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제일연구자대회 80 ‘곤란’의 인류학
안희제 문화인류학 연구자
특별기획 ‘천하제일연구자대회’는 30~40대 인문·사회과학 연구자들의 문제의식과 연구 관심, 그들이 바라보는 한국사회와 학계의 모습에 대해 듣는 자리다. 새로운 시야와 도전적인 문제의식으로 기성의 인문·사회과학 장을 바꾸고 있는 연구자들과 이전에 없던 문제와 소재로써 아예 새 분야를 개척하는 이들을 만난다. 어려운 상황에서 분투하고 있는 젊고 진실한 연구자들을 ‘천하제일’로 여겨도 된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연구자문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민교협 2.0’과 함께한다.(‘천하제일연구자대회’ 시즌3를 시작하며_ 신진 연구자 ‘도전 의식과 현실’ 짚는다)
결혼과 출판시장은 서로 다른 세계처럼 보이지만,둘 다 경제적 가치와 도덕적 가치가 맞물려 삶의 불안정을 만들어 낸다.
출판 시장의 작가도, ‘결혼적령기’의 청년도 끊임없이자기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 ‘진정성’과 ‘책임’이라는 도덕적 가치는그 증명의 압력을 정당화하며 불안정을 재생산한다.
흩어진 관심사, 하나의 질문으로 모이다
질병과 장애, 아이돌, 출판, 젠더와 섹슈얼리티…. 2020년 첫 책 『난치의 상상력』(동녘, 2020)을 낸 뒤 여러 관심사를 오가며 다양한 작업을 해 왔다. 그런데 이 산만함은 개인적 성향이라기보다 작가라는 직업 자체의 불안정성과 관련돼 있다. 계속 새로운 작업을 내놓지 않으면 새 책과 다른 작가들에게 밀려 일감이 사라질 것이라는 불안, 그로 인해 들어오는 일을 가리지 않고 맡으면서 생긴 산만함은 프리랜서라는 불안정한 조건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인문사회 교양 분야 출판시장에서 현장 연구를 수행해 작성한 석사 학위논문 「좋은 책 만들기와 ‘작가’ 되기의 곤란」은 출판시장의 경제적 불안정과 작가라는 일의 지속 불가능성을 솔직하게 들여다보는 작업이었다.
가치화(valuation) 이론은 불안정을 구체적으로 다루기 위해 채택한 도구였다. 가치는 특정한 ‘가격’이나 ‘의미’로 고정돼 사물이나 사람에게 정박하기도 하지만, 사람과 사물은 물론 온갖 제도와 절차가 연결돼 작동하는 시장의 안팎에서 끊임없이 유동한다.
따라서 가치화를 통해 출판시장의 불안정을 분석한다는 것은 책과 작가를 중심에 두고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가치의 작동을 가능하게도, 불가능하게도 하는 장치들을 살펴보는 일이었다. 또한 장치들의 맞물림과 마찰을 드러내고, 그 과정에서 구성되는 주체의 모습을 그려 보는 작업이었다.
불안정을 생산하는 시장을 연구하며 익힌 이 틀은 결혼과 불안정에 관한 연구로도 이어졌다. 출판과 결혼이라는 서로 다른 주제는 불안정을 생산하는 장치와 그 안에서 사람들이 겪는 곤란을 통해 하나로 연결됐다.
출판시장의 불안정이 만든 ‘진정성’
먼저 출판을 보자. 한국전쟁과 군부독재 시기를 관통한 검열 체제 속에서 책은 국가 발전에 이바지하는 국민의 ‘교양’이면서, 독재에 저항하고 다른 체제를 꿈꾸는 민중의 ‘금서’였다. 출판은 이를 시장 안팎에서 생산·유통·판매하는 행위였다.
1987년의 제도적 민주화와 외환위기 이후 국가 경제의 도약을 위한 지원 체제 속에서 출판은 새로운 ‘기간산업’인 문화산업이 됐다. 공공성은 국가 지원의 근거로서 투자 가치와 결합하기 시작했다.
교양과 금서가 저마다의 ‘사회적’ 목적을 ‘경제적’ 가치를 매개로 실현했듯, 공공성과 시장성의 경계는 투자 가치 안에서 실천적으로 더욱 유동해졌다. 동시에 출판계에서 ‘좋은 책’의 반대항으로 ‘팔리는 책’을 말하듯, 상상 속에서는 두 가치의 경계가 더욱 배타적으로 구성되기도 했다.
