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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당신은……

분야
서평
교양
인문
사회
Date
2023/10/05
매체
기획회의
시리즈명
계절일기
* 편집을 거치기 이전 초고를 올려 둡니다.
집에서 함께 사는 식물들의 잎이 조금씩 시들어간다. 봄과 여름이 지나고, 비로소 가을이 오는 걸까? 입추는 지났는데. 햇빛은 피부를 파고들지만, 날씨는 덜 습하고, 밤은 선선해졌다. 작은 화분에 담겨 있지만 완연한 나무의 모습을 하고 있는 마삭 나무 분재들은 조금씩 앙상해지고 있다. 어떤 잎들은 힘이 빠지고, 어떤 잎들은 색이 빠진다. 단풍이 되려나 보다. 낙엽이 되려나 보다. 어쩌면 내가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걸 계절 탓으로 돌리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가을을 탄다고들 한다. 사람은 외부의 자극에 생각보다 쉽게 영향 받는 존재다. 호모 사피엔스라는 이름은 그런 의미에서 수정되어야 한다. 인간은 생각하기보다는 느끼는 존재고, 느낌으로써 바뀌는 존재다. 외부에 감응하고 그에 따라 계속해서 자신을 갱신하는 존재다. 지는 것들, 떨어지는 것들을 보고 있으면 어딘지 모를 외로움이 느껴진다. 가을을 타는 사람이 많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한때 나무에 다른 잎들과 함께 가득 붙어 있었으나 하나둘 떨어지며 제각기 혼자가 되어 밟히는 낙엽들 때문일까. 낙엽들이 신발이나 바퀴에 밟히며 바스라지는 건조하고 힘없는 감각. 그것은 묘하게 나의 마음을 파고든다. 외로움 때문만은 아니다.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그리움이다.
3년째 가을마다 나는 한 사람을 떠올린다. 아니, 내가 떠올린다기보다는 그것이 떠오른다. 깊은 호수에 빠져 있던 시신이 부패하면서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것처럼. 어떤 기억이 시신과 같이 떠오른다는 것은 세 가지 의미를 지닌다. 하나는 기억에도 몸이 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 기억이 죽었다는 것이고, 마지막 하나는 죽은 기억이 여전히 몸을 갖고 내 안의 호수에 빠져 있다는 것.
내가 오늘 소개하고 싶은 책은 심보선 시인의 시집 <오늘은 잘 모르겠어>다. 이 글의 소제목들은 표제작 ‘오늘은 잘 모르겠어’의 구절들이다. 이것은 남의 사랑 이야기 뒤에 숨어 사랑에 대한 나의 기억을 흘려두는 글이다. 그것이 내가 가을에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용기다.
당신의 눈동자
내가 오래 바라보면 한 쌍의 신(神)이 됐었지
대학교 1학년 때 철학 교양 수업에서 교수님은 물었다. 철학자 중에 사랑에 대해 말한 이는 별로 없는데, 그 이유가 무엇일 것 같냐고. 멍한 얼굴로 앉아 있던 우리에게 교수님은 말했다.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면 그 사람의 밑바닥이 드러나기 때문에 철학자들은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은 것이라고. 세계의 본질에 대해, 정의와 진리에 대해, 인간과 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들이 사랑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는 그 이야기가 내 기억에는 오랫동안 남아 있다. 슬픈 눈을 한 교수님이었다.
사랑에 대한 글을 쓴다는 것은 그래서 언제나 두려운 일이다. 겁을 지레 먹고 몸을 사리면 너무 추상적이거나 예쁘기만 해서 하나마나 한 이야기가 되고, 생각하는 그대로 써 버리면 너무 구체적이고 지저분해서 어디 내놓을 수 없는 이야기가 되어 버리니까. 그래서 오늘 나는 가을에 어울리는 책을 소개한다는 명분으로, 혹은 그 책을 방패삼아 사랑을 말하려는 것일 테다. 사랑을 말할 때는 숨을 곳이 필요하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은 ‘어린놈이 뭘 안다고 떠드냐’ 하고, 나와 만났던 이들은 ‘감히 네가 사랑을 논하냐’ 할 것이다. 변명의 여지는 없다. 낙엽들 사이에 주저앉아 숨어야 한다.
