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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품과 잡종의 아카이브, 감염의 미학

발행처
합정지구
간행물
<나를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그리고 우리*는> 전시 도록
분야
예술
퀴어
장애
비평
분류
비평
URL
권호
발행일
2024/01/25
공간을 언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가 있다. 공간은 비선형적이지만,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선형적이다. 소리와 소리 사이, 글자와 글자 사이에는 순서가 존재한다. 그러나 공간에서 순서는 미리 정해져 있지 않다. 작품들 각각에 대한 설명을 찾아보기 어려워서 사전 설명 없이 전시 공간에 들어가면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하나의 작품인지 다소 헷갈리고, 어쩌면 전체가 하나의 작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도 드는 이 전시의 구조를, 나는 일단 안내문에 적힌 작품들에 매겨진 번호와 지상과 지하의 위계를 바탕으로 선형화한다. 이것은 뒤늦은 음성해설 대본 혹은 대체 텍스트이며, 동시에 이 짧은 글 안에서 비평을 개념화하고 실행하기 위한 도구다.
추운 겨울의 바람을 맞으며 대로변으로부터 골목으로 들어가면, 좌측에 있는 작은 건물의 코너에 벽이 모두 유리로 되어 있는 전시 공간이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이 공간을 처음 발견했을 때 보이는 문을 입구라 하자. 입구의 옆에 있는 벽에는 사진 작품이 하나 걸려 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사진들과 스크린 하나, 그리고 정체 모를 고장난 혹은 안 맞는 시계들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다. 공간의 중앙에는 나무로 된 넓은 테이블과 긴 의자 두 개가 있다. 두 의자 중 입구에 서서 내부를 바라보는 기준으로 왼쪽에 있는 것에는 앉아서 스크린을 통해 영상 전시를 볼 수 있다. 테이블 중앙에는 사선으로 직사각형의 구멍이 나 있어서, 뒷면에 글이 빼곡이 적힌 시계의 일부분이 박혀서 고정되어 있다. 시계의 양옆에는 아주 오래되어 종이가 누렇게 변한 노트가 하나씩 놓여 있다.
입구의 대각선 반대 방향에 있는 출구로 나가면, 벽에 지하에도 전시가 이어진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다소 가파르고 좁은 계단을 내려가면 어두운 지하 1층으로 들어갈 수 있다. 내려가면 바로 앞에 문이 있고, 옆에는 이전 전시들의 도록과 안내문들이 전시되어 있다. 문을 열면 정면에 영상이 재생되고 있는 스크린 두 개와 공간을 절반보다 조금 더 채우고 있는 트램펄린이 있고, 공중에 매달려 있는 시계가 보인다. 시계를 따라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다른 멈춘 시계 하나와 한 자리에서 초침이 탁 탁 소리를 내며 진동하는 시계가 있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스크린에서 나오는 빛이 벽을 비춘다. 고개를 아래로 조금 내리면 낙엽에 둘러싸인 검은색 캐리어와 거기에 기대어 있는 스크린, 그리고 앉아서 영상을 볼 수 있는 의자가 있다.
전시 안내문과 공간의 구조에 특정한 순서가 이미 주어져 있다고 해서, 시간 문제로 영상 전시 두 편을 먼저 보기 위해 지하부터 내려갔다가 올라온 내가 전시를 잘못 본 것이 되지는 않는다(감상과 비평은 원래 우연적이다). 작품들은 관객의 머릿속에서 뒤죽박죽 엉망진창으로 뒤섞이고, 관객은 그것을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배치하고 의미를 부여한다. 엉망진창이던 정보와 감각들에는 질서가 부여된다. 이처럼 비평이란 기본적으로 정보와 감각들에 질서를 부여함으로써 위계화된 배치를 만드는 행위다. 주어져 있는 질서는 없고, 모든 질서와 순서는 사물들의 배치와 그것에 부여하는 의미에 따라 구성되어 간다. 그러한 의미에서 창작과 전시는 이미 하나의 비평이다. 그렇다면 관객이 자신의 비평을 구성한다는 것은 전시로서 이미 주어진 비평의 위계를 해체하고 관객 자신의 배치를 새로이 구성하는 일일 테다. 이 글은 미술에 별다른 조예가 없는 비전문가가 원고에 대한 강박과 전시 감상 과정에서 연속되는 우연의 결합 안에서 얼떨결에 이미 주어진 작품이라는 비평을 거스르면서도 거기에 포획되곤 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비평이 비평자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결과를 제시하기보다, 비평자의 위치와 감상의 과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은 ‘일반인의 감상’과 ‘도록에 실린 글’ 사이에 주어진 위계를 지면이라는 형식 안으로부터 질문하기 위함이다.
