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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뜨리자, 승인된 적 없는 이야기들을

발행처
대한출판문화협회
간행물
출판문화
분야
질병
장애
대중문화
인문
사회
인권
분류
매거진 기고
권호
694
발행일
2023/11/01
* 편집을 거치기 이전 초고를 첨부합니다.
질병의 이야기, 아픔의 이야기가 부족하다는 말이 무색할 만큼, 질병과 아픔에 대한 이야기는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는 그렇다. 암이나 위장질환 같은 신체 질환에서 우울증, ADHD와 같은 정신질환에 이르기까지, 다루어지는 질병의 스펙트럼도 넓어지고 있다. 다만 오해하지는 말아 달라. 이것은 결코 질병과 아픔에 대한 이야기가 ‘충분’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가 ‘질병 서사’라고 이야기할 때, 그것은 보통 ‘질병 당사자가 직접 쓴 서사’라는 의미다. 오랫동안 질병에 대한 발언권은 의사와 같은 의료 전문가들이 독점해 왔고, 지금도 질병에 관한 이야기의 권위는 의사들에게 주어져 있다. ‘질병 서사’라는 말이 아픈 몸을 가진 당사자들에 의해 강하게 사용되고 있는 데에는 그런 맥락이 있다. 질병에 대한 의사의 발화는 권위를 지니고 미디어로 송출되며 사람들의 생활습관 전반에 영향을 끼칠 때, 아픈 몸을 가진 당사자들의 이야기는 그저 ‘엄살’ 정도로 폄하당해 온 역사 위에서 ‘질병 서사’는 ‘당사자의 직접 쓰기’와 결합했다. 아픈 몸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경험을 직접 서술하기.
저항적 질병 서사와 그렇지 않은 질병 서사
그러나 질병 서사는 질병 서사라는 단어만으로 담아내기에 너무도 다양한 경험과 방향성을 지니고 있다. 이를테면,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를 쓰고 ‘다른몸들’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시민연극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를 비롯하여 질병권 담론을 만들어나가고 있는 조한진희 작가는 질병 서사의 세부 장르로 ‘저항적 질병 서사’를 제안했다. 이는 기존의 질병 서사의 한계에 대한 고민과 비판에서 나온 개념이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나는 재작년쯤 인스타그램에서 어떤 사람에게 DM을 받았는데, 자신이 쓰는 첫 책에 추천사를 써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는 내가 나의 크론병 경험을 바탕으로 쓴 <난치의 상상력>을 알고 있다며, 자신의 크론병 경험을 쓴 이야기를 읽어 달라고 한 것이었다. 크론병은 희귀질환이라 환우를 만났다는 것만으로도 반가워서 추천사 제안을 수락하고 싶었지만, 일단 원고를 일부라도 읽어 보고 결정하겠다고 답했다. 원고를 읽은 뒤 나는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는데, 그 책의 방향성은 나의 책과 정반대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난치의 상상력>은 기본적으로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낫지 않는 몸을 기준으로 세상을 처음부터 다시 상상해야 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나는 질병 경험을 통해 건강한 몸만을 기준으로 삼고 있는 사회와 마주했고, 그것을 바꾸고 싶다는 마음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나는 질병 경험을 페미니즘과 학생운동, 그리고 장애운동에서 배운 언어를 통해 풀어냈고, 그 결과물이 <난치의 상상력>이었다. 그런데 나에게 추천사를 제안한 그 작가의 책에는 자신의 마음가짐으로 질병의 고통을 극복하고 하늘의 뜻을 받아들이며 마음의 평화를 찾는다는 문장들이 담겨 있었다.
이는 질병 서사 중에서 저항적 질병 서사에 속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의 차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저항적 질병 서사는 자신의 질병 경험을 그것을 둘러싼 사회 구조와 결부지어 이해하고, 질병과 아픔이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 사회가 나서서 고민해야 하는 몫임을 이야기하고, 나아가 계급, 성별, 거주 지역, 노동 조건 등에 따라 몸을 위계화하고 특정한 질병을 겪게 만드는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반면, 저항적 질병 서사가 아닌 질병 서사는 질병을 개인이 감당해야 할 몫으로 이해하고, 자신의 몸과 마음을 직접 돌보는 것, 혹은 종교나 친구, 가족에게 기대며 고통을 극복하는 것을 해결책으로 이야기한다.
