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론병 진단 11년차인 안희제(『난치의 상상력』 저자) 작가는 자신이 질병서사를 쓴 계기에 대해 “아픈 사람은 병원에만 있거나 아니면 병원 밖에서 아픔을 보이지 않도록 감추고 있거나 둘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라며 “그런데 저는 병원보다 병원 밖에서 보내는 시간이 훨씬 많았고 지금도 그렇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그러면 당연히 갑자기 변한 일상에 속이 답답한데 말을 할 곳이 없다는 것도 저만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라며 “답답함, 저에게는 이 단어가 질병 서사를 처음 쓰게 된 계기를 가장 잘 설명해 주는 것 같다”라고 강조했습니다.”
환원되지 않기 위한 안간힘
“누구든 적절한 진료를 받을 수 있고, 일터와 가정에서 자기 몸을 돌볼 환경이 제공된다면, 사회가 질병을 치료의 대상보다는 적절히 관리할 대상으로 이해한다면, 환자와 아픈 사람도 얼마든지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의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비로소 질병은 죽음이 아닌 삶의 조건이 된다.” - <난치의 상상력>, 210쪽.
안녕하세요, 저는 <난치의 상상력>을 쓴 안희제입니다. 11년차 크론병 환자고요. 독자 분들과 만나는 자리가 오랜만이라서 조금 떨리네요. 책이 나온 지 벌써 만으로 3년이 넘었다는 게 신기하고요. 그 사이에 다섯 권의 책을 더 썼지만, 누군가가 저의 글을 읽고 그것으로 어떤 이야기를 시작한다는 게 저에게는 여전히 기적 같은 일로 느껴집니다. 아마 이곳에 계신 다른 저자 분들도 비슷한 경험이 있으실 것 같은데, 질병 서사의 경우 독자 분들이 나눠 주시는 이야기들이 결코 가볍지 않은 경우가 꽤 있거든요. 고작 저의 글이 그런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계기가 되거나, 그런 이야기가 나누어질 수 있다는 신뢰를 만들 수 있다는 게 기쁘고 감사한 날들이었습니다.
애초에 제가 질병 서사를 쓰게 된 것도 사실 다른 분들이 아픈 이야기를 꺼내길 바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처음 아픈 이야기를 블로그와 소셜미디어, 그리고 <비마이너>에 쓰던 당시에 저는 대의 같은 건 특별히 없었고 그냥 너무 속이 답답했는데, 왠지 나만 그런 게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병원에 갈 때마다 내 앞뒤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 있는데, 거리에서는 그 어떤 아픔도 보이지 않는 것 같았어요. 그게 너무나 이상했죠. 아픈 사람은 병원에만 있거나, 아니면 병원 밖에서 아픔을 보이지 않도록 감추고 있거나, 둘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저는 병원보다 병원 밖에서 보내는 시간이 훨씬 많았고, 지금도 그렇고요. 그럼 당연히 갑자기 변한 일상에 속이 답답한데 말을 할 곳이 없는 것도 저만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든 거예요. 답답함, 저에게는 이 단어가 질병 서사를 처음 쓰게 된 계기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것 같습니다.
