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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론을 넘어 명료한 질문으로 사회를 파괴하기

발행처
인문사회과학출판인협의회
간행물
아름다운 서재
분야
청년
대중문화
인문
사회
에세이
비평
분류
매거진 기고
URL
권호
18
발행일
2022/03/01
세대론을 넘어 명료한 질문으로 사회를 파괴하기
한창 온갖 언론들이 ‘이대남’이라는 단어를 사방으로 퍼 나르던 시기, ‘20대 남성’들을 모아 조금 다른 이야기를 꺼내 보자는 대담을 제안 받았다. 취지는 이해했지만, 나는 제안을 거절했다. 다른 이야기가 필요하다는 것에는 동의했지만, 내가 그러한 기획 안에서 ‘이런 이대남도 있다’, ‘모든 이대남이 저런 것은 아니다’ 같은 방향으로 미끄러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함께, 세대론에 대항하는 새로운 전략이 필요하다는 고민이 있기 때문이었다.
‘세대’는 사람들을 구분하여 이해할 때 가장 자주 사용되는 척도 중 하나이지만, 실은 굉장히 모호하다. 이를테면, 1980년대 초부터 2000년대 초에 태어난 사람들을 통칭하는 ‘MZ세대’는 그 자체로 사실상 무의미할 정도의 넓은 범주를 자랑한다. 정작 ‘MZ세대’라고 불리는 이들은 그 단어의 뜻조차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다(나도 MZ세대라는데, 이 단어가 무슨 의미인지 최근에 검색해 보고서야 알았다).
대선을 앞둔 요즘, 정치인들의 최대 과제는 ‘젊은 층’의 표를 가져오는 것으로 보인다. 지긋지긋할 정도로 ‘이대남’, ‘MZ세대’ 같은 말들이 들려온다. 그런데 이런 명칭들은 따져 보면 닳고 닳은 ‘청년’이라는 말과 별반 다르지 않다.
너무나도 공허한
박이대승은 ‘청년’이라는 말이 합의된 정의를 토대로 사용되는 ‘개념언어’가 아니라, 그 자체의 의미는 뚜렷하지 않은 대신 어떤 사람들을 특정 정치적 진영으로 포섭하기 위해 사용되는 ‘정치언어’에 가깝다고 지적한다. 정치권과 언론의 연결망이 ‘이대남’ 같은 단어를 반복적으로 사용하여 20대 남성들을 실체가 불분명한 하나의 집단으로 묶어내면서, 20대 남성은 마치 이미 보수화된 것처럼 여겨지기까지 하는 데서도 이를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젊은 세대를 뭉뚱그리는 명칭의 가장 큰 문제는 그것이 소위 ‘청년’들이 겪는 수많은 문제 또한 뭉뚱그려 버린다는 점일 것이다. 대학 입학, 군 생활, 취업 준비, 주거 등은 진영을 막론하고 대표적인 청년 문제로 여겨지는데, 부모님으로부터 집을 하나 받고서 결혼한 나의 친구와 장애인이 취업하기 힘든 한국 사회에서 언제쯤 취직하고 자취라도 시작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나의 다른 친구 사이에는 아주 큰 격차가 존재한다. 대학 입학은 차치하고 고등학교를 무사히 마치기 힘든 ‘청년’들도 많으며, 나처럼 질병 때문에 취업 준비는 애초에 자신의 삶과 큰 관련 없는 일인 경우도 많다. 여성들은 집을 마련한다고 해도 혼자 살기 불안한 사회다. 이런 사례들은 수없이 나열할 수 있다.
이처럼 빈곤, 노동, 장애, 성별 등의 개별적인 축으로 분석하고 대응해야 할 문제를 모두 ‘청년 문제’로 묶어서 그것을 사회 전체가 아닌 ‘청년’만의 문제로 축소하는 현상을 박이대승은 ‘청년 범주에 의한 청년의 배제’라고 부른다. 당연하게도, 노동시장 전체를 바꿔야 젊은 사람들의 취업도 해결할 수 있고, 부동산 관련 제도와 정책 전체를 갈아엎어야 젊은 사람들의 주거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정치인들이 내놓는 청년들의 직업 교육과 대출 지원 같은 공약들은 사회 전체의 변화와는 관련이 없으며, 따라서 결국 ‘청년 문제’ 또한 해결되지 못한다. 청년이라는 호명이 오히려 청년들을 사회에서 계속해서 배제하게 되는 것이다. 청년 없는 청년, MZ세대 없는 MZ세대라니…….