나는 작품들을 내가 본 순서대로 일단 다시 배치함으로써 머릿속에 나만의 전시를 구성한다. <귀귀퀴퀴>에 기획과 접근성으로 함께한 나는 <귀귀퀴퀴+-×÷>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궁금해서 합정지구에 도착하자마자 지하로 내려갔다. 거기서부터 출발하자. 나는 일행과 함께 트램펄린에 올라가서 전시를 봤고, 벽의 시계들을 본 뒤에야 영상 작품 <매굴 아니 매실>을 봤다. 그걸 보다가 비로소 떨어진 낙엽들을 인식했다. 공간이 어둡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뒤늦게 나는 1층으로 올라가서 <매굴 아니 매실>과 이어지는 시계들과 노트들을 발견했고, 사진들과 <러브 데스 도그>, 그리고 <futch blues ; dildus interruptus>를 봤다. 첫 방문의 감상으로 충분하지 않았던 나는 이후에도 합정지구에 방문하여 전시를 봤고, 그때부터는 주어진 순서대로 작품들을 감상했다. 그러나 이미 내 머릿속에서 꼬여 버린 순서는 작품들을 받아들이는 방식 자체를 다르게 구성하고 있었다.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그리고 우리*는>이라는 이미 구성된 비평은 나의 머릿속에서 뒤죽박죽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감각과 경합하기 시작한다.
뒤엉킨 감각을 정돈하는 과정에서 나는 지하에 있는 두 작품을 뒤섞는다. 전시 공간 자체에는 작품들 사이의 분리가 불분명하다. 관람하는 자리에 따라 <귀귀퀴퀴+-×÷>와 <매굴 아니 매실>은 동시에 보인다. 적어도 서로 침투한다. <매굴 아니 매실>을 보기 위해 헤드셋을 껴도 <귀귀퀴퀴+-×÷>의 소리가 귀로 들어왔다. <귀귀퀴퀴+-×÷>를 보러 가는 길에 나는 실수로 <매굴 아니 매실> 주변에 뿌려진 낙엽을 밟았다. <매굴 아니 매실>을 보지 않으면, 멈추거나 고장난 시계들은 일관된 서사 없이 자꾸만 거슬리는 이미지를 던져 놓는 <귀귀퀴퀴+-×÷>와도 연결되는 듯 느껴진다. <매굴 아니 매실> 속에서 화자의 할아버지인 종웅이 버려진 사물들을 주워서 아무도 쓰지 않는 공간에 모아둔 ‘버려진 것들의 아카이브’는 하나만 놓고 보았을 때 별 의미가 없고, 모아 두어도 서로 충돌해서 하나의 의미로 수렴하지 못하고, 동시에 혹은 순차적으로 서로를 반박하는 말들과 이미지들로 가득한 <귀귀퀴퀴+-×÷>의 형식적 구성과 유사하게 느껴진다.⁽¹⁾ 두 작품의 경계는 흐려진다. 내 머릿속에는 <매굴 아니 매실 아니 귀귀퀴퀴+-×÷>가 만들어진다(비평과 감상은 원래 우발적이다). 그럼에도, 둘은 어떤 형태의 개별성을 유지하고, 불구하고, 자꾸만 하나로 뭉치려 든다. 하나는 너무 적지만 둘은 너무 많다.⁽²⁾
전시 공간 자체에서 작품들의 구분이 뚜렷하지는 않지만, 밝은 조명은 각 작품의 형태를 도드라지게 함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공간을 세 덩어리로 자르도록 유도한다. 그러나 지하에 먼저 들어간 순간부터 순서는 이미 꼬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 원고를 써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는 나는 1층의 전시들을 <매굴 아니 매실 아니 귀귀퀴퀴+-×÷>와의 연결성 안에서 묶어내고자 시도한다(비평은 자주 의무적이다).
