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출판계에서는 질병과 장애를 다루는 책들이 다수 출간되고 있다. 특히 장애에 관해서는 추상도가 높은 이론서부터 아주 구체적인 에세이까지 다양한 책들이 나오고 있다. 이 글을 통해 소개하는 다섯 권의 책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장애에 접근하면서도 단지 장애에 관한 이야기를 늘리는 데 그치지 않고 장애에 관한 담론을 확장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출간된 순서대로 배치한 이 책들 중 앞의 네 권은 각각 푸코의 이론, 과학기술, 시설 문제, 치유와 문화적 폭력과 장애의 관계를 깊이 파고드는 연구서에 가깝다. 이 책들은 모두 시설 문제 및 그 배경에 깔리는 자립과 장애인의 정체성, 그리고 일상이라는 문제에 개입한다. 마지막 한 권은 가장 최근에 출간된 책이자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장애의 경험을 일상적으로, 그러나 동시에 복잡하게 풀어내는 에세이다.
이 책들을 읽다 보면 어떤 담론의 확장은 단순화와 보편화, 이제는 당연히 옳다고 합의하는 이야기들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구체적이고 논쟁적인 이야기들을 복잡하고 두텁게 다룰 때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된다. 장애에 대해 2020년 하반기부터 올해 상반기까지 나온 최근 논의들에 설레는 마음으로 당신을 초대한다.
『‘장판’에서 푸코 읽기』 : 현장으로 이론을 독해하다
『‘장판’에서 푸코 읽기』 박정수 지음, 오월의봄, 2020
공부를 하다 보면 이론을 현장에 적용해서 이론의 현실성을 따지거나 현장의 상황이 이론과 얼마나 부합하는가, 이론에서 이야기하는 이상적인 무언가에 맞추려면 현장을 어떻게 조정해야 하는가와 같은 관점에서 현장과 이론의 관계를 논하는 글들을 종종 보게 된다. 물론 이는 필요한 일이지만, 대체로 이런 경우에는 실제 현장보다는 이론이 중심에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장판’에서 푸코 읽기』는 반대로 현장을 통해 이론을 다시 읽고, 재구성해내고자 한다. 본래 푸코를 공부하는 인문학 연구자였던 저자는 진보적 장애인 운동, 일명 ‘장판’에 들어가면서 자신이 공부하던 내용들을 ‘장판’을 바탕으로 다시 이해하기 시작한다. 그가 ‘장판’이라는 현장에서 마주한 것은 이론만으로 매끈하게 설명되지 않는 복잡한 폭력과 욕망의 얽힘들, 그리고 현장 안에서 이론을 펼쳐낼 때 비로소 이론 또한 더욱 빛난다는 사실이었다.
저자는 『말과 사물』 『광기의 역사』 『감시와 처벌』 『성의 역사』 등 푸코의 저서들을 현장의 언어로 막힘없이 풀어낸다. 특히 푸코가 정신의학의 권력과 환자에 대해 정신과 의사들이 행사하는 기이할 정도로 압도적인 영향력을 지금 정신질환이 진단되고 다루어지는 방식, 이를테면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DSM, 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s)이나 정신보건법과 같은 사례들을 통해 풀어내는 장면들은 현장에서 이론이 더욱 빛나며, 더욱 힘을 지닌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듯하다.
한때는 ‘인문학’이라는 세 글자가 ‘힐링’이나 ‘교양’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곤 했다. 그러나 인문학은 세계와 불화하는 나의 감각을 잠시 안정시켜 주는 편리한 지식이 아니다. 인문학은 오히려 적극적으로 그 불화의 감각에 불을 지펴 그 감각으로 사회를 다시 볼 수 있게 하는 힘이다. 이 책은 바로 그러한 지점에서 인문학의 에너지를 느끼게 해준다. 무엇보다도, ‘장판’이라는 뜨거운 현장의 이야기들 속에서.
『사이보그가 되다』 : 장애와 과학기술을 복잡하게 연결하다
『사이보그가 되다』 김초엽·김원영 지음, 사계절, 2021
장애와 과학기술은 언제나 묘한 관계에 있다. 기술의 발전은 분명히 다양한 측면에서 접근성을 향상시켰다. 이제 스마트폰은 글자가 포함된 사진에서 글자를 분리하여 읽어내고, 음식을 음식으로, 하늘은 하늘로 인식하고, 실내와 실외를 구분한다. 보청기와 인공와우의 성능도 계속 높아지고 있다. 친구들의 휠체어만 해도 핸들이 점점 업그레이드되고 있다. 일일이 열거하려면 끝도 없다.
기업가나 과학자들은 종종 과학기술로 장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당당하게 홍보하거나 선언한다. 어떤 자동차 회사에서는 차 뒷자리에 터치스크린 모니터를 설치하여 운전자에게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게 함으로써 청각장애인 택시 기사가 일하는 환경을 개선하는 광고를 만들고, 어느 통신사에서는 인공지능으로 농인의 (애초에 없었던) 목소리를 ‘복원’하는 광고를 만들었다. 모 대기업은 앞을 볼 수 있게 해주는, 그러나 너무 무겁고 불편해서 정작 당사자들은 사용하지도 않는 기계를 홍보하려고 영화까지 만들었다.
