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솔직한 글이다. 이게 책을 덮은 뒤 처음 든 생각이었다. 그리고 곧, 정작 버마인들에 대한 이야기는 섬세하게 다루어지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 소설의 근간이 된 조지 오웰의 경험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당연하다. 그는 딱 자신의 몸만큼 썼고, 그래서 솔직했으며, 그래서 이야기가 술술 풀렸다. 그는 제국의 남성이라 인종주의적, 성차별적 사고방식을 자연스럽게 체화했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제국주의에 비판적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 두 가지만을 섬세하게 그릴 수 있었다. 제국주의에 비판적인 백인 남성 플로리, 인종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버마인 남성 베라스와미와 우 포 킨의 비중이 가장 높고, 반드시 남자와 결혼을 해야만 하는 백인 여성 엘리자베스, 그리고 플로리의 정부였던 버마인 여성 마 흘라 메이는 모두 보조적이거나 누군가에게 종속적인 인물로만 그려졌다. 그들의 행동과 심리는 다른 남성들에 의해 결정되곤 했고, 반드시 어떤 남자에게 속해야만 하는 사람이었다. 이는 당시의 시대상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것일지도 모른다. 특히 의사와 판사, 두 ‘사짜 직업’ 빼고는 자세히 다뤄진 버마인 남성도 없었다. 다음으로 많이 등장한 코 슬라는 충성심이 썩 괜찮고 유능한 하인일 뿐이었고.
그러나 줄거리나 인물보다도 인상적인 건 글 전체에서 느껴지는 날씨다. 조지 오웰은 버마에 있을 때 그 날씨에 적응하지 못하고, 매일 날씨를 불평했을 것이다. 플로리는 분명 그 짜증을 바탕으로 만든 인물이다. 반제국주의적 태도도 물론 그렇지만, 10년을 지내도 익숙해지지 못한 날씨에 대한 분노와 짜증이 더욱 핵심적인 것 같다. 버마의 날씨가 내 피부에 직접 느껴지는 것만 같은 이 섬세한 묘사는 조지 오웰 그 자신의 고통과 짜증에서 왔으리라 확신한다. 특히 습기. 가장 두드러지는 건 습기였다. 인물들의 관계도, 그 모든 엉망진창도, 더러운 술수와 저항도, 위스키에 거나하게 취한 플로리의 땀도, 바닥에 흩뿌려진 그와 강아지의 피도, 그 모든 게 소설에 묘사된 버마의 날씨처럼 축축하고 끈적거렸다. 그 후덥지근하고 축축한 날씨에 영국인들은 적응하지 못했다. 백인은 자신의 다른 지위나 상태에 무관하게 버마에서 존재만으로도 압도적인 힘을 지니지만, 그곳에서 모든 삶의 의미를 잃고 만다. 해야 하는 일도 대충 하고, 인부들 관리조차 귀찮아진다. 입맛도 없어서 하인이 차려 온 “멋진 식사”도 거절하는 게 일상이다. 그저 술이나 마시고 뻗어서 자고 싶다. 플로리의 이런 모습은 마치 작년 여름의 나와 같았다.
이 소설에는 버마인이 일을 대충 하거나 도망가는 모습들이 묘사되어 있다. 영국인들이 와서 버마인들에게 강압적으로 노동을 시키지만, 버마인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 이를테면 마약을 얻지 못하면 도망친다. 이는 농업 국가의 착취에 저항하여 도망가서 지낸 조미아의 사람들을 떠오르게 한다. 이는 도망쳐도 먹을 것을 찾을 수 있고, 도망 다녀도 생존할 수 있는 토양과 기후 덕분이다. 소설 속에서 버마인들이 날씨에 대해 불평하는 내용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는데, 이는 그들이 그 날씨에 적응해서, 즉 자연에 순응하여 살아가기 때문이다. 특히 노를 젓는 노인이 기억에 남는다. 그는 자연에 순응해서, 자연에 어울려 산 몸을 갖고 있다. 나이 들고 말랐지만 탄탄하게 근육이 잡혀 있는 건강한 몸. 그러나 자연의 질서에 몸을 맡기지 못한 플로리의 몸은 추하게 묘사된다. 그리고 그의 몸에서 가장 추한 건 모반이다. 모반은 그를 죽음으로까지 몰고 갔다. 물론, 날씨에 적응하지 못해서 그가 죽음에 이르렀다고 단순하게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가 무너져 내린 과정을 날씨 빼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그는 평판이 완전히 부서지고 그로 인해 마지막 희망을 상실하여 자살했다. 우 포 킨이 그의 평판을 부수기 위해 이용한 건 그의 정부였던 버마 여성 마 흘라 메이다. 그리고 마지막 희망은 자신보다 한참 어린 백인 여성 엘리자베스와의 결혼이었다. 만약 그가 마 흘라 메이를 만나고, 그녀를 그렇게 함부로 대하지 않았더라면 그의 평판은 이렇게 부서졌을까? 사실 그가 버마에서의 일상을 견디기 위해 그런 식으로 행동하지만 않았더라도, 엘리자베스와의 결혼이라는 목표를 이루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악랄한 ‘악어’ 우 포 킨은 또 다른 방법을 찾아내서 그를 끈질기게 물고늘어졌겠지만, 마 흘라 메이를 동원하는 것보다는 어려웠을 것이다.
