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애설이라는 논란
“팬이 너에게 주는 사랑이 부족하니? 당신은 왜 팬을 배신하기로 선택했습니까? 직접 사과해 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하락한 앨범 판매량과 텅 빈 콘서트 좌석을 보게 될거예요.”
“K팝 회사들이 아티스트보다 한국 팬들의 정신질환을 우선시하지 않으면 좋겠다.”
“앞으로 마이들에게 실망시키지 않고 더 성숙하고 열심히 활동하는 모습 보여드리고 싶어요 지켜봐주세요.”
“주가는 장중 한때 7만100원까지 밀리며 52주 신저가를 썼다.”
올해 2월 말부터 3월 초까지, 트위터 실시간 트렌드와 인스타그램 돋보기 온 사방에 익숙한 이름이 올라와서 한참 동안 내려가지 않았다. ‘카리나’라는 이름이었다.
2021년 5월, 유튜브에서 <Next Level>이라는 곡의 뮤직비디오를 처음 봤을 때, 전체적으로 차가운 금속 느낌이 강한 와중에 한 명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SF 영화나 게임에나 나올 법한 유광의 파란색 재킷을 입고 우주선 조종석으로 추정되는 공간에 앉아 있는 그는 검은색 단발 머리를 하고 있었다. SM엔터테인먼트 소속 4인조 걸그룹 ‘에스파(aespa)’의 멤버인 윈터/김민정이었다. 그의 이름은 이미 뮤직비디오를 연달아 스무 번은 넘게 본 뒤에야 처음 알았다.
며칠 지나지 않아 나는 유튜브에 얼굴을 파묻고 뮤직비디오와 음악방송 무대 영상, 소속사에서 자체적으로 만들어서 올리는 예능 등을 밤이고 낮이고 끊임없이 보기 시작했다. 트위터 계정을 새로 만들고, 소통 어플을 다운받고, 앨범과 굿즈를 사고, ……. 그렇게 나는 에스파의 팬, ‘마이(MY)’가 되었다. 이것이 나의 첫 케이팝 아이돌 덕질의 시작이었다. 카리나/유지민은 내 첫 ‘본진’인 에스파의 리더이고, 윈터/김민정과 함께 대중적으로 가장 많이 언급되는 멤버다. 그리고 2024년 2월, 카리나/유지민과 배우 이재욱이 연인 관계라는 소식이 온라인 매체 디스패치를 중심으로 유통되기 시작했다. 2월 말, 이들은 교제 중임을 인정했다. 글 시작부의 인용문들은 모두 이 상황과 관련된다.
날선 말들이 온라인 공간을 휩쓸고 다니기 시작했다. 어떤 이들은 ‘어떻게 팬을 배신하냐’며 카리나/유지민을 향한 비난을 쏟아냈고, 어떤 이들은 ‘연애도 응원 못하는 게 팬이냐’며 이러한 태도를 비판했다. 여기에 대응하여 팬덤 안에서는 카리나/유지민에 대한 태도의 측면에서 ‘진정한 팬’이라는 이름을 선점하기 위한 경쟁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는 SM엔터테인먼트 주가 하락의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열애설’이 보도된 당일부터 주가가 하락을 거듭해 2024년 3월 7일에는 2022년 11월 이후 사상 최저가를 기록했다는 것이다. 카리나/유지민은 사과문을 써서 인스타그램에 올렸지만, ‘사과문에 내용이 없다’거나, ‘팬들이 더 많이 보는 플랫폼에 올렸어야 한다’와 같은 비판을 재차 받기까지 했다. 갈수록 무엇이 핵심인지도 알 수 없었다. 혼란스러웠다.