가느다란 사슬로 매달려 바닥에 놓여 있는 글귀를 먼저 본다. 이 사진들이 카메라와 그의 개의 일상에 대한 뒤늦은 기록임을 알게 된다. 개와의 일상을 담고 있는 사진 작품들은 일본이 식민지 조선에서 수행한 생체인류학 및 민속학적 조사 안에서 개의 존재를 발견하는 데로 이어진다. 여기서 개는 사람과 같은 방식으로 조사되고 기록되었으며, 인간에 대한 조사와 마찬가지로 내선일체의 생물학적 근거를 마련하는 데 사용되었다. 나아가 근대화 과정에서 서구의 ‘애완견’ 개념이 들어오면서, 통제되지 않는 위험한 개를 가려내기 위해 ‘광견병’과 ‘들개’가 활용되었다. 개들은 집에 갇히거나, 가죽으로 자원화되었다. 마치 집에 갇히거나 시설의 머릿수로 자원화된 장애인들처럼. 동물원을 보여주면서 조선인이 박람회에 전시된 사실을 이야기하거나, 동물들의 박제로 가득한 박물관을 보여주면서 문명 이전의 관계들을 상상하는 방식으로, <러브 데스 도그>는 인간과 개, 나아가 인간과 인간 아닌 동물들 사이의 경계를 질문한다.
액체, 털, 분비물, 피, 침, 콧물, 정액. <futch blues ; dildus interruptus>에 포함되는 거울과 옷걸이의 프레임은 이처럼 더럽고, 지저분하고, 정돈되지 않은 것들을 상기한다. 특히 그것은 인간에게 속해 있으나, 인간으로부터 나와서 이제는 인간이 아닌 것들, 일종의 인체유래물을 상기한다. 이렇게 ‘제자리’에서 벗어난 더러운 물질들에 둘러싸인 거울에 작품을 보는 나의 모습이 비친다. 반대편에는 상의를 탈의했거나 직선적인 몸 혹은 옷들이 강조되는 거울 셀카들과 ‘예쁜’ 얼굴의 남자 연예인들의 사진, 혹은 치마나 스커트를 입은 남자 연예인들의 사진들이 뒤죽박죽 붙어 있다. 펨(femme)과 부치(butch) 사이의 ‘풋치(futch)’는 ‘예쁨’과 ‘잘생김’ 사이 어딘가에서 진동하는, 퍼포먼스에서 동경의 대상으로 등장하는 ‘소년미’와 겹쳐진다. 유방이 드러난 사진들은 피어싱이 꿰어진 프레임의 일부가 유방처럼 보이도록 만드는 듯하다. 이때 거울 프레임의 일부를 유방으로 보이게끔 하는 것은 오히려 그것에 시선을 집중시키는 피어싱이고, 음경의 부재를 인식하게 하는 것은 딜도다. 태초에 존재한 것은 음경이 아닌 딜도였다는 프레시아도의 말처럼. 퍼포머들은 거울 앞에서 옷과 왁스, 테이프, 화장품 등의 사물들을 통해 자신을 특정한 모습으로 변형한다. 자신이 되고 싶은 모습, 그리고 사회가 허용하지 않는 모습으로. 그렇게 인간으로부터 나오는 인간 아닌 물질들 사이에서, 인간적인 것을 대체하거나 변형하는 인간 아닌 사물들이 부각된다. 인간 바깥으로 추방된 퀴어는 비인간 사물들을 동원함으로써 더욱 인간으로부터 벗어난다. 펨과 부치, 예쁨과 잘생김에서 출발하는 질문은 인간과 비인간 사이로 나아간다(감상은 때로 비약적이다). 당연하게도, 태초에 비인간이 있었다. 비인간은 인간에 선행하며, 비인간은 인간의 기원이다.⁽³⁾
비인간과 함께 사는 일, 비인간에 의해 나의 생각과 몸이 바뀌는 것은 비인간이 되는 일이다. <futch blues ; coitus canis>⁽⁴⁾는 자신의 일상 속 가장 가까운 친밀한 대상, 혹은 친밀성을 매개하는 대상들로부터 출발해서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경계를 질문하기에 이른다. <매굴 아니 매실 아니 귀귀퀴퀴+-×÷>가 버려진 것들의 아카이브였다면, <futch blues ; coitus canis>는 더러운 잡종들의 아카이브다. 내 인생을 망치러 온 폐품들과 잡종들. 현실을 직시하게 함으로써 나와 너를 불행하게 하는 ‘우리’의 구원자. ‘우리 아닌 것’과 ‘우리 아닌 것이 아닌 것’이 있는 건가? ‘우리 아닌 것이 아닌 것’은 뭐지?⁽⁵⁾ 그렇게 만들어지는 <매굴 아니 매실 아니 귀귀퀴퀴+-×÷ 아니 futch blues ; coitus canis>, 그리고 석연치 않은 ‘우리*’. 하나는 너무 적고, 넷은 오직 하나의 가능성에 불과하다.⁽⁶⁾
