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정훈·정보영 선생님의 발표에 대한 토론문
이 발표는 ‘감각적인 것의 분할’과 ‘상호교차성 페미니즘’을 이론적 틀로 삼아 예술과 정치가 불가분한 장애여성 문화예술의 한 장면을 분석하고 있다. 한국에서 문화산업이 지원과 육성의 대상으로 바뀐 2000년대 이후의 상황에서 관련 예산의 삭감과 조정을 두고 벌어지는 논쟁들, 그리고 사회운동 자체의 시장화 혹은 신자유주의화를 고려할 때, 문화예술이라는 장에서 소수자의 정치가 어떻게 가능해지는가에 대한 고민은 지극히 시의적이다.
이 연구는 장애여성들이 자신들의 장애와 섹슈얼리티에 연관된 억압을 인식하는 과정을 재현과 비평의 문제로 다루고 있다. 장애여성공감은 한국의 영화, 드라마, 소설이 장애여성을 사회의 미적 기준에서 미달하거나 성적 자기결정권을 결여한 존재로 재현하는 점을 지적하며, 이것이 장애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구성할 뿐 아니라 장애여성의 현실과도 거리가 멀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여기서 억압의 인식은 비평자로서의 장애여성이라는 주체와 연결된다. 이러한 비평은 장애여성들이 당사자로서 직접 무대에 서는 연극 공연을 통해 감각적인 것을 둘러싼 미학의 정치로 이어진다.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드러내는 것, 그럼으로써 장애 극복 서사나 기존의 연극이 전제한 비장애 신체를 넘어서는 것이다. 이를 만들어내는 과정은 장애여성 당사자들의 힘기르기와 자신들 사이의 차이, 그리고 다른 소수자들과의 연대를 통한 횡단의 정치로 이어진다. 여기서 정체성은 단일하고 고정된 개념이 아니라 유동적이고 열린 개념이 되고, 이것이 장애여성공감의 예술-정치가 지향하고 이루어낸 바라는 것이 연구의 결론이다.
본 토론문은 인류학을 전공한 질적 연구자이자, 2020년 질병권 시민연극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에 시민 배우로 참여한 사람으로서, 해당 발표가 바탕을 둔 연구를 공연예술의 물질적 조건에 대한 고려를 통해 좀 더 구체화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토론자는 이 연구의 의미나 결론에 어느 정도 동의하면서도, 여러 해결되지 않은 질문을 안게 되었다. 그리고 이 질문들은 대부분 이 연구의 분석 대상이, 비장애인 미학도가 춤추는허리의 공연을 보고 작성한 감상 하나를 제외하면, 당사자들이 장애여성공감의 소식지 <공감>과 <숨은독립찾기>, <마침>, 웹페이지에 작성하거나 발표한 글, 혹은 장애여성공감의 활동을 기록한 책으로 한정되어 있다는 데서 기인한다. 당사자들이 생산한 자료를 분석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으나, 이때 분석 대상이 되는 단체 장애여성공감은 기본적으로 정치적 목적을 지니고 설립되었고, 정치적 목적으로 활동하는 사회운동 단체이고, 실제로 논문에 인용된 자료들에서도 활동의 정치적 의미를 스스로 해석하고 기록하고 있다. 해당 연구는 공연의 내용이나 연극, 합창이라는 형식보다는 공연에 대한 장애여성공감 구성원들의 자체적인 평가를 분석하고 있으며, 외부의 평가 또한 미학을 전공한 사람 1인의 비평 일부만을 분석하고 있다. 그러한 맥락에서 이 연구는 장애여성의 예술 활동에 대한 분석이기보다, 장애여성의 예술 활동을 정치적 행위로 의미화하는 당사자 담론에 대한 분석에 가깝다.
토론자는 장애여성공감의 사례를 중심으로 예술 활동이 정치가 되는 과정을 보고자 하는 이 연구의 의도를 구체화하고자 분석 대상의 확장으로 사례에 대한 두터운 기술이 가능해질 때 연구의 실천적 함의 또한 더욱 선명해질 것이라고 제안한다. 예술 활동은 작품의 창작 이후 그것의 감상과 비평을 통해 정치적 행위가 되기 이전에, 오히려 생산 과정 자체가 이미 정치적 행위가 되며, 이 지점에 대한 구체적인 탐구는 이후 다른 장애여성, 나아가 소수자들의 문화예술 실천에 참조점이 될 수 있다. (조건과 과정을 포함하는 의미에서) 생산은 운동의 당사자들이 놓인 물적 조건에 강하게 구속된 상태에서 이루어지고, 그것을 벗어나기보다 거기에 도리어 천착함으로써 더욱 발본적인 문제를 제기할 수 있게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문화산업의 신자유주의화와 관련지을 때, 이러한 질문이 가능하다. 비판의 대상은 영화와 드라마였는데, 왜 대응은 연극, 합창과 같은 공연이 되었는가? 전파 속도와 범위 및 아카이브의 차원에서 비교적 약할 수밖에 없는 후자의 형태로 문화예술의 장에 개입한다는 것은 어떤 (불)가능성을 내포하는가? 매체의 불일치는 자본 혹은 투자 가치의 문제가 될 수 있다. 자본이나 투자 가치의 문제는 이들이 누구/무엇을―공연장, 정부 기관, 시민, 민간 재단, 제작사, 카메라와 전문인력, 방송국 등―자신의 예술 활동에 동원할 수 있을지를 결정하며, 매체는 정치적 의도나 의미 이전에 동원 가능한 행위자들의 네트워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연극이나 합창 공연은 (그것을 만드는 데 드는 품이 여전히 큰 것과 별개로) 다른 매체에 비해 적은 행위자를 통해 달성할 수 있다. 이러한 지점은 장애여성공감의 예술 활동 다수가 서울시나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같은 정부 기관이나 지자체의 지원 혹은 타 단체의 초청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는 사실과 관련지어 분석될 필요가 있다. 시민회원의 후원만으로 시민단체가 생존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장애여성공감의 예술 활동은 어떤 지원 체계를 통해 가능했고, 이들은 그 안에서 자신의 투자 가치를 어떻게 입증했는가? 이것은 예술 활동을 통한 장애여성의 정치를 어떤 측면에서 가능하게 하는 동시에 제약했는가? 장애여성공감이 오랜 시간 서로 다른 기관들로부터 지원을 받으며 예술 활동을 지속한 것은 해당 단체의 정치 활동과 어떤 영향을 주고받고 있으며, 어떤 행위자들을 더 동원할 수 있게 하고, 어떤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게 하며, 단체에 대한 어떤 이미지를 구성하는가?