그렇게 남의 글을 방패로 세워두고, 나는 글을 써내려간다. 어떤 이와 눈을 마주쳤던 순간들을 떠올린다. 이때 마음은 시각적인 것이다. 어떤 날에는 슬픔이, 어떤 날에는 기쁨이 가득했다. 어떤 날에는 배려심이, 어떤 날에는 무신경함이 가득했다. 그가 마주한 나의 눈도 그랬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서로의 눈동자를 여전히 오래 바라보던 때, 그때만큼은 세상에 우리밖에 없는 것만 같았다. 마치 우리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창조되지 않은 텅 빈 세상의 중심에 선 한 쌍의 신처럼. 이것은 가을이 되면 떠오르는 사랑하는 눈동자의 깊이에 관한 이야기다.
당신의 무릎
내가 그 아래 누우면 두 마리 새가 됐었지
때로 우리는 함께 누워 서로를 마주봤고, 눈을 마주치지 않아도 서로만을 생각했다. 이때 마음은 촉각적인 것이다. 손을 잡고, 팔이 엉키고, 다리가 부딪히면, 그 촉감 하나하나는 손과 팔과 다리에 남는다. 피부에는 피부의 기억이 있다. 혼자서 손깍지를 껴 보고 나의 손이 잡은 게 그의 손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 걸리는 시간 동안, 내 안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때로 나는 그의 다리에 머리를 대고 누웠다. 그렇게 눕는 것이 왜 항상 나였는지는 모르겠다. 천장의 형광등이나 하늘의 태양을 바라보다가 눈을 감고, 그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눈을 뜨면 눈앞에는 빛 대신 그의 얼굴이 있었다. 시야는 여전히 밝았고 그것은 꽤 온당한 일이었다. 그는 누워 있는 나에게 불편하게 고개를 숙인 채 말을 건네곤 했다. 그 자세에서 주고받는 말에 내용은 없었다. 그저 우리가 그렇게 닿아 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일곱 살 때부터 함께 살던 강아지를 대학교 3학년 때 떠나보낸 후, 다시는 나보다 일찍 죽는 것은 사랑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오래 사는 동물을 찾기 시작했다. 어떤 앵무새들은 수십 년을 살기도 한다는 글을 봤다. 요즘 나는 인스타그램 릴스와 유튜브 쇼츠로 모르는 앵무새들이 서로를 바라보고 짹짹거리는 영상들을 본다. 내가 그의 무릎 아래 누워 있을 때 마주보던 우리는 영상 속 앵무새들의 모습과 닮았다. 부리의 모양 때문에 항상 웃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앵무새들의 모습. 이것은 가을이 되면 떠오르는 촉감이 상기하는 기억에 관한 이야기다.
지지난밤에는 사랑을 나눴고
지난밤에는 눈물을 흘렸던 것으로 볼 때
어제까지 나는 인간이 확실했었으나
눈동자를 마주하고, 피부를 맞대고 누워 세상 모든 것을 약속하다가도, 잠든 뒷모습을 보며 끝을 생각하는 날들이 있었다. 약속한 영원이 하룻밤으로 끝난 날들이 있었다. 일방적으로 떠난 날들이 있었다. 목소리들이 부딪혔다. 이때 마음은 청각적인 것이다. 그것은 색이 변하고, 힘이 빠지고, 떨어지고, 밟혀 부서지는 낙엽의 소리와 같은 것이다.
그해 가을 이후 우리는 없다. 그와 나는 더는 연락을 주고받지 않았다. 친구로 남을 수 있다는 생각은 누구도 이기지 못하는 싸움들 안에서 산산이 부서져 갔다. 헤어진다는 것, 혹은 어떤 관계가 사라진다는 것은 다른 모든 소멸과 마찬가지로 지극히 물질적이고 천천히 이루어지는 과정이라, 내가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한 봄부터 그해 가을까지 그와 나는 점점 더 지저분하게 싸우며 천천히 멀어졌다.
철학자들이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 이유는 내가 다시 누군가를 만나기 두려운 이유와 비슷한 것 같다. 나에게 사랑은 상대와 나 자신의 밑바닥을 보고, 밑바닥 아래의 쿰쿰한 지하실을 보고, 대체 인간이란 뭘까 생각하게 되는 과정이었다. 그때마다 나는 상대도 나도 인간 같지 않다고 느끼곤 했다. 상대와 나에 대한 실망과 좌절은 모든 인간으로 쉽게 일반화되곤 했다. 사실 알고 보면 다들 밑바닥은 이 모양 이 꼴일 거라고.