‘열애설’은 이러한 혼란을 특정한 방식으로 가공한 하나의 결과물이다. ‘연애’ 대신 굳이 ‘열애’라는 말을 사용하는 (연예인들도 미지근한 사랑을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이 수상한 조어는 유명인들의 연애에 대한 (질투심이든 부러움이든 무엇이든) 대중의 감정을 자극한다. 그리고 해당 조어로 지칭하는 상황의 핵심을 ‘연애’로 규정한다. 만약 스토킹에 가까운 취재나 사생활 침해를 통해 정보를 얻은 기자나 그것을 대중에게 공개하기로 결정한 언론사를 문제 삼는다면 이것은 ‘열애설’이 아니라 ‘비윤리적 보도 사건’과 같은 이름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열애설’은 그 자체로 초점화 작용이다. 앞의 사례를 통해 설명하면, 하나의 현상(‘카리나/유지민과 이재욱이 만나서 교제한다는 사실이 언론, 방송을 통해 알려지고 사람들에 의해 소비되는 등의 연쇄’)을 특정한 방식으로 잘라내고(‘카리나/유지민과 이재욱이 만나서 교제한다는 사실’), 핵심을 규정하며(‘아이돌의 연애’), 질문의 범위를 제한한다(‘아이돌이 연애를 해도 되는가’). 물론 이것은 열애설만의 특징보다는 범주라는 개념 자체의 특징이다. 그러나 이 글의 목표는 범주에 대한 보편적인 논의가 아니다. 카리나/유지민과 이재욱의 열애설로 글을 연 이유는 케이팝 아이돌들이 경험하는 논란에서 출발하여 논란과 장르의 관계로 나아가기 위함이다.
열애설은 ‘논란’의 한 유형이다. 논란은 케이팝 아이돌 아티스트들과 관련된 혼란이 처리되는 특정한 방식이다(그렇기에 ‘열애 사실 인정’과 같은 방식으로 사실 관계가 뚜렷해지면 논란은 종결된다). 달리 말하면, 논란은 혼란에 질서를 부여해서 그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드는 하나의 안정화 장치이고, 따라서 패턴 내지는 문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논란은 혼란스러운 현상 안에서 대중과 팬덤, 주류문화와 하위문화 사이를 나누는 경계를 구성하는 작용이다. 동시에, 논란과 관련된 영상이나 게시물에 달리는 댓글 속 ‘팝콘 각’, ‘설레는 댓글창 열기’와 같은 표현들에서 드러나듯, 사람들은 논란을 즐기기도 한다. 논란은 그 자체로 사람들에 의해 소비될 수 있는 하나의 장르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케이팝 아이돌의 논란이 작동하는 방식을 중심으로 장르라는 개념에 개입하고자 하는 하나의 시도다.
장르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이 글은 결국 욕망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좌절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따라서 사랑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장르로서의 논란
기본적으로 논란은 한국 사회에서 유명한 사람들과 관련된 가십을 이해하고 처리하는 상당히 보편화된 틀이지만, 당사자의 위치나 정체성에 따라 양상도 역사도 조금씩 달라진다. 정치인의 논란과 연예인의 논란이 다르고, 연예인의 논란 안에서도 배우의 논란과 아이돌의 논란이 다르다. 여기서 하필 아이돌을 중심으로 구성되는 논란을 본다는 것은 그것을 현재의 케이팝 아이돌 문화의 맥락 안에서 이해하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논란이 하나의 장르, 나아가 하나의 2차 창작이라는 점이 뚜렷해진다. 이렇게 논란이 무엇인지 규명할 때, 논란이 무엇을 하는지 이야기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추리소설로부터 출발하여 음모론을 거친 뒤에야, 우리는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케이팝 아이돌 문화 속 논란의 구조를 파악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논란은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는 하나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와 대도시의 출현, 그리고 계몽주의라는 사회적 맥락 안에서 탄생한 추리소설은 “수수께끼 제시→논리적 추리 과정→수수께끼의 풀기”라는 서사 구조를 지닌다. 여기서 탐정은 ‘합리적 이성’을 통한 논증의 전형을 체화하여 범죄라는 도시의 무질서를 통제하고 해결하는 인물이었다. 음모론은 ‘수수께끼 제시→수수께끼의 풀기→확증편향 강화’의 형태로, 추리소설의 서사 구조를 뒤집고 비틀어 놓은 것이다. 무언가를 수수께끼로 규정하면서도, 그것에 대한 답을 미리 정해둔 채 발견되는 모든 단서를 그 답에 맞추어 얼기설기 배치하여 확증편향을 강화하는 것. 이때 음모론자는 (과학이나 정부 등 권위에 대한 불신에 근거하여) 자신의 주장이 진실이라고 확신하며, 이처럼 해답을 먼저 정해두는 음모론적 확신은 음모론에 동원되는 온갖 근거들이 놓이는 맥락을 구성하는 데 필수적이다. 따라서 어떤 서사를 음모론적이라고 규정할 때 중요한 것은 그 서사의 진위 여부가 아니라 그 서사가 제시되고 전개되는 과정이다.