이러한 구분은 장애에 대한 대표적인 두 가지 관점과 연결되는 측면이 있다. 장애에 관한 다양한 이론들 중 1980년대에 장애인들의 사회운동과 함께 본격적으로 태동했다고 이야기되는 장애학은 장애에 대한 기존의 관점을 ‘개인적/의료적 모델’로 규정하고, 이에 대응하여 ‘사회적 모델’을 제안했다. 간단히만 설명하면, 전자는 장애를 의료적인 관리와 치료의 문제인 동시에 개인이 알아서 감당하고 극복해야 할 문제로 다루고, 후자는 장애가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며 따라서 개인이 아닌 사회를 바꿔야 할 문제로 다룬다. 저항적 질병 서사의 개념은 장애의 사회적 모델과, 그렇지 않은 질병 서사의 개념은 장애의 개인적/의료적 모델과 대응되는 면이 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아픈 사람은 말할 수 있는가
그러나 장애에 대한 두 관점에 대한 이야기는 질병 서사의 구분에 그대로 사용될 수 없는데, 이는 기본적으로 장애의 사회적 모델이 손상과 질병을 자연화함으로써 가능했기 때문이다. ‘장애는 질병이 아니다’라는 구호에서 드러나듯, 장애가 치료되는 것이 아니며 의료적이기보다 사회적인 문제임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질병은 의료적이고 개인적인 문제로 전제되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장애 운동 내부에서도 이러한 구분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기 시작했는데, 그 핵심은 몸의 경험과 온전히 분리된 사회적 경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몸과 환경의 상호작용을 중시하는 다양한 관점들이 이야기되기 시작했고, 장애 운동은 특히 페미니스트들의 개입으로 몸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벼리고 있다.
그런 맥락에서 저항적 질병 서사는 그것이 질병의 사회적 측면을 강조함에도 ‘사회적 모델’과 다를 수밖에 없다. 질병은 지금도 여전히 몸의 문제로 환원되는 경향이 강하며, 반복적으로 통증과 같은 증상을 경험하는 질병들의 경우 당사자들도 그것을 계속해서 자신의 몸의 문제로 경험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질병의 경우 장애와 달리 ‘질병은 ○○이 아니다’라고 말할 만한 것이 딱히 없다. 흔히 손상은 특별히 의미화되지 않은 신체적 사실이고, 그것을 질병이나 장애로 해석하는 문화와 제도가 있다고 이야기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항적 질병 서사는 계속해서 당사자를 몸으로 환원하는 질병 경험에서 출발하는 동시에 그러한 환원을 반복적으로 거부함으로써, 그러나 자신의 몸의 문제 또한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문제의 초점을 사회로 옮겨야 한다는 어려운 과제를 안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일까, 질병 서사가 쏟아지고 있는 와중에도 장르로서의 저항적 질병 서사는 아직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앞서 언급한 ‘다른몸들’에서는 저항적 질병 서사를 아픈 몸이 나아서 건강해지기를 요구하는 건강권이 아닌 아픈 몸이 아픈 채로도 사회 구성원으로서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는 ‘질병권’ 운동의 맥락으로 이야기하며 아픈 몸 당사자들의 운동에 새로운 방향성을 제안하기도 했는데, 이 개념은 2016년에 처음 제안되었으나 아직 충분히 대중성을 확보하지는 못한 듯하다. 나는 그 이유가 저항적 질병 서사라는 장르 자체의 어려움과 관련된다고 본다. 서사라는 것 자체가 기본적으로 누군가에게 읽히거나 들려야만 행위성을 발휘할 수 있는데, 이를 위해서는 기존에 합의된 언어에 일정 부분 기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픈 사람은 ‘말할 수 없다.’ 이것은 모든 소수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고자 할 때 겪는 딜레마다. 그런 이유에서 여전히 많은 질병 서사는 사람들에게, 또 저자 자신에게도 익숙한 개인적인 관점에 집중하고 있는 것일 테다.