그런데 돌아보면, 그렇게 실망하고 좌절하고 눈물 흘리고 화내던 그때 나는 가장 인간다웠다. 아직 흘릴 눈물이 남아 있던 그때, 아직 기대할 것이 남아 있던 그때, 아직 누군가를 실망시킬 수 있었던 그때, 나는 너무나도 인간적이었다. 서로의 눈물과 기대와 실망과 분노와 좌절이, 서로를 여전히 인간이게끔 하고 있었다.
오늘은 잘 모르겠어
그러나 오늘은 잘 모르겠다. 이것은 가을에 더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에 관한 이야기다. 이때 마음은 시각적인 것도, 촉각적인 것도, 청각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모든 감각이 지저분하게 뭉쳐진 채 호수에 가라앉았다가 떠오르는 기억이다. 기억에 몸이 있다는 건 그런 의미다. 기억은 온갖 감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는 그저 머리로 기억하는 게 아니다. 몸이 기억하는 건 자전거 타는 법만이 아니다.
뒤늦게 그와 함께 찍은 사진을 발견한 적이 있었다. 아주 오랜만에 노트북을 바꿨고, 바꾼 노트북은 핸드폰에 저장된 사진들을 자동으로 불러왔다. 나는 거기서 대강 3년에서 4년 정도 된 사진들을 뒤적이며 과거에 저장한 우스운 짤 따위를 보며 키득대고 친구들에게 보내고 있었다. 잊은 사진들이었다. 익숙하고 오랜만에 보는 어느 사람이 있었다. 다시 보니 더 가느다랗고 작은 사람이었다. 챙이 아주 넓은 흰색 모자를 쓰고 하늘거리는 치마를 입은 그가 서 있는 그곳이 어딘지 나는 기억한다. 저녁의 신촌에 우리는 핸드폰으로 맛집을 찾다가 그곳에서 연어 구이와 파스타를 먹었다. 연어를 별로 안 좋아하던 그도 그건 맛있게 먹었다. 아니면 내가 그렇게 그냥 생각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가을에 어떤 눈동자들이, 어떤 촉감들이 떠오르면,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을 떠올리려 안간힘을 쓴다. 기억들이 죽은 채로 떠오른다.
또 하나의 사진이 있었다. 가로로 긴 창문 밖으로는 바다인지 강인지 모를 물이 보이고, 그는 창가 쪽 의자 앞에 서 있는데 뒷모습이라 사진을 한창 지우던 시기에 발견하지 못한 것인지. 그런데 어디였더라? 아니, 어디였더라? 나는 그와 바다에 간 적이 없는데, 아니 있나? 아니, 그때는 이런 사진을 찍은 기억이 없는데. 아마 이건 영영 기억하지 못할 것 같고, 이 사진 때문에 나는 그를 다시 마주치더라도 할 말이 없을 것 같고. 나는 누구, 여긴 어디. 나는 어디, 여긴 누구. 나는 어디고 여기에는 누가 있는지, 여기에는 나만 있는 건지, 나는 어디에서 헤매고 있는 건지. 아니, 정말 어디였더라. 오늘은, 잘 모르겠다.
‘오늘은 잘 모르겠어’라는 말은 이제 더는 사랑을 나누지도, 슬프지도, 좌절하지도, 실망하지도 않는 오늘의 나를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을 것 같다는 이야기일 테다. 하지만, 오늘은 잘 모르겠다고 말끝을 흐리기에 아직 인간일 수 있다. 오늘은 잘 모르겠다는 말에 담긴 망설임은 내가 인간인지 아닌지 모르겠다는 이야기이기보다, 그럼에도 다시 사랑을 나누고 눈물을 흘릴지 모를 미래를 생각하는 것이다. 더는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아도, 기댈 무릎이 없어져도, 새가 다시 날아올지 생각한다. 한쪽이 사라져서 더는 한 쌍이 아니게 된 신은 바닥에 가을의 낙엽처럼 주저앉아 중얼거린다, 말끝을 흐리며.
눈꺼풀은 지그시 닫히고
무릎은 가만히 펴졌지
거기까지는 알겠으나
새는 다시 날아오나
신은 언제 죽나
그나저나 당신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