정치적 목적만이 아니라 예술 그 자체로도 추구된 장애여성공감의 예술 활동이 정치가 되는 과정에 대한 구체적 분석으로 들어간다면, 작품의 서사뿐 아니라 공연 자체를 어떻게 구성했는지에 대한 자료 분석이 추가로 필요해 보인다. 이것은 순환적이기도 한 이중의 과제, 즉 정치의 미학화와 미학의 정치화를 동시에 추구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이들은 어떤 무대를 선택했으며, 선택의 기준에서는―층고, 너비, 무대와 객석의 높이 차이, 스크린 여부, 조명, 비용, 위치, 소품 등―무엇이 고려되었으며, 이러한 고려는 공연의 어떤 정치적·미학적 목적과 연결되어 있었는가? 장애인의 특정한 몸의 움직임이나 소리, 혹은 이야기를 공연예술로 구성하는 행위자들은 무엇이며, 이것은 해당 공연을 어떻게 프릭 쇼(freak show)와 다른 것으로 구성해 낼 수 있었는가? 그리고 이러한 무대장치들의 작동은 어떻게 무대 위에 서는 몸들과 조율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어떤 타협들이 이루어졌는가?
연구에서 언급하듯, 당사자들이 ‘모이는 데 10시간, 화장실 가는 데 50시간, 밥 먹는 데 100시간이 걸린다’고 농담할 만큼의 신체적 부대낌, 그리고 그것을 조정하는 구체적 과정이야말로 장애여성의 예술과 정치가 분리될 수 없는 장면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다. 장애인이 문화예술의 생산자가 되기 어려운 가장 큰 이유는 비장애인의 몸을 전제한 무대 이전에, 무대에 설 수 있는 몸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있으며, 공연을 준비하며 겪게 되는 불구의 시간(crip time)은 비장애중심적 무대가 ‘전제’이기보다 ‘결과’임을 깨닫게 하는 어떤 불화의 계기이기 때문이다. 불화를 통한 정치는 몫 없는 자의 몫을 확보하는 일이고, 연구에서 드러나듯 어떻게든 공통적인 것을 구성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하지만 장애여성들 사이의 차이가 드러나고 조율되며 장애여성들이 자신의 몫을 확보하는 과정은 상세히 분석되기보다 당사자들의 설명으로 갈음되고 있다. 장애여성들 사이의 물질적 부대낌을 통해서만 구성될 수 있는 저항의 역량, 그 부대낌을 조율하는 지지부진한 과정을 통해서만 구성될 수 있는 공통적인 것과 확보될 수 있는 몫이 있으며, 이 지점에 대한 구체적 해명은 문화예술을 크립하게 만드는(cripping) 과정을 통해 장애여성의 예술 활동이 정치가 되는 장면과 의미를 더욱 구체적으로, 풍성하게 해석할 수 있게 할 것이다.
현장에서 덧붙인 것 간략히
1.
예술만 하는 사람들도 예술 지속하는 것이 어려운 한국에서 장애여성공감이 20년 이상 예술활동을 이어나간 것 자체가 이미 지난한 정치 아니었을까? 횡단적 연대 이전에 교차적 차별을 경험하는 이들로서?
2.
장애여성의 예슬이 어떻게 정치가 되느냐고 했을 때, 장애예술과 장애운동에 대한 리뷰가 좀 더 들어가야 이 연구가 장애여성공감을 어느 흐름에서 분석하고자 하는지가 선명해질 것 같다.
3.
정치적 도구만이 아니라 그 자체로 예술로서도 추구되었다고 했는데,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레드어워드 시상 이유가 딱 그거였다. 근데 정치적 도구만을 위한 예술과 예술로서도 추구된 예술을 어떻게 구분하는가? (랑시에르에 따른다면 애초에 그게 구분 가능한 문제인가?) 이걸 구분할 수 없다면, 이 논문의 설명은 장애여성공감이 아닌 단체나 사회운동과 예술 사이의 관계 일반에 대한 설명이 아닌가? 비교군이나 사례가 없어서 이 지점이 해명되지 않는다.
4.
사회운동 단체들은 엄청나게 바쁘고 피로하고 재정은 열악한데, 특히 품이 많이 드는 예술 활동을 왜 하는 건가?
5.
기존 장애예술의 흐름을 사례 등의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너무 쉽게 단순화하지 않았나? 마치 마이클 올리버가 장애학을 주창하기 위해 기존의 장애 이론 논의 대부분을 ‘의료적 모델’로 묶어버린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