이러한 음모론적 구조는 최근 케이팝 아이돌 문화의 맥락 안에서 ‘세계관 콘텐츠’에 적극적으로 활용된다. 지금 케이팝 아이돌 문화에서 핵심은 시각적 요소다. 최근 공개되는 대부분의 케이팝 뮤직비디오는 뚜렷한 서사가 없거나, 서사가 있더라도 일관성이 부족하며, 파편화된 이미지들의 배치로 이뤄지는데, 이는 모호한 단서들을 제공함으로써 다양한 해석을 촉발한다. 뮤직비디오뿐 아니라 ‘세계관 영상’, 홍보 영상, 인터뷰, 무대 영상, 음반에 포함되는 콘텐츠나 노래 가사 등에서 발견한 단서들은 팬들에 의해 해석 혹은 이론(theory)이 된다. 이때 세계관 콘텐츠를 전면에 내세우는 소속사들은 자주 세계관의 ‘정답’을 제시한다. 이것은 팬들에게 ‘오피셜(official)’이 되고, 팬들은 모든 단서를 그 정답에 끼워 맞추기 시작한다. 이는 수수께끼를 제시하되 곧 그것을 풀어 버리고, 주어진 정답이 정답인 이유만을 계속해서 강화해 나가는 구조, 즉 음모론적 구조다. 세계관 콘텐츠의 개방성은 소속사가 제시하는 음모론적 확신으로 인해 빠르게 음모론적 구조로 전환된다.
이러한 서사 구조의 확산 안에서 아이돌 논란 또한 하나의 서사로 승인되기 더 쉬워진다. 서로 다른 주제의 수많은 아이돌 논란은 대부분 음모론적 구조를 공유한다. ‘지구 평면설’, UFO와 미국 정부의 관련성과 같은 음모론들이 과학이나 정부 같은 권위에 대한 불신에 기대어 음모론적 확신을 구성하고, 세계관 콘텐츠가 소속사가 제시하는 정답에 근거하여 음모론적 확신을 구성한다면, 아이돌 논란에서는 아이돌과 관련된 도덕의 문제가 음모론적 확신을 구성한다. 아이돌로부터 얻는 행복은 현실의 행복에 대한 부적절한 대체재로 여겨지고, 그렇기에 아이돌 덕질은 도덕적으로도 부적절하다고 여겨진다. 이러한 맥락에서 ‘○○은 학교폭력 가해자다’, ‘○○이 갑질을 했다’와 같은 문장들은 다른 주장들보다 더 개연성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예능 프로그램, 자체 콘텐츠, 인터뷰 영상, ‘짤’ 등에서 발견되는 ‘찌푸린 눈’과 ‘손가락 모양’, 그리고 인터넷 캡처들과 졸업사진 인증 등 인과성을 찾아보기 힘든 단서들을 확고한 근거로 자리매김시키는 것이 바로 도덕을 매개로 구성된 음모론적 확신이다.