저의 이야기를 쓰는 것이라서 큰 어려움이 없을 수도 있었지만, 질병을 어떤 대상으로 그릴지, 나의 질병 경험과 그에 대한 해석을 어떤 맥락 안에 위치시킬지가 저에게는 가장 큰 고민이었습니다. <난치의 상상력>은 저의 질병 경험을 장애 운동의 맥락과 연결함으로써 질병을 장애와 비슷하게 사고하려는 하나의 시도였다고 할 수 있어요. 당시 저는 대학 안팎에서 장애인권 운동에 참여하고 있었고, 그 안에서 해방감과 답답함을 동시에 겪었습니다. 장애 운동의 언어가 저의 삶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되는 동시에, ‘겉보기에 멀쩡하지만 만성적으로 피로하고 아픈 몸’이 장애 운동에서 중요한 고려 대상은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있었으니까요. 장애와 비장애도 아니고, 질병과 건강도 아니고, 질병과 장애 사이의 경계에 존재한다는 감각은 그런 맥락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편으로 장애 운동의 언어로 저의 경험을 해석하는 동시에, 장애 운동의 구호들과 논리들에 제 몸의 경험으로 개입하고자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저의 언어를 만들어 준 글들이 있습니다. 시간 관계상 오늘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의 책은 빼고 이야기하도록 할게요. 가장 처음 무릎을 치며 읽었던 책은 수전 웬델의 <거부당한 몸>이었습니다. 원래 페미니스트 학자였던 저자가 만성질환으로 인한 장애를 겪게 되면서 자신의 인식론과 몸의 경험을 조율하여 장애 운동과 페미니즘 운동의 언어를 교차시키고자 한 책인데요. 저에게는 그보다도 페미니즘 인식론과 장애학의 언어 모두에 만성질환의 경험과 감각으로 도전하는 책으로 느껴졌습니다. 이를 통해 질병과 장애, 손상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몸의 경험을 깊이 다루어 온 페미니즘 인식론에서는 몸의 범주를 더욱 넓히는 작업이었죠. 꽤 두꺼운 책인데도 상당히 빠르게 읽었던 것 같아요(UN에서 제시하는 장애의 정의와 같은 것들을 다루는 앞부분은 조금 지루한데, 그것만 잘 견디시면 됩니다!).
또 하나는 <퀴어 페미니스트, 교차성을 사유하다>에 들어있는 전혜은 선생님의 ‘아픈 사람 정체성’이라는 글입니다. 이 글은 책에 실리기 전에 논문의 형태로 먼저 읽었었는데요. 이 글은 ‘환자’, ‘환우’와 같은 용어 대신 ‘아픈 사람’을 정체성의 언어로 만듦으로써 진단명과 같은 의료적 기준 대신 ‘아픔’이라는 당사자의 주관적 경험을 통해 우리의 삶을 설명할 수 있는 길을 연다는 점에서 정말 새롭고 감사한 글이었습니다. 다른 글들도 그렇지만, 이 글이 없었다면 제가 저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지금까지 감을 못 잡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무엇보다도, 질병이나 아픔에 대한 ‘긍정’이나 ‘수용’보다, 아픔을 빼놓고는 나의 삶을 설명할 수 없는 사람이 ‘아픈 사람’이라는 규정이 좋았어요. 아픔과 질병은 종종 변명과 해명의 대상이 되곤 하지만, 여기서 아픔은 설명할 수 있는 힘이 되니까요.
<난치의 상상력>에 많이 인용하지는 않았지만, 이 책은 정말 빼놓을 수 없습니다. 최근에 <페미니스트, 퀴어, 불구>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나온 <Feminist, Queer, Crip>인데요. 제가 이 책을 처음 접한 건 노들장애학궁리소에서 열렸던 김은정 선생님의 강연 <근본 없는 장애학>이었습니다. 김은정 선생님은 앞서 언급한 <거부당한 몸>의 역자 중 한 분이시기도 하고, 작년에 번역된 <치유라는 이름의 폭력>의 저자이시기도 하죠. 여기서 주로 나오는 개념인 ‘치유 폭력(curative violence)’과 ‘치유적 시간(curative time)’의 개념은 질병과 장애에 대한 저의 관점을 크게 바꾸어 놓았습니다. 특히 당시 제가 임의로 ‘치유 강제의 시간’이라고 번역해서 썼던 ‘curative time’은 우리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생각할 때 거기서 질병과 장애, 손상이 어떻게 사라져 버리는지를 보여주는데, 김은정 선생님은 <치유라는 이름의 폭력>에서 장애인의 현재가 비장애인이었던 과거와 비장애인이 될 미래 사이에서 접혀 사라져 버린다는 ‘접힌 시간’의 개념을 제안하기도 했어요. 이 사회가 몸을 다루는 방식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강력한 개념입니다.
