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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내부의 혁명

발행처
한겨레
간행물
왜냐면
분야
인문
예술
사회
대중문화
케이팝
팬덤
청년
여성
페미니즘
퀴어
비평
분류
일간지 기고
권호
발행일
2024/12/11
비상계엄이 선포되던 그날 밤, 나는 졸업논문을 쓰다가 얼어붙었다. 계엄이라는 두 글자만으로 이미, 8년 전 광화문에서 물대포 앞에 섰을 때보다 훨씬 두려웠다. 집에만 있었고, 친구에게 공유하던 성명문을 삭제하며 수치스러웠다. 국무회의 의결 결과가 나온 뒤에야 간신히 잠들었다.
지난 6일, 군인들의 움직임이 포착되었고 2차 계엄이 다가올지도 모른다는 경고를 접했다. 유튜브 생중계로 본 군인과 총기들이 다시 떠올랐다. 짐을 챙겨 나가기 전 마지막으로 한 것은 덕질이었다. “우린 길을 만들어”라고 노래하며 밤거리에서 자유롭게 춤추는 퍼포먼스 영상에서 느껴지는 즐거움과 해방감이, 계엄이 우리로부터 박탈할 뻔한 일상처럼 느껴졌다. 눈물이 났다. 최근 놓친 무대 영상이 하나 남았을 때 나갈 시간이 되었다.
발 디딜 틈도 없는 현장에서, 어디로 고개를 돌려도 아이돌 응원봉이 있었다. 반가웠다. 다음 날, 어머니와 나는 각자 응원봉을 챙겼다. 나는 응원봉이 여러개지만 그중에서 가장 길고 화려한 녀석을 골랐다. 이제는 뿔뿔이 흩어진 아이돌그룹의 응원봉을 마지막 콘서트 이후 처음으로 들고 나왔다. 편의점에서 AAA 건전지를 왕창 샀다. 응원봉에 불이 들어왔다. 오늘도 광장에는 사방이 응원봉이었다. 즐거웠다. 편안했다.
집회는 떨리고, 두렵다. 춥고, 배고프고, 다리도 아프다. 신념만으로 오래 견디기는 어렵다. 응원봉은 ‘나’를 아주 친밀하고 익숙한 ‘우리’ 안에서 발견할 수 있게 해줬다. 근처에서 응원봉을 들고 열심히 구호를 외치던 사람이 갑자기 나에게 와서 조용히 눈인사를 하고 갔을 때, 나는 그것이 내가 들고 있던 응원봉 때문이라고 직감했다. 온갖 아이돌 ‘논란’들 속에서 서로를 증오하곤 하는 우리가 광장에서는 하나처럼 느껴진다는 것이 신기하고 기뻤다. 나와 같은 응원봉을 든 사람을 마주쳤을 때는 거의 소리를 질렀다.
왜 하필 응원봉이었을까? 우리에게 응원봉을 흔드는 건 즐거운 일이다. 감동적인 일이고, 힘을 주고받는 일이다. 자주 하고 싶은 일이고, 기다려지는 일이다. 콘서트나 음악방송, 팬미팅에서 쓰기 때문이다. 동시에 응원봉은 너무나도 일상적인 물건이다. 내 방에 언제나 있고, 방에서 혼자서도 컴백을 기다리며 들고 있곤 하니까. 추운 길거리에서 케이팝에 맞춰 응원봉을 흔들며 적절한 타이밍에 구호를 외치는 건 우리가 매일 하는 일이다. 음악방송 녹화를 대기할 때도, 콘서트와 퇴근을 기다릴 때도, 우리는 추운 길바닥이다. 복잡한 응원법을 빠르게 외우고 따라 한다. 문자를 보내서 내 본진이 이길 수 있게 투표한다. 아이돌 팬들은 응원봉을 들고나옴으로써 집회를 익숙하고 즐거운 곳으로 만들어냈다. ‘팬덤 정치’가 멸칭으로 사용되는 동안 아이돌 팬들이 만들어낸 정치의 모습이다.
카메라가 어딜 비추든, 스크린에는 응원봉이 보였다. 중년 남성, 혹은 나처럼 서른살쯤 된 남성이 어색해 보일 만큼, 응원봉을 들고나온 젊은 여성이 많았다. 8년 전 촛불집회는 성추행과 여성혐오적 발언으로 얼룩져 있었고, 지금도 무결하지 않다. 젊은 여성 아이돌 팬들은 응원봉을 들고 서로를 알아보며 국회 앞을 점거하고 광장을 바꾸고 있다. 광장에서 겪은 불안과 배신감을 끌어안은 채 노래하고 춤추며, 여성을 배제해 온 광장을 다시 오고 싶은 즐거운 곳으로 만들고 있다. 두렵고 불편한 이곳을 직접 바꾸겠다는 마음으로. 응원봉은 그런 결의의 표현이다. 이것은 광장 내부의 혁명이다. 게다가 원래 우리에게 연말은 시상식이 끊이지 않는 축제 기간이다. 그걸 너희가 감히 빼앗지 못하게 하겠다. 이희주 작가는 ‘환상통’에 썼다. 아이돌 팬은 아티스트를 쫓아다니지 않고, 먼저 가서 기다리는 존재라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신들이 무시하는 ‘소녀팬’들은 당신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함께 싸우고 살아갈 세상을 다시 짓고 있다. 기특하다고 칭찬할 시간에 뒤처지지나 말고 함께하라. 이것은 탄핵과 정권 교체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여성들 중에서도 ‘헛돈 쓰는 빠순이’로 무시당해온 아이돌 팬들이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빛을 들고나와서 시작된, 정치적 주체의 젠더화된 세대교체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는 언제나 ‘충성스러운 소비자’ 이상의 존재였다.
집회 중 아이돌 소통 앱에 메시지가 왔다. “언니, 우리가 살기 좋은 세상 만들어줄게”라는 팬의 말에 “같이 만들자”라는 다섯 글자로 대답한 내 최애. 눈물이 났다. 긴 싸움이겠지만 하나도 두렵지 않다. 조금은 낯선 궤도를 만나 또다시 헤맨대도, 언제나 우린 서로의 중심일 테니까. 너를 생각만 해도 난 강해지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