이처럼 특정한 서사 구조를 지니고 있고, 분노나 실망과 같은 감정을 촉발하며, 다른 종류의 서사들과 구별되는 특징들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논란은 하나의 장르다. 다소간의 비약을 더하자면, 그것은 일종의 2차 창작이다. 논란은 아이돌들의 성격 등에 대한 해석, 즉 ‘캐해’, 그리고 팬들 사이에서 공유되는 케이팝 아이돌들에 대한 (비)공식적 정보들을 바탕으로 짜깁기되고 소비되기 때문이다.
장르화하는 논란
논란은 케이팝 아이돌 문화 안팎에서 구성된 하나의 장르일 뿐 아니라, 그 자체로 케이팝을 장르화하는 하나의 작용이기도 하다. 이때 무언가를 ‘장르화’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밝힐 필요가 있다. 이것은 논란이 한국 대중음악 안에서 ‘케이팝’의 경계를 구획한다는 말이다. 고유한 문법이 있고, 그 문법 자체를 즐기는 사람들이 있고, 그러한 문법을 계속해서 생산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 문법과 생산자와 소비자가 얽혀서 만들어지는 예술의 공간을 ‘장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논란이 케이팝을 장르화한다는 말의 의미는, 논란이 케이팝 고유의 문법, 그리고 그것의 생산자와 소비자의 경계를 구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도 핵심이 되는 것은 도덕의 문제다. 장르로서의 논란이 도덕의 문제로 성립한 음모론적 구조를 중심으로 정의됐다면, 장르화하는 작용으로서의 논란에서 도덕의 문제는 더욱 중요해진다. 미디어학자 김수정과 김수아는 ‘집단적 도덕주의’를 케이팝의 생산과 소비, 그리고 콘텐츠 내적인 영역 모두를 관통하는 원리로 지목한다. 이것은 “도덕적 범주를 경제적 합리성보다 때론 더 우선시하며, 개인이든 집단이든, 연예인이든 정치인이든 특히 성공하는 한국인들이라면 지녀야 할 가치이자, 정당성의 원천으로 절대화하는 현상”이다. 집단적 도덕주의는 아이돌 연습생의 트레이닝 과정에서 인성 교육의 비중, 유교적 가치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인성’을 상상하는 연예기획사 관계자들의 인터뷰, 케이팝을 소비하면서 아티스트에게 고도의 집단적 도덕성을 요구하는 대중과 언론의 태도, 그리고 ‘무해한 사랑’을 주 소재로 하는 케이팝 가사의 내용 모두에서 드러난다. 이들은 집단적 도덕주의야말로 케이팝이라는 혼종적인 장르 내지는 산업의 ‘한국적’ 특징이라고 분석한다. 즉, 미국의 힙합과 댄스 음악, 일본의 아이돌 문화 등이 결합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다양한 국가의 장르들을 참조하면서 구성되어 가고 있는, 아티스트들도 작곡가 및 작사가들도 국적을 가리지 않는 장르인 케이팝을 ‘한국’ 대중음악이게끔 하는 것은 바로 도덕의 문제라는 것이다.
논란은 바로 이 도덕의 문제를 계속해서 상기하고 갱신하는 과정이다. 여기에는 아이돌 아티스트들에 대한 대중과 언론의 시선뿐 아니라, ‘돌판’과 각 팬덤 내부의 규범이 동시에 작동한다. 최근의 팬덤 문화에서 팬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돌이 얼마나 팬서비스를 많이 하는 ‘효자’ 혹은 ‘효녀’인지 전시하고 자랑하는 동시에 ‘동태 눈깔’을 단죄한다. 이러한 ‘태도 논란’ 혹은 ‘인성 논란’부터 대체로 사실관계가 사법적으로 정확히 밝혀지지 않는 ‘학교폭력 논란’까지, 이러한 논란들은 아이돌은 무엇을 해도 되고 무엇을 하면 안 되는지, 나아가 아이돌이란 어떤 존재인지를 정의해 나가는 과정이다. 그리고 이러한 팬들의 언행이나 마음에는 ‘기이하다’거나 ‘징그럽다’, ‘이해할 수 없다’는 대중들의 말이 들러붙는다. 여기서 나타나는 것은 아이돌과 케이팝의 정의에 대한 팬덤과 대중의 논쟁이다. 이를 계기로 아이돌에게 요구되는 태도, 가치관, 수준 등에 대한 담론이 만들어지고, 결과적으로 케이팝 장르 내에서 용인되는 행동과 가치관, 윤리의 경계가 지속적으로 협상되고 재조정된다. 케이팝 생산자와 소비자, 나아가 그 외부까지 포함하는 모두가 참여하는 이 과정을 통해 케이팝은 고유한 도덕적 정체성을 갖춰 나가면서 하나의 독자적인 장르로 경계를 굳히는 것이다.