너무나도 ‘정상적인’
이런 세대론의 또 다른 중요한 문제는 그것에 언제나 이 사회가 정상적이라고 규정하는 생애주기가 전제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10대에 공부하고, 20대에 대학을 나와 취직하고, 30대부터 본격적인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60대에 은퇴하는 것과 같은 삶의 경로에서 벗어나는 몸들은 같은 시기에 태어났더라도, 20~30대여도 ‘청년’, ‘MZ세대’, ‘이대남’으로 호명되지 못한다. 세대론에 일하는 빈곤한 노인도, 일하지 못하는 아픈 청년도, 시설에 갇힌 10대 장애인도 없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세대론의 전제가 사회적 정상성이기 때문에, 세대론은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문제들을 짚어낼 수 있을지언정 그 근본적 원인으로 나아가기 힘들다. 그 관점에서 사회적 차별에 대한 대응은 차별하는 권력이나 구조의 성찰보다는 피해자의 정상화 혹은 주류화(mainstreaming)와 같은 대증요법으로 이야기된다. 달리 말하면, 세대론은 각기 다르게 다뤄져야 할 문제를 시기 혹은 연령대, 생애주기의 문제로 뭉개버림으로써 더 깊은, 혹은 더 넓은 문제 제기를 사전에 차단하고 대안을 축소한다. 사회는 언제나 우리를 에워싸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어딘가로 숨어 버린다.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얼마 전,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한 심리상담사가 주축이 되는 TV 토크쇼에서는 MZ세대와 기성세대의 차이로 대중교통에서의 태도를 언급했다. MZ세대는 버스나 지하철에서 스마트폰을 보며 자기 할 일만 하지만, 기성세대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통화한다는 것이다. 이런 ‘차이’ 때문에 ‘세대갈등’이 생겨서 소통이 어려워진다나. 그러나 내가 평생 버스나 지하철에서 들은 “어~ 김 사장!”과 같은 우렁찬 목소리는 하나같이 노인 남성의 입에서 나왔다. 소위 ‘개저씨’를 ‘기성세대’로 빠르게 치환하여 성별이라는 변수를 누락시킨 이 사례는 차별적인 사회의 문제를 나이 차이에 따른 차이로 바꾸어 성차별적 사회를 감춘다.
‘이대남’과 ‘이대녀’의 대립 구도는 이러한 호명 방법의 문제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이는 계속해서 생산·유통된 ‘젠더 갈등’ 담론의 또 다른 변주로, 성차별을 교묘하게 흐린 ‘젠더 갈등’을 다시 세대와 결합하여 문제를 더욱 납작하게 만든다. ‘젠더 갈등’ 패러다임에서 ‘여자만 힘든 거 아니다’라고 말하던 남성들은 이제 이대남으로서 ‘남성이 힘들다’라고 말하며 ‘피해자’의 위치를 선점하기에 이른다. 논의의 스케일이 사회 전체에서 20대로 축소되면서 두 집단의 발화가 대등한 위치에 있다는 착각까지 자아내는 것이다.
이처럼 세대론은 그 구조상 소수자 문제, 아니 정확히 말하면, 누군가를 소수자로 만들어내는 사회의 문제를 가린다. 그것이 ‘청년’이든, ‘MZ세대’이든, ‘이대남-이대녀’이든 원리는 마찬가지다. 세대론이란 결국 ‘사회’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에게는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
사회를 파괴해야 한다
하나는 세대론을 내파(內破)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청년’이라는 단어를 놓지 않으면서, 사회의 면면들을 그 단어로 포착하거나 바꾸고자 노력한다. 세대론 안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려고 애쓰려는 이들도 그렇다. 이런 시도들이 유의미한 이유는 청년, 세대와 같은 말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의 정의를 따져 묻기 때문이다. 세대론을 재구성하여 오히려 사회의 근본적 모순을 드러내는 데 사용하는 것.
다른 하나는 세대론이라는 프레임 자체를 거부하고, 그것이 포괄하고 있는 문제들이 본래 논의되었어야 할 층위를 찾아 그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청년을 위한 사회를 만들겠다는 이상하고 공허한 약속 대신, 빈곤, 노동, 주거, 장애, 성별과 같은 범주에서 출발하기. 이 두 가지 방법의 공통점은 바로 세대론이 제기하는 문제들이 아니라, 세대론 그 자체를 하나의 문제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이때 비로소 ‘정상’의 안팎에서 다른 이야기의 가능성이 열린다.
이곳에서 제시하고자 하는 다른 접근은 그리 새롭지도, 혁신적이지도 않다. 다만 가장 근본적인 지점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도대체 세대란 무엇인가? 수많은 문제가 세대로 묶일 수 있는가? 여기서 주요한 의제로 떠오르는 것은 무엇이며 가려지는 것은 무엇인가? 누가, 혹은 무엇이 해를 입고, 보호받고 있는가? 지금의 사회가 누구의 희생을 밑절미 삼아 지탱되고, ‘발전’하고 있는지 묻는 이런 질문들 안에서 정상적인 생애주기 안에서 시민 혹은 국민으로 함께 지역사회에서 살아갈 수 없는 존재들이 드러난다. 사회는 흔들리기 시작한다.
문제를 흐릴 때 보호받는 것은 사회다. 명료한 질문으로 우리는 바로 그 사회의 윤곽을 드러내고 그것을 차근차근 파괴해야 한다. 이 책임을 떠안을 다음 ‘세대’는 없다. 세대가 아닌 사회다. 존엄할 권리에 대응하는 유일한 의무는 질문할 의무다. 이것은 지금 당장 이 사회를 살아가는 나와 당신의 몫이다.
안희제 / 작가이자 칼럼니스트. 문화인류학을 공부하며, 장애인의 탈시설과 문화예술 접근성, 질병권 등 몸을 둘러싼 제도와 문화, 사회 변화에 관심이 많으며, 모호한 경계 지점에서 가능성을 발견해내고자 애쓴다. 시사IN, 비마이너, 홈리스뉴스 등에 글을 쓰며, 『난치의 상상력』, 『식물의 시간』을 썼고, 공저서로 『과학잡지 에피』(16호-장애와 테크놀로지), 『아픈 몸, 무대에 서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