물론 그러한 기술의 도움을 받는 이들도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홍보되는 기술은 대체로 상용화되지 않은 것들이며, 무엇보다도 장애의 경험 자체를 삭제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곤 한다. 여기서 발견되는 것은 장애는 경험되지 않는 편이 낫고, 장애의 경험이란 기술적으로 해결될 수 있는 ‘불편’이라는 전제다.
그러나 장애의 경험은 그보다 훨씬 복잡하며, 장애인이 과학기술과 맺는 관계도 그렇다. 이를테면 지체장애는 걷거나 앉는 문제일 뿐 아니라, 휠체어 안팎에서 몸을 움직이는 기술의 숙련과 삶 속 버릇의 문제이며, 보행뿐 아니라 배변과 같은 생리현상까지도 관련되는 일이다. 그러나 장애인을 걷게 해주겠다는 과학기술들은 이런 장애의 실제에 별 관심이 없다.
『사이보그가 되다』는 장애인의 구체적인 경험들에서 출발하여 과학기술에 대한 수용과 거부의 이분법 바깥을 상상하고, 장애인이 과학기술의 소비자를 넘어 그것을 재설계하는 주체가 되는 조건을 탐색한다. 모든 것을 매끄럽게 해결해주겠다는 약속이 아니라, 덜컹거리는 현실에서 가능성을 찾는 복잡하고 어려운 일을 제안한다. 그리고 여기에 함께할 때, 비로소 다른 세상이 열릴 것이다.
『절멸과 갱생 사이』 : 시설과 국가의 공모를 폭로하다
『절멸과 갱생 사이』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형제복지원연구팀 엮음,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21
형제복지원은 나치의 유대인 수용소처럼 그 안의 사람들을 모두 ‘절멸’시키는 곳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생각하듯 입소자들이 자활할 수 있도록 ‘갱생’시키는 곳도 아니었다. 형제복지원은 근대화 과정에서 ‘국민’ 혹은 ‘시민’이라는 범주를 구성하기 위해 특정한 몸들을 사회적으로 배제하는 공간이었다.
형제복지원은 ‘부랑인’들을 수용했는데, ‘부랑인’은 그 의미가 단 한 번도 명확하게 규정된 적 없는 모호한 용어다. 그래서 이곳에는 노숙인, 구두닦이, 넝마주이부터 지적장애인에 이르기까지, 한 범주로 묶이기 힘든 이들이 모두 잡혀 들어갔다.
문제는 국가가 이들이 시설에서 어떤 생활을 하는지, 시설에서 몇 명이나 ‘자활’하여 나오긴 하는지, 나온 뒤에는 어떻게 지내는지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면서 시설에는 입소자의 머릿수에 따라 돈을 지급했고, 이것이 어떻게 사용되는지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게 하는 게 국가가 복지 예산을 최소화하면서 ‘도시 정화’를 하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자활이나 갱생 같은 말들은 그저 허울이었다. 이는 지금도 장애인 거주시설들과 정부를 연결하는 기본적인 관계다. 폭력은 시설의 역사고, 횡령은 시설의 수익 모델이다. ‘나쁜 시설’을 없애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유다.
『절멸과 갱생 사이』는 한국에서 사회복지법인이 운영하는 시설이 탄생한 역사와 형제복지원의 구조에 관한 여덟 편의 논문을 하나의 흐름으로 엮은 책이다. 저자들에 따르면, 형제복지원은 하나의 특수한 사례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사회복지법인들이 따르는 모델, 무엇보다도 ‘수익 모델’이다.
어떤 이들은 장애인의 삶을 위해 봉사하는 본 목적에 걸맞은 ‘좋은 시설’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틀렸다. 시설은 원래 장애인을 착취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절멸과 갱생 사이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단단히 얽힌 사회적 배제와 착취의 고리다. 이 책은 장애와 시설의 문제를 도시와 빈곤의 문제로까지 확장하여 연결함으로써 대한민국을 이해할 때 우리가 무엇을 알아야 하는지 날카롭게 제시한다.
『치유라는 이름의 폭력』 : 장애인의 현재를 삭제하는 폭력을 파헤치다
『치유라는 이름의 폭력』 김은정 지음, 강진경·강진영 옮김, 후마니타스, 2022
크론병을 가진 나는 간혹 이런 이야기를 듣곤 한다. “크론병이 치료될 수 있다면 어떻게 할 거야?” 다소 난감한 질문이다. 어차피 안 나을 질병을 애써 끌어안고 살아보려 하는 나를 흔들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현실과 다르기에 실질적인 의미도 없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나의 의사와 무관하게 나에게는 치료 혹은 건강이라는 말이 건네어진다. 두 단어 모두 내게는 오지 않을 미래처럼 느껴지는데도.