이러한 맥락에서 <매굴 아니 매실 아니 귀귀퀴퀴+-×÷ 아니 futch blues ; coitus canis>는 폐품과 잡종의 아카이브이며, 그 안에서 벌어지는 것은 버리기와 줍기, 그리고 수간이다. 버리기는 산 것을 죽은 것으로 만드는 이행이고, 줍기는 죽은 것을 다시 살리는 이행이다. 수간은 인간과 비인간 동물 사이의 경계를 흐리는 혼란이다. 이행과 혼란은 이도저도 아닌 모호한 상태다. 그런 의미에서 폐품과 잡종의 아카이브는 경계 넘기, 경계 흔들기, 경계의 위치를 바꾸기와 같은 것들을 포함하는 그 자체로 역동적인 하나의 리미널리티(liminality)이고, 이 전시가 이루어지는 기간 동안 합정지구는 그러한 이행과 혼란, 버리기와 줍기와 수간이 벌어지는 하나의 리미널 스페이스(liminal space)였다. 더러운 것은 끈적거려서 닿으면 묻는다. 폐품과 잡종은 전염성이 강하다. 위생학과 방역에 기대는 대신 취약해지고 감염당하라. 전시 공간은 보균자들의 접촉 지대(contact zone), 아니 감염 지대(infection zone). 나도, 너도, 우리도 없다. 언제나 우리*뿐이다. 혼란 속에서 쾌락을 찾아라. 버려진 것들, 버려질 법한 것들, 더러운 잡종들을 모아서 그것들이 서로 뒤엉키게 하는 폐품과 잡종의 아카이브를 신주 모시듯 하는 이들에게 복이 있나니.⁽⁷⁾
⁽¹⁾ ‘쓰레기장’이 아니라 ‘버려진 것들의 아카이브’인 이유는 <매굴 아니 매실>에서 종웅이 사물들을 줍는 순간 그것은 ‘쓰레기’가 아니기 때문이며, 종웅은 버려진 것들을 수리하거나 조합해서 새로운 가치와 의미를 창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퀴어이론가 주디스 잭 핼버스탬(Judith Jack Halberstam)은 서로 어울리지 않거나 쓸모 없다고 여겨진 방법론들 혹은 지식들을 줍고 조합하여 새로운 지식이나 정보를 생산하는 퀴어 이론의 방법론을 ‘폐품수집가의 방법론(Scavenger methodology)’으로 이름 붙였다. 나는 이처럼 버려진 것들을 모아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것이 ‘불행’으로 묶여서 주변화되고 비가시화된 삶과 감정들을 모으고 그 안에서 ‘부적절한 방식으로 행복할 자유’를 발견하는 사라 아메드(Sara Ahmed)의 ‘불행 아카이브’와 맞닿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버려진 것들의 아카이브’는 그러므로 이 개념들의 결합을 위한 하나의 시도다. 이와 관련해서는 사라 아메드, 『행복의 약속』, 성정혜·이경란 옮김, 후마니타스, 2021과 주디스 핼버스탬, 『여성의 남성성』, 유강은 옮김, 이매진, 2015를 참고하라.
⁽²⁾ “타자됨은 다양해지는 것, 분명한 경계가 없는 것, 너덜너덜해지는 것, 실체가 사라지는 것이다. 하나는 너무 적지만 둘은 너무 많다.” 도나 해러웨이, 「사이보그 선언」, 『영장류,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 황희선·임옥희 옮김, arte, 2023, 321쪽
⁽³⁾ “대항성은 태초에 딜도가 있었다고 단언한다. 딜도는 음경에 선행한다. 딜도는 음경의 기원이다.” 폴 B. 프레시아도, 『대항성 선언』, 이승준·정유진 옮김, 포이에시스, 2022, 44쪽
⁽⁴⁾ 작품 <futch blues ; dildus interruptus>의 제목에 등장하는 ‘dildus interruptus’는 폴 프레시아도의 『대항성 선언』의 2장 대항성의 역-실천들(Countersexual Reversal Practices)에 등장한다. 이 장은 딜도기술학(Dildotectonics)을 다루고 있다. 이는 신체를 표면과 영역, 즉 딜도의 변위와 배치의 장소로 간주하는 것을 전제로 딜도의 형태와 형성, 그리고 활용을 다루는 대항과학으로, 딜도가 성/젠더 시스템에 가하는 변형의 위치를 알아낸다. 여기서 딜도는 단지 음경을 대체하는 것을 넘어, 음경을 중심으로 하는 남성중심적이고 이성애규범적인 섹슈얼리티 시스템의 근간을 질문할 수 있도록 하는 비판적인 혹은 치명적인(critical) 도구로 의미화된다. ‘dildus interruptus’는 이 중 ‘활용’을 다루는 절에서, 한 명의 남성이 딜도가 달린 힐을 양쪽 발에 신고, 이를 자신의 항문에 삽입하고자 하는 퍼포먼스를 다룰 때 등장한다. “그의 다리 사이에서 딜도들의 왕래가 일어난다. 