 근육의 문제였다 근육 안에 흐르는 전기의 세기와 방향 그것들이 문제였다
그 전기는 아주 오래전 우리가 모르는 구름에서 탄생했다
장애인 운동 집회 현장에서 마주한 활동가들의 살기 어린 표정은 욕설과 분노, 격하게 움직이는 팔뚝처럼 근육의 문제였다. 구청에서 자신의 몸에 직접 불을 지른 사람, 도시의 턱들을 없애서 휠체어가 다니게 해 달라는 유서를 쓰고 가족을 남겨둔 채 독극물을 마신 사람, 그 죽음들을 딛고 살아가는 이들과 죽음에 대한 공권력의 외면, 이 모든 것이 근육의 문제였다.
승리한 사람들이 적은 ‘민주화의 역사’가 담지 않으려 한 죽음과 삶들은 죽은 이들의 이름들 안에서 자신의 이름을 찾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근육에 적히고 쌓이고 있었다. “한국의 진보세력에게 미학적인 쾌락을 제공하기에 ‘부족’했던”, “헐벗고 남루하고 억울할지언정” ‘열사’의 미학이 없는⁽³⁾ 이들이 남긴 유언장을 받아 근육에 간직하며 복수(復讎)를 꾀하는, ‘역사’ 바깥에서 죽은 이들을 ‘열사’로 호출해내는 사람들은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의 폭력에 분노하고 있었다. 내 통제 바깥에서 나의 근육을 움직이는 그 전기는 아주 오래전, 우리가 결코 있는 그대로 닿을 수 없는 폭력에서 탄생한 것이다.
시설사회는 부랑인, 장애인과 같은 특정한 범주로 사람들을 묶어서 수용함으로써 이들을 격리하였고, 이들이 지역사회로 돌아갈 수 없게 만들었다. 장애인 운동 집회의 쇠사슬은 이들이 겪었고, 지금도 겪고 있는 폭력을 보여주는 동시에, 더는 그것을 남의 명령으로 쓰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받아 온 폭력을 스스로 드러냄으로써 이들은 위험한 존재가 되고, 폭력을 주도하려는 활동가들에게 경찰들은 폭력으로 응수한다. 이는 현장의 폭력 혹은 폭력의 주도권을 선취하려는 경쟁, 즉 근육의 문제였다. 그리하여 근육 안에 쌓인 폭력을 전기로 흘려보내 쇠사슬을 통해 바깥으로 전도(傳導)시키려는 장면이었다. 서울시청 뒷문의 지하주차장 입구에서 뚜렷한 이유 없이 갑자기 발생한 충돌도, 세종특별시에서 수없이 벌어진 충돌도 마찬가지였다.
‘비택’, 불법집회는 시설사회가 대비하지 못한 폭력을 흘려보내는 일이었다. 더는 시설화되지 않겠다는 의지를 시설사회의 언어로 천명해내는 포스트콜로니얼의 실천이었다. 전장 동원으로 일상과 전장을 구분할 수 없게 되어 일상을 빼앗겼던 이들은 이제 자신의 바깥으로 향하는 근육으로 자기 일상 안에 직접 ‘투쟁’이라는 이름으로 폭력을 배치한다. 투쟁은 일상이고 삶이 되었다. 우리는 조금 전까지 경찰들에게 죽일 듯이 소리를 지르다가도, ‘내 나이가 어때서’를 부르는 한 장애인 활동가의 무대에 손뼉 치고 웃으며 춤을 추고, 점거한 도로에 앉아 떠들며 도시락을 먹는다. ‘국민’이 되고자 노력할 기회조차도 주어지지 않은 채 국가와 시설의 시초축적에 소비된 사람들은 자신을 마지막으로 바라본 죽은 이들의 눈을 기억한다. 그 망막에 마지막으로 맺힌 사람의 망막에는 또 다른 누군가가 새겨진다. “망막에 각인된 그 영상은 나의 얼굴이자 당신의 얼굴일 것이다.”(도미야마 2002: 13) 우린 죽은 이들의 이름들 안에서 자신을 발견한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언제 평상복 차림으로 만날 수 있을까요?
쾌활한 표정을 하고 마지막으로 악수를 나눌 때 순간 두 개의 쇠사슬이 부딪쳐 찌릿, 정전기가 흘렀지만
우리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 심보선, ‘근육의 문제’
[사진 설명] 2021년 4월 20일 장애인차별철폐의 날, 세종특별자치시에서 6차선 도로를 예고 없이 점거한 활동가들을 경찰들은 협박과 무력으로 진압하려 했다. 위 사진은 한 비장애인 활동가 A가 경찰들에게 둘러싸인 장면을 담고 있다. 그의 뒤에는 경찰 인파가, 옆에는 카메라를 들고 채증(採證)을 하는 공무원이, 앞에는 경찰의 행렬에 대항하여 A가 버틸 수 있도록 그의 곁을 지키는 활동가들이 보인다. 이 장면의 배경에는 패스트푸드 식당, 한의원, 학원, 카페가 가득 들어찬 지극히 평범한 상가 건물과 새로 지어진 네모반듯한 아파트가 있고, 교통이 멈춘 공간에서 일반 시민들은 상황을 구경한다. 바로 옆에 선 활동가를 바라보는 A의 웃음. 그 활동가가 입은 평범한 티셔츠에 적힌 문구는 다음과 같다. “투쟁 없는 삶으로 돌아가지 않겠다.” Ⓒ 안희제
⁽¹⁾ 조아라, <장판과 함께하기: 장판 신입활동가를 위한 단어장>, 2021. 03. 31. (미간행).
⁽²⁾ 장애계에서 세종시와 대전시를 잇는 B1 버스를 부르는 명칭. 저상버스인 B1 버스는 한 대도 없다.
⁽³⁾ 안영춘, “발문 : 소년은 그들과 이어진 벼리이다”, 한종선·전규찬·박래군, 2013, 『살아남은 아이』, 서울: 이리,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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