이 질문은 우선 대체로 치료를 그 자체로 좋은 것이라고 가정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치료는 수술 한 번에, 약이나 주사로 단숨에 반짝 일어나는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다. 이 책에 나오는 것처럼, 치료란 그로 인해 내가 얻을 수 있는 이익과 손해를 복잡하게 계산하고 그 사이에서 협상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치료란 꼼꼼히 따져보고 결정해야 하는, 꽤나 어려운 문제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 치료, 혹은 조금 더 넓은 범위에서 ‘치유’는 그런 방식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이때 치유는 단지 한 사람의 통증을 없애고 삶을 개선하는 정도의 차원이 아니다. 이는 의료적 차원뿐 아니라 지극히 문화적 차원에서 작동하며, 특히 성별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손상된 남성’인 장애남성이 성관계를 통해 ‘치유’되어 ‘진짜 남성’이 될 수 있다는 욕망 혹은 서사는 문화에서 반복해서 생산되고, 장애여성이 과잉 성애화되거나 아예 무성적인 존재로 여겨지는 상황에 장애여성에 대한 성폭력이 ‘치유’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는 경우까지 존재한다.
이처럼 치유는 아픈 사람을 건강한 사람으로, 장애인을 비장애인으로 전환하는 일이며, 그것은 매우 자주 당사자의 의사와는 무관한 방식으로, 혹은 당사자의 의사 자체에 개입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치유는 한 사람이 속하는 범주를 바꾸는 일이고, 동시에 그가 어떤 세계에 살고 있는지를 드러내는 일이다.
『치유라는 이름의 폭력』은 한국의 문학 작품들과 영화, 다큐멘터리를 종횡무진 횡단하며 한국에서 치유가 어떻게 폭력이 되는지 샅샅이 보여준다. 치유는 시간을 접어서 ‘정상’으로 상정되는 과거와 미래만을 보이게 하고, 손상과 질병, 그리고 장애의 현재를 삭제한다. 질병과 장애를 겪는 몸이 자신의 몸을 부정하길 요구하는 치유라는 이름의 폭력을 촘촘히 파헤치는 일은 삭제된 현재를 복원하고 그로부터 더 나은 사회를 상상하는 시작점이 될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이 많고요, 구릅니다』 : 차별 위를 거침없이 구르다
『하고 싶은 말이 많고요, 구릅니다』 김지우 지음, 휴머니스트, 2022
나는 대학에서 장애인권 활동을 하면서 추천할 만한 콘텐츠를 찾다가 「굴러라 구르님 Rolling GURU」 유튜브 채널을 처음 알게 되었다. 내가 활동하던 단체에서는 매년 신입생들에게 ‘장애이해교육’을 진행했는데, 교육 마무리 단계에서 책보다는 웹툰, 영화 등 접하기 쉬운 콘텐츠를 추천하곤 했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말이 많고요, 구릅니다』의 저자는 해당 유튜브 채널의 운영자다. 그는 영상에서처럼 솔직하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동시에, 짧은 영상이 대세인 지금 영상이라는 매체로 풀어내기 어려운 내밀한 이야기들, 특히 자신과 주변인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들을 글로 촘촘히 적어 내려간다. 가족 구성원인 현미, 태균, 지원과 대화를 나누며 관계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는 과정은 섬세함이 특히 두드러지는 대목이다.
흔히 장애에 대해 접근하는 관점으로는 의료적 관점과 사회적 관점이 가장 많이 논해진다. 장애를 치료와 개인적 극복의 대상으로만 보는 전자와, 그에 대항하여 장애를 사회적 관계 안에서 형성되는 경험으로 이해하는 후자는 꽤나 뚜렷하게 구분되는 듯하지만, 실제 장애인의 현실에서 이 두 가지는 자주 지저분하게 뒤엉켜 복잡하게 일상을 구성해낸다.
『하고 싶은 말이 많고요, 구릅니다』는 걷기 위한 치료는 더 받지 않지만 평생 자신이 내면화할 수밖에 없었던 ‘정상성’에 대한 욕망, 사회적 변화에 대한 요구를 모두 드러내는 동시에 그중 어느 것으로도 해소할 수 없는 지극히 사적인 관계 안에서의 감정들을 이야기한다. 장애가 단지 의료적 문제도, 사회적 문제도 아닌, 애정과 우정, 무엇보다도 애증의 문제라는 사실은 이 책과 함께 구를 때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말로 쉽게 정리되지 않는 감각들, 한 축으로 깔끔하게 연결되지 않는 이야기들, 그러나 그렇기에 솔직할 수 있는 이야기들, 그렇게만 꺼낼 수 있는 감각들이 있다. 그리고 이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이 책은 그 어려운 일에 도전하며, 울퉁불퉁한 이야기들 위에서 함께 구르자고 제안한다. 이제 구르는 것은 구르님만의 몫이 아니다. 굴러라, 독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