힐에 매달린 딜도들은 그의 항문에 삽입하려고 다툰다. 딜두스 인테르룹투스. 매 순간. 어떤 딜도도 그의 항문을 완전히 소유하지 못한다. 그의 항문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쓰리썸 성교다. 아니 그것은 정말이지 성교가 아니다. 그들은 자위한다. [그것도] 아니다.” 이것은 남성이 성관계(coitus) 중 사정 직전에 삽입을 멈춰서(interruptus) 임신 가능성을 낮추고자 하는 행위를 의미하는 ‘coitus interruptus’의 변형으로 추정된다. 즉, ‘dildus interruptus’는 “딜도들이 끼어든다”가 아닌, “딜도를 멈추다”로 번역할 수도 있으며, 이때 딜도잉은 성관계를 이미 대체한 것이 되고, ‘dildus interruptus’는 딜도들 사이의 관계보다 딜도들과 항문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된다. 이것은 딜도라는 비인간 사물을 통해 한 명의 인간이 비인간을 동원하여 자기 자신의 몸과의 관계를 재정립함으로써 성교와 자위라는 성관계의 이분법을 허물고자 하는 문장이 된다. 그런 맥락에서, <futch blues ; dildus interruptus>와 <러브 데스 도그>를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 때 중요한 것은 비인간을 통해 인간의 몸, 그리고 인간의 관계를 재고하는 것이다. 페미니스트 과학철학자 도나 해러웨이는 「사이보그 선언」을 통해 이분법들을 허무는 사이보그가 인간과 다른 생명체 사이에 단단한 결합을 만들어내는 행위로 “수간(bestiality)”을 등장시킨다. 나는 프레시아도가 자연과 문화의 경계를 질문하는 해러웨이의 사이보그 정치를 섹슈얼리티로 확장하고자 한다고 언급한 것을 따라, 개에서 출발하여 인간과 비인간 동물 사이를 질문하는 <러브 데스 도그>를 ‘수간’을 암시하길 바라며 ‘성관계(coitus)’와 ‘개(canis)’를 합쳐 ‘coitus canis’로 변형하고, 내 머릿속에서 뒤죽박죽 하나가 된 두 작품을 <futch blues ; coitus canis>로 부른다. 이와 관련해서는 폴 B. 프레시아도, 『대항성 선언』, 이승준·정유진 옮김, 포이에시스, 2022, 27~28쪽과 78쪽, 그리고 도나 해러웨이, 「사이보그 선언」, 『영장류,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 황희선·임옥희 옮김, arte, 2023, 276쪽을 참고하라.
⁽⁵⁾ <귀귀퀴퀴+-×÷>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직후 다음과 같은 대사가 나온다. “‘퀴어’와 ‘퀴어 아닌 것’이 있는 건가? ‘퀴어 아닌 것’은 뭐지?”
⁽⁶⁾ “사이보그 신체는 통합적 정체성을 추구하지 않기에 종말 없는 (또는 세계가 끝날 때까지 유효한) 적대적 이원론들을 발생시키며, 아이러니를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하나는 너무 적고, 둘은 오직 하나의 가능성에 불과하다.” 도나 해러웨이, 「사이보그 선언」, 『영장류,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 황희선·임옥희 옮김, arte, 2023, 326쪽
⁽⁷⁾ 이 문장은 전시 작품 <그의 일기장 속 문장들엔 마침표가 없었고>와 <futch blues> 퍼포먼스에 나온 문장을 결합한 것이다. <매굴 아니 매실>에서 이어지는 1층의 전시에서 중앙의 테이블에 놓여 있는 종웅의 경력 일기 맨 앞 장에는 이 노트의 기록을 “신주 모시듯” 하라는 당부가 적혀 있다. 2024년 1월 11~12일에 이루어진 <futch blues> 퍼포먼스에서는 ‘끼순이’, ‘부치’, ‘장애인’, ‘성노동자’ 등을 하나하나 언급하며 “복이 있나니.”라고 이들을 축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