이쯤 되면 제가 참고한 책들에 어느 정도 패턴이 보이는데요. 제가 언급한 책들이 모두 페미니스트가 쓴 책이라는 점은 아마 특정한 사회적 상황 안에서 저에게 그 텍스트들이 찾아왔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 저는 2015년에 대학에 입학해서 2016년부터 졸업할 때까지 장애인권 활동을 했습니다. 당시는 페미니즘 리부트 시기로, 대학 안에서도 페미니즘 모임들이 많이 만들어지고 있었어요. 특히 2018, 2019년은 총여학생회 폐지의 흐름이 일부 대학가를 휩쓸었고, 제가 있던 대학은 그중 하나였습니다. 당시 장애인권 단체의 위원장이었던 저는 소수자 인권 단위로서 총여학생회에 연대하는 경험을 했었고, 결국 폐지를 막지는 못했지만 그러한 연대의 경험은 아마 이후에 제가 인권에 대한 고민을 하는 데에도 계속해서 영향을 주었으리라 짐작됩니다.
또 하나의 패턴은 제가 언급한 책 중 질병 서사라고 부를 만한 것이 사실상 없다는 점입니다. 제가 <난치의 상상력>을 쓰던 당시에는 아직 질병에 대한 이야기가 한국에서 별로 없기도 했지만, 그래도 번역된 책들은 분명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그런 책들을 거의 읽지 않았는데, 의도적인 선택은 아니었고요. 제 책이 장애 운동과 학생 운동의 맥락 안에서 쓰였다는 걸 보여주는 지점인 듯합니다. 지금은 문화인류학을 공부하고 있지만 저는 원래 경제학과 출신이고, 그래서 질병이나 의료와 관련된 공부를 할 기회가 많지 않았어요. 제가 학업 외의 공부를 할 기회는 주로 장애인권 단체에서 얻었고, 그러다 보니 질병과 의료에 대한 내용은 정작 별로 읽은 적이 없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난치의 상상력>은 질병 서사이지만, 페미니즘 리부트 시기의 장애 운동과 학생 운동의 맥락 안에서 쓰인 질병 서사라고 설명하는 것이 적절할 것 같아요.
앞서 책을 쓰게 된 계기가 답답함이었다고 말씀드렸는데요, 그 답답함은 이중적인 것이었습니다. 하나는 질병에 대해 말할 곳이 없다는 답답함이었고, 다른 하나는 질병에 대해 말하면 그것이 오직 질병에 대한 이야기로만 환원되는 것에 대한 답답함이었어요. 책을 쓰면서 주로 장애학과 페미니즘의 언어를 빌린 것도 질병에 대한 이야기가 다양한 관점에서 이해되고 논의될 수 있길 바랐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저에게 질병은 너무나도 질병 이상의 무엇이었고, 사회가 질병을 질병 이상의 무엇으로 이해하길 바라며 책을 썼던 것이었습니다. 책을 쓴 이후 한동안은 질병에 대해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지는 것 같아서 속이 시원하기도 했습니다. 연락이 오는 거의 모든 인터뷰에 응했고요.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저는 지쳐갔습니다.