군더더기의 중요성
개인의 구체적인 아픈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읽히고, 들리기 위해 그것은 사람들에게 익숙한 언어, 즉 건강 세계의 언어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다. 개인적 불행이나 비극으로서의 질병으로 이야기를 시작할 때, 그 틀을 벗어나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들리기 위해 왜곡을 감수해야 하는 딜레마. 바로 이 지점 때문에 저항적 질병 서사라는 범주 자체가 그리 명료한 것이 아니게 된다. 실상 모든 서사는 전복과 반동을 동시에 담고 있는데, 사람들에게 들리기 위해 기존 질서에 기대야 하는 동시에, 사람들에게 새롭게 느껴져야 하기에 기존 질서를 벗어나기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저항적 질병 서사와 그렇지 않은 질병 서사를 나누는 것이기보다, 모든 질병 서사에서 전복적인 요소를 발굴하여 그것을 저항적 질병 서사로 만들어내는 일이다. 그런 맥락에서 저항적 질병 서사라는 개념은 분류를 위한 범주이기보다, 서사를 다른 방식으로 읽어낼 수 있도록 하는 관점에 가깝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개인적인 경험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질병에 있어서 그것은 불가능하다. 오히려 질병 서사에 주어진 과제는 페미니스트들이 역설했듯이 개인적인 경험 바로 그것을 정치적인 문제로 구성해내는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나는 그것이 개인적인 경험들을 연결하는 서사 쓰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기존에 질병 서사와 형식적으로 조금 다르게 접근해야 한다. 당사자가 직접 쓰는 서사는 한 사람이 일관성 있게 처음부터 끝까지 1인칭으로 자신의 삶을 설명함으로써 독자를 자신의 세계로 끌어들인다. 이때 질병 서사의 저자는 자신의 삶을 하나의 세계로 구성하여 내놓을 수 있고, 그것은 꽤 안정적인 서사 구조를 갖추게 된다. 이러한 질병 서사는 무엇보다도 그것을 쓰는 과정에서 저자 본인이 저자로서의 위치를 갖게 되는 동시에 자신의 삶을 설명할 언어를 발명하게 된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바로 그러한 특징 때문에 그것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 이는 통상적으로 한 사람의 질병 서사가 한번 출판되면 후속 작업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데에서도 알 수 있다. 1인칭의 질병 서사는 그것이 지닌 완결성 때문에 풍성함을 잃는다.
개인적인 경험들이 서로 연결되는 서사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각각의 이야기가 매끈하게 완결되기보다, 울퉁불퉁하게 개입의 지점들을 남겨 두어야 한다. 완결된 서사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이를테면 ‘발병→진단→부정→수용’과 같은 서사 구조를 구성하는 과정에서는 수많은 수치심과 수용 이후에도 반복되는 체념과 부정과 같은 지저분한 질병의 실제가 사라지고 만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지점에서 우리는 더욱 다양한 이들과 연결될 수 있다. 위와 같은 서사는 진단명 없는 이들의 아픔에 접속하기 어렵고, 자신의 아픔을 ‘받아들이지’ 못한 이들의 아픔에도 접속하기 어렵다. 질병을 진단받고, 수용하는 데에는 굉장히 많은 조건이 필요하기 때문에, 완결된 서사는 나의 경험을 잘라낼 뿐 아니라 다른 아픈 이들과 연결될 수 있는 고리들까지도 잘라내게 된다. 매끈한 이야기가 아니라 풍성한 이야기가 필요하다는 것은 그런 ‘군더더기’들을 살려야 한다는 의미다.
2인칭의 질병 서사
나는 그런 군더더기를 살리는 데 2인칭의 질병 서사가 유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말 그대로 ‘당신’이 주어가 되는 질병 서사다. 나의 질병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질병을 관통하여 상대의 질병을 이해하고, 다시 그것을 통해 나의 질병을 이해하는 순환을 발생시키는 이야기다. 그것은 아픈 사람도 모두 다르기에 질병 서사를 통해 원하는 것도 모두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고, 그럼에도 서로의 차이를 조율하며 서로 다른 사람의 질병들을 하나의 서사로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이렇게 쓰인 결과물은 울퉁불퉁할 수밖에 없다.
2인칭의 질병 서사는 그 결과물보다 과정이 더욱 중요할 수도 있다. 서로 다른 아픈 사람이 서로의 질병을 이해해 나가려면 일단 그들이 만나야 하고, 대화를 나눠야 하며, 서로의 차이를 직시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 직시의 과정은 결코 자연스럽지도, 편안하지도 않을 것이다. 때로 그것은 나보다 덜 아픈 당신에 대한 부러움이나 질투이기도 하고, 당신보다 나은 돌봄을 받으며 산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기도 하다. 밝히기 어려운 지저분하고 찌질한 감정들이 몸에 감돌기 시작한다. 취약한 사람들의 연대는 저절로, 아름답게 생겨나지 않는다. 우리는 조용히 서로의 조건을 비교하고, 말로는 하면 안 된다고 하는 고통 올림픽을 속으로는 하고 있다.
2인칭의 질병 서사를 쓴다는 건, 이 모든 감정을 안은 채로 바로 그 상대에게 말을 건네고, 그를 이해하려고 애쓴다는 의미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나를 누르고 그 자리에 상대를 들이는 것이며, 상대를 들임으로써 내가 바뀔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단지 아픈 사람들이 공저자로 책을 쓰는 것이 아니라, 서로 치열하게 대화하며 써야 하는 것이다. 가장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것을 이야기할 때, 비로소 우리는 더욱 주변화된 질병의 경험들에 다가설 수 있다. 진단되지 않고, 인정받지 못하고, ‘충분히’ 아픈 것 같지 않고, 삶의 일부가 되지 않았으면 하는 고통의 경험들에 다가설 수 있으며, 그제야 질병을 죽음이 아닌 삶의 조건으로 만드는 데 무엇이 필요한지 고민할 수 있게 된다.