이처럼 논란은 청중이라는 거대한 집단 안에 전선을 그어서 적대적 구분으로서의 팬덤과 대중을 구성하고, ‘합리성’을 선점하기 위한 둘 사이의 싸움을 촉발한다. 나아가 팬덤 안에서도 ‘진정한 팬’을 선점하기 위한 싸움이 벌어진다. 논란은 이렇게 사람들 사이에 선을 긋고 분열을 조장하는 동시에, 그렇게 만들어진 각각의 범주를 단단히 굳힌다. 대중과 팬덤의 이분법은 논란의 반복 안에서 견고해지고, 둘 사이에 공유하는 언어는 점차 흐려진다. 대중에게 팬덤은 변태고, 팬덤에게 대중은 ‘머글’이자 ‘알못’이다. 그렇게 논란은 도덕의 문제를 통해 케이팝 아이돌 문화의 고유한 문법을 구성하고, 생산자들과 소비자들 모두가 이 문법을 공유하도록 만든다. 케이팝이 ‘국위선양’을 한다는 시대에조차 하위문화로서의 위치를 잃지 않는 데에는 논란의 장르화 작용이 있다. 논란 속에서 케이팝만의 가치관과 규범, 팬덤 문화, 나아가 정체성이 구축되고 확립될 수 있었던 것이다.
장르의 잔여
나는 케이팝을 사랑한다. 무대 위를 휩쓰는 빛나는 열정과 젊음에 압도된다. 정교하게 다듬어진 아름다움과 그럼에도 다듬어지지 않는 개성에 매혹된다. 나는 케이팝을 증오한다. 빛나는 열정과 젊음, 그리고 무대를 만드는 수많은 이들에 대한 착취에 분노한다. 다듬을 수 없는 것까지 다듬으려는 횡포와 그럼에도 다듬어질 수 없었던 것까지 전시하고 판매하는 집요함에 치를 떨며 좌절한다. 케이팝은 내가 사랑하는 줄도 몰랐던 것을 사랑하게 만들고, 내가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충분하지 않았다고 느끼게 만든다. 초동판매량을 올리고 팬사인회에 응모하겠다고 환경을 파괴해 가며 앨범을 사고, 눈이 마주치는 한 순간을 위해 생일카페에 가고 콘서트가 끝난 뒤에도 주차장에서 사람들과 어깨를 맞대고 최애를 기다린다. 덕질이 밑도 끝도 없다. 그래서 사랑은 자해다. 관심을 끊어보려고 해도 컴백을 앞두고 티저가 올라오기 시작하면 컴백 날짜만 애태우며 기다린다. 그래서 취향은 저주다. 나의 사랑과 증오는 같은 대상을 두고 경합한다. 둘 사이의 균형은 불안정한 진동 안에서 계속해서 유지되고 성취되어야 하는 대상이다. 우리는 그 진동을 애증, 혹은 길티 플레저라고 부른다.