여기서 이 발표의 제목이 ‘환원되지 않기 위한 안간힘’인 이유가 비로소 드러나는데요. 저는 질병으로 환원되고 싶지 않아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책을 쓴 이후의 고민들이 저를 괴롭힙니다. 질병으로 환원되고 싶지 않아서, 환자로만 보이고 싶지 않아서 책을 썼는데, 제 책을 읽으시더니 할머니께서 울면서 전화를 하시는 거예요. 물론 하나밖에 없는 손자가 아픈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써놨으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책을 낸 이후 했던 인터뷰들에서도 종종 저는 ‘아픈’ 이야기를 하길 요구받았습니다. 제 책에서 방점이 찍혀 있는 건 ‘아픈’ 이야기가 아니라 아픈 ‘이야기’인데도 말이에요. 어떤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기보다 아픈 사람으로 규정되는 경험을 하면서, 과연 책을 쓰는 것이 나에게 좋은 일이었나? 하는 고민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가족의 지인들은 만날 때면 치료와 관련된 이야기를 언제나 빼놓지 않았습니다. 물론 신경을 써 주시는 것은 감사한 일이지만, 제가 원한 건 질병이 아주 특별히 불행한 무엇이 아니라 그냥 보통의 경험이 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사회는 아주 느리게 바뀌지만, 그걸 알면서도 느끼는 답답함은 또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제가 성격이 급한 것도 한몫을 했고요.
그렇다고 <난치의 상상력>을 쓴 걸 후회하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라고 단번에 대답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이 자신에게 언어를 주었다고 쓴 리뷰들, 북토크에 와서 자신과 자신의 아이가 아픈 이야기를 꺼낸 독자들을 생각하면, 단 한 사람에게만 닿아도 충분하겠다고 생각한 책이 여러 사람에게 어떤 이야기를 꺼내게끔 했다는 걸 생각하면, 그 정도의 부작용은 감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크론병 진단 이후 초기에 정말, 정말 드문 부작용들을 여러 차례 겪으면서 하게 된 생각은, 아무리 좋은 약이어도 부작용은 언제나 존재한다는 거였어요. 하물며 약도 그런데, 20만 자가 넘는 글자로 이루어진 책은 얼마나 다양한 해석에 열려 있을까요. 이미 존재하는 지배적인 사회의 배치에 꼭 맞지 않는 언어는 언제나 오해를 사기도 하고요. 어쩌면 별다른 사건 없던 제 삶에 처음 찾아온 큰 굴절이 크론병이었고,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 공개적으로 이야기를 꺼내놓은 게 제 질병에 대한 이야기라 제게 더 크게 느껴졌을 수도 있겠습니다.
책을 낸 이후 저에게 과분한 리뷰들을 많이 읽었어요. 답답함에서 출발한 저의 글에 위로를 받고, 언어를 얻고, 자신의 논문과 책에 인용하는 분들까지 생겼고요. 물론 문재인 정부 당시에 K-방역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조선일보냐는 소리를 들은 적도 있지만, 그런 평가는 크게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합니다. 학생회장이 힘주어 쓴 것 같다는 리뷰는 소위 운동권으로서 아무래도 정곡을 찔린 느낌이었습니다. 남은 고민은 앞으로 어떤 글을 써야 할지에 대한 것입니다. 최근에 저는 질병 서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망설이는 사랑>이라는 책을 썼는데요(로맨스 웹소설 같지만 온라인 공론장과 관심 경제에 대한 책입니다). 일부러 그런 의도를 갖고 쓰기 시작한 것은 아니었지만, 질병이 아닌 무언가에 대한 책을 쓰고 싶기도 했습니다. 자꾸만 저를 질병으로 환원하는 듯한 저의 질병으로부터 좀 거리를 두고 싶었거든요. 하지만 질병을 회피하지는 않으려고 합니다. 지금 하고 있는 연구도 질병과는 무관하지만, 내년부터 질병과 관련된 작업들을 계획 중입니다. 질병을, 질병을 부정하고 질병 때문에 힘들어하는 나를 직면할 용기를 책을 쓰면서 얻었습니다. 저를 질병으로 환원하는 사회 때문에 그 용기를 잃진 않으려고 합니다. 앞으로는 제 질병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제 질병 경험에서 출발해서 다른 이들의 질병 경험에 닿는 글들을 써보려 해요. 아무래도 전공이 문화인류학이니까 인터뷰도 하면서요. 그게 질병 서사를 확장하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