애초에 플로리는 왜 정부를 들였을까? 그가 직접 이야기했듯, 이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함이었다. 완전히 새롭고 낯선, 땀이 끊이지 않는 버마에서 그의 외로움을 달래 주는 것들은 “책, 꽃밭, 술, 일, 매춘부, 사냥, 의사와의 대화”(373)였다. 그러나 함께 지적인 이야기를 나눌 상대라곤 인종차별을 깊이 내면화한 버마인 베라스와미뿐이었기에, 입맛도 없을 만큼 후덥지근한 그곳에서 그가 일상을 견디는 데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 건 술과 매춘부였다. 그래서 그는 마 흘라 메이를 정부로 들이게 되었고, 그녀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녀의 젊음을 빼앗고 내다 버렸다. 바로 ‘마지막 희망’인 엘리자베스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를 만난 후로 그는 마 흘라 메이가 뿌리던 버마 향수 냄새만 맡아도 질색을 한다(물론 마 흘라 메이가 바람피운 사실을 알게 된 것도 영향은 있었지만 엘리자베스가 아니었다면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곰곰이 소설 내용을 돌이켜보면 그는 꽃도 보는 걸 좋아할 뿐 꽃의 냄새를 맡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버마의 풀냄새와 향수 냄새를 모두 증오한다. 그는 마 흘라 메이의 향수 냄새에는 질색하고, 버마의 풀냄새에서 외로움을 맡는다. 반제국주의 사상을 갖고 있었다고는 해도 그는 어디까지나 비당사자로서 버마인들에게 연민 정도의 시혜적인 감정을 품었을 뿐이다. 물론 그는 반란을 진압할 때 버마인들에게 총알이 향하지 않도록 노력하고, 백인들의 클럽 안에서도 다른 이들과 말다툼을 해 가면서 버마인들의 편에 서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런 플로리도 10년의 버마 시절 동안 버마인-되기에 실패했다. 그것도 가장 쉽게 익숙해진다는 후각에서조차 말이다.
동남아시아에서 냄새 혹은 향은 조금 특별한 위치에 있다. 향료는 동남아시아의 특산품이었으며, 차와 음식에서도 특유의 냄새가 났다. 바로 그 냄새 때문에 엘리자베스는 플로리가 데려간 찻집에서 차를 거절하기도 했다. 플로리는 차와 음식의 향에는 거부감을 별로 보이지 않았는데, 이는 그곳에서 생존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음식과 차를 마시지 않고 살 수는 없으니까. 그러나 마 흘라 메이를 만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들자, 그녀의 향수 냄새에 그는 곧장 강한 거부 반응을 보인다. 음식과 차는 어쩔 수 없지만, 버마 여성인 마 흘라 메이는 그에게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오직 백인 여성과의 결혼만을 그토록 바라고 백인 사회에 안전하게 머무르고자 했던, 버마 향수 냄새를 쉽게 혐오할 수 있었던 그는 어쩔 수 없는 ‘백인’이었다.