가치화라는 개념을 통해 나는 이러한 ‘유동성’ 안에서 인문사회 교양 분야의 책과 작가들이 겪는 표류를 포착하고자 했다. 기획안과 종이, 판형, 물류창고, 온·오프라인 서점과 매대, 책날개와 소셜미디어 등 책과 작가의 기획·제작·유통 전 과정을 움직이는 크고 작은 장치들의 맞물림을 분석했다.
장치들의 맞물림은 언제나 마찰이기도 했다. 공공성과 시장성을 다루는 두 가지 방식, 즉 실천적 유동성과 상상적 배타성이 공존했기 때문이다. 작가들은 사회 비판 의식과 기존 젠더 규범 안에서의 매력, 미적 취향을 동시에 활용해 자신의 삶을 포트폴리오로 재구성했다. 책뿐만 아니라 자신의 얼굴과 말, 미감까지 전면적으로 상품화했다.
이 과정은 상상적 배타성에 기반해 콘텐츠를 생산하는 동시에, 실천적 유동성에 기대 자신의 투자 가치를 높이려는 시장 전략이었다. 이 두 경향이 집약된 가치가 오늘날의 ‘진정성’이었다. 작가인 연구 참여자들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을 자신의 투자 가치로 활용하는 일상이 자기모순처럼 느껴진다고 말했다. 팔로어에게 ‘앞뒤가 다른 사람’이라는 비난을 들은 적이 있다는 이도 있었다.
이러한 사례에서 드러나듯, 진정성이라는 도덕적 가치의 부상은 가치화 장치들의 마찰 속에서 가치의 유동적 경계와 이를 체화한 이중적 주체로서 작가의 불안정한 지위가 재생산되는 장면이었다.
가치화 장치들의 마찰은 사람의 삶에 닿을 때 결국 도덕적 가치와 만난다. 이러한 만남은 작가들, 나아가 출판인들에게 쉽게 빠져나가기 힘든 ‘곤란’으로 경험되고 있었다. 이 곤란은 불안정의 생산과 그에 대한 대응을 압축하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끊임없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압력이 존재했다.
투자 가치는 소득에 대한 약속 없이, 혹은 약속만으로 삶을 지탱하게 함으로써 불안정을 생산한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작가들은 책에 담긴 내용, 팔로어 수, 편집자들과의 관계, 고정 독자와 수강생의 확보 등 다양한 방식으로나마 자신의 가치를 일시적으로 안정시키려 했다. 이러한 마찰은 작가라는 일, 나아가 출판 자체의 지속을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출처 : 제2차 국민인구행태 조사, 미혼남녀 주요결과, 조사기간 2024.10.1~10.22
결혼의 안정이 요구하는 ‘책임’
앞의 내용이 투자 가치와 상품화의 문제에 초점을 맞췄다면, 최근 나와 같은 ‘결혼적령기’ 청년들을 인터뷰해 쓴 『사랑과 안정』(한겨레출판, 2026)은 결혼을 가치화 장치로 분석한 작업이다. 불안정한 삶 속에서 유일한 안정을 구성하려는 욕구와 그 경로에 초점을 맞췄다.
1995년생 청년 남성이 자신의 죽음을 계획하기까지의 생애사를 담은 『증명과 변명』(다다서재, 2024)을 쓰면서, 나는 인터뷰 참여자에게 결혼을 통한 ‘아버지’ 되기의 실패가 삶의 모든 성공과 실패가 집약된 좌절로 인식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에게 결혼은 학력과 매력, 경제력을 바탕으로 자신이 ‘남편감’으로서 자격이 있는지를 판정하는 장치였다.
『사랑과 안정』을 쓰면서는 ‘결혼적령기’ 청년 9명을 만나 결혼에 관해 대화했다. 이들에게 결혼은 금융 혜택·소득·주거를 아우르는 ‘경제’와 가족이 되는 공적 계약으로서의 ‘소속’을 통해 ‘안정’을 정의하고, 이를 평가 기준으로 삼는 가치화 장치였다.
결혼은 주거와 금융, 커리어, 노후, 젠더, 섹슈얼리티, 계급의 문제를 모두 집약해 ‘안정’으로 번역했다. 이를 통해 서로를 성차화된 방식으로 평가하게 만들었고, 그런 지점에서 가부장제를 작동시키며 다른 형태의 안정에 대한 상상력을 배제하고 있었다.