미디어학자 헨리 젠킨스는 스스로 창작 활동으로 나아가는 집단으로서의 팬덤이 “매혹과 좌절 사이의 균형에서 태어난다”고 했다. “만약 미디어 콘텐츠가 우리를 매혹시키지 못했다면, 그것에 개입할 욕망은 없었을 것”이고, 동시에 “그것이 어떤 식으로든 우리를 좌절시키지 않았다면, 그것을 다시 쓰거나 만들어낼 동기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을 조금 수정한다. 팬덤은 매혹과 좌절 사이의 운동에서 태어난다. 균형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매혹과 좌절은 엎치락뒤치락 겨루기 때문이다. 장르는 우리를 매혹시키는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를 좌절시킨다. 그것은 언제나 우리를 모순으로 몰아넣는다. 그리고 그 모순 안에서 우리는 장르의 잔여를 감각한다. 사랑과 증오, 매혹과 좌절 중 그 무엇도 충분한 답이라고 느낄 수 없어서, 둘 중 어느 하나도 마음 편히 선택할 수 없는 미결정의 마음. 이것이 장르가 우리에게 남기는 잔여다. 케이팝이 내게 남긴 것이 행덕도 탈덕도 하지 못해서 여전히 음악을 듣고 영상들을 찾아 보지만, 그것을 공개적으로 말하지는 못하는 마음인 것처럼.
이러한 잔여는 자주 안정화된다. 논란 또한 그러한 하나의 방식이다. 논란은 사람들 사이에 혼란을 생산하는 것 같지만, 사실 혼란 속에서 질서를 구축한다. 논란은 주어진 현상을 특정한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문법이고, 증오나 사랑, 불안과 공포와 같은 감정이 특정한 방향과 형태로 흘러갈 수 있도록 하는 경로이다. 그래서 논란은 그 자체로 하나의 장르가 될 수 있고, 케이팝을 하나의 장르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논란은 안정화 작용이다. 사실의 파편들과 도덕적 기준, 그에 근거한 추측들과 이 과정 전반에 흘러다니는 정동을 일정하게 처리할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순수한 사랑 혹은 순수한 증오라는 부당하게 정화된 선택지를 제공함으로써 애증이라는 운동을 멈추는 것은 그러한 처리 과정의 핵심이다. 달리 말해, 논란은 케이팝이라는 장르의 잔여를 재료로 삼고, 그것을 가지고 하나의 장르로서의 케이팝을 구성한다. 논란을 통해 장르의 잔여는 다시 기존의 장르로 말려들어간다.
이러한 맥락에서 논란의 문제는 단지 그것이 실존하는 사람에 대한 폭력이라거나, 음모론적 구조로 사람을 매장하려 한다는 데 있지 않다. 잔여는 생성의 장소다. 하나의 장르가 충분히 포괄할 수 없는 바로 그 영역에서 비평과 토론이 창발한다. 대중과 팬덤이 부딪히고, 합리성과 미적 기준에 대한 논쟁이 점화되며 대중과 팬덤 사이의 경계가 재조정된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장르가 탄생하기도 한다. 그러나 논란은 잔여를 재빠르게 선점함으로써 비평과 토론을 차단하고, 합리성과 미적 기준에 대한 기존의 전제를 되풀이함으로써 대중과 팬덤이라는 구분을 굳힌다. 그렇다고 해서 장르의 잔여가 소멸하는 것은 아니다. 논란 또한 하나의 장르이기 때문에 언제나 잔여를 남기기 때문이다. 해소되지 않는 애증 혹은 길티 플레저, 거기서 비롯되는 망설임과 같은 것들. 아주 뚜렷이 언어화할 수는 없는 모순들.