이 과정에서 마 흘라 메이가 갖게 된 플로리에 대한 적개심과 원망은 후에 그를 파멸시키는 데에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마 흘라 메이는 걸핏하면 플로리를 찾아가서 돈을 내놓으라고 했고, 안 그래도 엘리자베스에게 잘 보이려고 새 옷을 사느라 지출이 늘어난 플로리는 그 앞에서 매우 난처해졌다. 마 흘라 메이는 계속 그를 찾아갔고, 그러다 엘리자베스에게도 모습을 보였으며, 나중에는 엘리자베스를 포함해서 그 동네의 모든 백인들이 참가한 예배까지 찾아가서 플로리의 평판을 완전히 박살냈다. 우 포 킨은 다른 복잡한 방법을 사용할 필요도 없었다. 덥고 습한 버마에서 10년 동안 부적응자 백인으로 지낸 결과는 자살이었다. 물론 플로리가 특이한 경우 아니냐고 물을지 모르지만, 조지 오웰은 다음과 같이 명시한다. “버마에 거주하는 유럽인들에게는 자살 사건이 흔했으며, 그리 충격적인 일도 아니었다.”
이렇게 생각하면 우 포 킨이야말로 굉장히 특이하다. 그는 버마인이지만 그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했다. 심지어 걸림돌이 되는 사람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제거하면서까지, 백인들 사이에 서고자 하는 강렬한 열정 하나로 평생을 달렸다. 그러다가 갑자기 허무하게 뇌졸중으로 죽어 버렸다. 나는 플로리의 죽음도 꽤나 허망했는데, 우 포 킨도 마찬가지다. 이 둘은 모두 버마의 속도에 적응하지 않았다. 타인에 의해 살해되는 경우를 빼면 이 소설에서 죽는 인물은 이 둘뿐이다. 다른 주요인물들은? 어쨌든 생명은 부지했다. 베라스와미는 멀리 쫓겨났지만, 어쨌든 거기서도 의사 노릇을 하며 지낸다. 코 슬라와 마 흘라 메이도, 잘 지낸다고는 할 수 없지만 생계를 유지하며 살아간다. 흘러가는 대로 상황에 적응하며 살아간 이들은 버마의 삶을 이어나간다. 거스르려는 자, 적응하지 못한 자는 죽었고, 순응한 자는 살아남았다.
플로리와 우 포 킨은 ‘부적응’이 아닌 ‘욕망’이라는 측면에서도 묶을 수 있다. 플로리와 우 포 킨 모두 자신의 분수에 맞지 않는 대상을 욕망했다. 플로리는 자신의 나이와 모반에 맞지 않는 어린 백인 여성을, 우 포 킨은 자신의 피부색에 맞지 않는 ‘클럽 회원’이라는 타이틀과 자신의 삶에 어울리지 않는 평화로운 사후세계를 욕망했다. 입으로는 반제국주의를 외쳤지만 오직 백인 여성과의 결혼만을 원한 플로리, 평생 남의 인생을 망치면서 살았지만 탑만 쌓으면 그 모든 게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평온한 죽음을 꿈꾼 우 포 킨은 생각보다 비슷할지도 모른다.
물론 이 소설은 잘 알려져 있듯이 “제국주의의 허상을 파헤친” 작품이다. 그러나 그런 해석은 이미 너무나도 많지 않은가. 날씨, 그로 인해 구성된 버마의 속도, 이에 대한 부적응과 자신의 분수를 넘어선 욕망으로 <버마 시절>을 다시 해석해 보는 건 재밌는 일이었다. 이 소설을 읽는 내내 플로리는 온몸으로 버마의 자연을 거부하는 것 같았다. 더운 지역의 사람들은 그 지역에 맞는 삶, 적당한 속도로 살아가고 있음에도 외부인들, 특히 서구인들은 이를 보고 게으르다고 한다. 딱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사실 플로리도 마찬가지였다. 플로리는 버마의 속도를 경멸했다. 정치적으로는 그가 반제국주의적이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나, 정말 그는 버마를 존중했을까? 버마의 날씨, 버마의 속도를 경멸하면서 버마인들의 삶을 존중하는 건 가능한 일일까? 제국주의는 다른 국가의 속도를 무시하고 자신들의 개발 도구로 이용한다. 그런 점에서 버마의 속도를 경멸하면서 반제국주의를 외치는 건 한편으로 꽤나 모순적인 일일지도 모른다.
덥고 끈끈한 식민지의 공기를 가득 담아낸, 각 장을 넘길 때마다 종이에서 땀이 나와서 내 손가락에 달라붙는 것만 같은 감각을 주는 소설은 처음이었다. 더운 장소의 속도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