여기에 결부된 도덕적 가치는 ‘책임’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처자식을 먹여 살리는 책임감 있는 남성 가장’에 대한 기대는 남성뿐 아니라 여성에게서도 발견됐다. 그 중심에는 남성의 안정적인 소득이 있었다.
이러한 기대는 남성에게 비교적 높은 소득과 안정된 고용을 제공해 온 한국 사회에서 상식처럼 통했지만, 바로 그 상식이 남성과 여성 모두를 곤란에 빠뜨리고 있었다.
출처 : 제2차 국민인구행태 조사, 미혼남녀 주요결과, 조사기간 2024.10.1~10.22
남성은 자신의 가치를 소득으로 환원하곤 했다. 여성은 특히 자녀 계획이 있는 경우 자신의 커리어를 포기하거나 ‘집안일을 함께해 줄’ 남성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집안일을 함께하고 육아휴직을 쓰겠다고 약속했지만 그것이 정말 지켜질지는 알 수 없다는 우려는 예비 아내뿐 아니라 예비 남편에게서도 드러났다.
‘평범한 남편과 아내로서의 책임’ 안에서 이들은 자신의 욕구를 외면하고 체념했다. 때로는 오랜 시간 쌓아 온 상대방과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까지 포기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결혼의 강력한 힘을 보여주는 동시에 결혼을 거부하거나 포기하게 만드는 계기이기도 했다.
이는 사람들이 가부장제 안에서 생존하는 동시에 사랑과 안정의 이름으로 그 체제를 재생산하는 장면이었다. 소득을 책임의 유일한 형태로 받아들일수록 돌봄의 가치와 서로의 인간적 관계에 대한 책임은 ‘안정’이라는 이름 아래 평가절하됐다.
‘책임’이야말로 불안정한 일상에서 안정을 확보하기 위해 성차화된 가치화 과정을 정당화하는 강력한 도덕적 가치였다. 그것은 다른 관계와 사회를 상상할 수는 있어도 실제로 살아 낼 수는 없게 만드는 곤란을 낳았고, 안정 앞에 무력한 주체를 생산하고 있었다.
곤란의 자리에서 바깥을 상상하다
가치화 장치들이 경제와 도덕이 겹치는 방식으로 맞물리는 자리에서 작은 개인들은 종종 갈피를 잡지 못했다. 불안정과 안정의 생산에 관한 인류학적 작업을 통해 발견한 것은 탈출구나 해법이 잘 보이지 않는 ‘곤란’이라는 자리가 특정한 구조의 의도가 그대로 실현되지 못한 흔적이기도 하다는 사실이었다.
곤란 속에는 체념과 무력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구조에 대한 불신과 거부 또한 존재했다. 그렇다면 구조와 개인 사이의 늘 일관되지는 않은 역동을 통해 구조의 지속 불가능성을 드러내고, 나아가 곤란의 바깥을 차근차근 그려 볼 수도 있을까. 현장에서 출발해 이론에 닿고, 이론을 딛고 다시 현장으로 향하는 인류학적 연구가 기여할 지점이 여기에 있을 것이다.
안희제 문화인류학 연구자
연세대에서 경제학과 문화인류학을 전공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 문화인류학과에서 석사 학위논문 「좋은 책 만들기와 ‘작가’ 되기의 곤란: 인문사회 출판시장의 가치화 실천」을 쓰고 졸업했다. <시사IN>, <한겨레>, <홈리스뉴스>, <문화일보> 등에 칼럼을 연재하거나 기고했다. 소수자 인권운동에 발을 걸치고 대중문화 한복판에서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과 감정을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글을 써 왔다. 정동과 가치화 이론 등 사람과 사물, 의미 사이의 역동을 분석하는 데 도움이 되는 도구에 관심이 많다.
쓴 논문으로는 「가치들의 긴장을 조율하기」(2025), 「팬덤이라는 행위자-네트워크와 보호의 정치」(공저, 2023), 「팬 행동주의를 재회집하기」(공저, 2023) 등이 있다. 쓴 책으로는 『사랑과 안정』, 『증명과 변명』, 『망설이는 사랑』, 『난치의 상상력』, 『아무튼, 배드민턴』(근간), 『반려인의 하루』(공저), 『광장 비판』(공저), 등이 있다. 『문학과사회』, 『릿터』, 웹진 『비유』, 국립현대미술관 등에 비평을 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