카리나/유지민의 열애설 이후, 나는 ‘이달의 소녀’를 함께 덕질하는 두 명의 형을 만났다. 팬사인회 응모 때문에 자신이 시즌그리팅을 여러 개 살 것이니 우리에게는 사지 말라던 형은 친필 사인이 있는 고원이의 폴라로이드를 시즌그리팅 한 박스와 함께 내게 건넸다. 형들은 소주를 한 잔씩 따라 두고 ‘만약에’로 대화를 시작했다. 너는 혜주가 열애설이 나면 어떻게 할 거냐, 너는 걔가 결혼한다고 하면 응원해줄 수 있냐. 아니 형님, 우리 애는 결혼할 생각이 없어요. 그래도 결혼한다고 하면? 아, 응원 못 하죠.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형, 혜주랑 연애하고 싶은 건 아니라면서요. 그리고 나는, 인터넷에 악플을 달지는 않았지만 내심 카리나/유지민과 이재욱의 연애를 반기지 않았던, 4월 초에 올라온 둘의 결별 기사를 보고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던 나 자신을 돌아봤다. 네가 좋다면 어쩔 수 없지, 하지만 너랑 더 잘 어울리는 사람이 있을 텐데, 그게 내가 아니라는 건 당연한 사실이지만. 그 와중에 형들의 대화는 계속 흘러가고 있었다. 결혼도 응원 못 하는 거 보니까 가짜 팬이네. 아니 형님, 진짜 팬이니까 응원을 못 하는 거예요. 나는 고원이의 폴라로이드를 괜히 한 번 꺼내 본다. 왠지, 망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원하는가? 사실, 팬들도 팬덤도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 사랑하고 싶고 사랑받고 싶다고 말하지만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우리는 헤매고 있다. 우리조차 알지 못하는 우리의 욕망은 아이돌 산업이 제조한 경로, 즉 케이팝이라는 장르를 따르면서 비슷해 보이도록 변한다. 우리는 자신과 서로의 욕망을 사랑이라고 불러주며 아름답게 꾸민다. 여기서 답을 찾은 줄 알았다. 하지만 언제나 욕망은 장르의 경계에서 흘러넘친다. 혹자는 그건 사랑이 아니라고 말하고, 혹자는 사랑이란 원래 더러운 것이라고 말한다. 이건 사랑이 맞을까? 이게 사랑인지 아닌지 헷갈리는 이유는 결국 사랑이 뭔지 알 수 없어서 아닌가? 우리는 여전히 헤매고 있다. 장르의 잔여는 결국 우리의 욕망이다. 아이돌 산업이 아니었으면 알 수 없었을, 혹은 존재하지 않았을 욕망. 여전히 나조차도 이해하기 어려운 마음. 장르의 한계에서 머무를 수도 떠날 수도 없어서 애증의 운동을 멈출 수 없을 때, 안정화되지 못하는 욕망. 잔여. 망한 사랑.
장르는 욕망의 일부를 붙잡아서 만들어낸 대상이고, 욕망이 모여서 일정한 형태를 이루는 매혹의 장소이고, 욕망이 더 충족되지 못하는 한계에서 아직 알지 못하는 더 많은 걸 욕망하게 만드는 좌절의 장소이다. 장르를 통해 우리는 인식하고 설명하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느끼기 시작한다. 장르의 안팎에서 욕망은 들끓고 흘러넘친다. 장르는 욕망을 구획하고, 욕망에 형태를 부여하는 동시에, 그 틀에 들어맞지 않는 욕망에 대한 감각까지도 남긴다. 그렇게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장르는, 결국 충족되지 않는 욕망의 잔여로, 좌절로 우리를 이끈다. 사랑하지 않는 장르에 좌절할 이유는 없고, 사랑하는 장르에 좌절하지 않을 일도 없다. 그리고 우리는 어설프게도 그 좌절까지 사랑이라고 뭉뚱그려 부르곤 한다.
사랑은 언제나 망한다. 매혹이 언제나 좌절되듯이. 나의 사랑은, 우리의 사랑은, 애초에 망할 운명이었다. 그러니 사랑이 망한다는 사실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사랑과 매혹이 일깨운 어떤 감각들은 우리를 끈질기게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다. 그 감각 중 일부는 형태를 부여받고 새로운 장르가 된다. 우리는 다시 매혹되고, 다시 사랑한다. 아름답고 지저분한 수수께끼에 기꺼이 다시 발목을 잡힌다. 망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사랑을 재발명하는 것이다. 붙잡을 수 없는 욕망이 흘러넘치는 곳, 장르의 잔여, 그러니까 사랑이 망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