터뜨리자, 승인된 적 없는 이야기들을
이를 위해 나는 우선 질병 서사가 양적으로 늘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때 누가 어떤 의도를 갖고 질병 서사를 쓰는지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읽느냐다. 저자가 글을 쓰고, 출판사에서 이를 책으로 만들어 서점에 배본하고, 독자는 이를 읽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일방적인 과정으로 보일 수 있지만, 책은 배본되는 순간부터 저자와 출판사의 손을 떠난다. 책은 그 자체로 존재하기보다, 독자들과 독자들이 쓴 리뷰들과 연결된 형태로 세상에 존재하게 된다. 달리 표현하면, 독자가 어떻게 읽고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책은 다르게 존재하게 된다는 뜻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모든 질병 서사가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아픈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누구에게나 어려우며, 그렇게 쓴 글은 때로 나 자신의 삶 그 자체와 비슷하게 느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의 삶에서 출발해서 쓴 글이 나의 삶을 규정하게 되고, 그래서 나도 나를 설명하기 위해 내가 쓴 글을 참조하게 된다. 책과 나는 계속해서 서로를 만들어간다. 어찌 소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럼에도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소중한 것을 어떻게 유의미한 것으로 만들어낼 것인가? 내가 쓰는 글의 내용이 나를 만들어나가기도 할 때, 나를 유의미하게 만들기 위해 우리는 아프고 소중한 이야기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 것인가?
이를 위해 나는 우선 독자들에게 저항적 질병 서사를 읽기 도구로 활용하자고 제안하고 싶다. 장르로서의 저항적 질병 서사보다, 관점으로서의 저항적 질병 서사. 독자 또한 책과 책의 맥락을 만들어나가는 중요한 행위자라는 점이 중요하다. 독자들이 질병 서사에서 저항의 실마리를 발견함으로써 질병 서사는 저항적인 것이 될 수 있고, 더 많은 이들의 아픈 이야기가 생산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낼 수 있다. 저자들에게는 2인칭의 질병 서사를 쓰자고 제안하고 싶다. 그것은 관계를 생성하는 글쓰기다. 글을 쓰기 위해 서로 다른 아픈 몸들이 만나고 관계를 맺어야만 하며, 글을 쓰는 과정에서는 차이를 마주하고 조율하며 불일치들을 글로 담아내야 한다. 글을 쓴 이후에는 그 차이들에 독자들이 연결된다. 2인칭의 질병 서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관계의 문제다. ‘나의 경험’을 넘어서 ‘너의 경험’으로 나아갈 때 질병 서사는 더욱 확장될 수 있다.
그렇게 확장할 때, 비로소 우리는 승인된 적 없는 이야기들을 시작할 수 있다. 단지 건강 중심 사회에서 배제된 서사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 사이에서도 감춰지고 쉬쉬해 온 이야기들에 관한 것이다. 통증, 질투, 수치, 피, 똥, 땀, 농에 대한 이야기다. 이것은 단지 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피부에 대한 이야기이고, 살에 대한 이야기다. 구멍에 대한 이야기다. 사회로부터 인정받고 승인받기 위해 감춰왔던 것들을, 우리가 적당한 정도로만 어깨를 맞추기 위해 외면해왔던 것들을 드러내자. 우리 사이의 차이를, 우리 사이의 갈등을 드러내자. 흑인 여성 레즈비언이자, 암을 겪으며 그에 대한 글을 쓰기도 한 오드리 로드는 바로 그 지점에서 ‘사랑’을 발견해냈다. 우리가 서로의 눈동자를 마주하고, 부딪치고, 차이를 중심에 두고 대결할 때, 우리는 비로소 서로를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이때 사랑은 낭만적인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나를 짜증나게 하고 귀찮게 하는 감정과 행동들을 다루는 실무적인 문제이며, 서로의 차이를 하나로 대충 뭉개지 않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다루는 실천의 문제다. 그걸 위해 우리 서로를 마주하고, 서로와 부딪치자. 그렇게 사랑하자. 사회가 승인하는 것과 다른 방식으로 사랑하자. 나는 어쩌면 질병 서사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정함이라는 말로 서로의 표면적인 말들에 가볍게 공감하지 말고, 서로의 차이를 통감하며 가까워지자. 그때 우리는 마주할 수 있을지 모른다. 새로운 이야기들, 지저분한 이야기들, 무엇보다도 승인된 적 없는 아픈 이야기들의 범람을. 그러니 터뜨리자, 승인된 적 없는 이야기들을. 그 지저분하고 자잘하고 사소하지만 가장 본질적인 고민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