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틀러의 말처럼 이성애가 이중의 부정—나는 절대 이성이 되지 않을 것이며, 절대 동성을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로 지탱되고 있다면, 둘 중 적어도 하나의 ’절대‘를 고작 ‘어쩌면’으로 바꾸는 것만으로도 이성애적 확신은 흔들릴 수 있다. 이성의 것이라고 생각한 무언가를 동경하게 되거나, 동성의 것이라고 생각한 무언가를 욕망하게 되거나. 동경과 욕망의 자리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섹슈얼리티와 젠더 사이에 가정된 연속체는 착각이었음이 드러나게 된다. 나는 누군가를 동경할 수 있으며, 그가 단지 나와 다른 성별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동경을 접기는 어렵다. 나는 누군가를 욕망할 수 있으며, 그가 단지 나와 같은 성별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욕망을 접기는 어렵다. 때로 어떤 동경은 욕망을 감추기 위해, 어떤 욕망은 동경을 감추기 위해 약탈당하고 참칭당하고 있지 않나? 남자의 피부를 하고 있으나 여자의 가면을 쓰거나, 여자의 피부를 하고 있으나 남자의 가면을 쓰고 있는, 이성애자들은 그런 젠더의 저주받은 자들(the wretched of the gender)이 아닌가? 동경도 욕망도 특정한 지향성이라면, 자신이 되고 싶은 것을 자신이 탐하고 싶은 것으로 자리를 바꾸고, 자신이 탐하고 싶은 것을 자신이 되고 싶은 것으로 자리를 바꾸는 것이 자신을 해방시킴으로써 성적인 차원에서 탈식민화(decolonize)를 수행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이러한 동경과 욕망의 자리 바꿈으로서의 성적 자기-탈식민화가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이성애자들이 아닌가? 남성 동성사회가 실은 남성 동성애를 억압하되 보존하는 방식으로 간신히 성립한다는 세지윅의 지적을 상기한다면, 우리는 동경과 욕망의 관계를 좀 더 정확히 알 수 있다.
이성애가 성적 지향sexual orientation이며, 이때 지향orientation을 현상학적 의미로 해석할 때, 그러니까 지향을 무언가를 가까이 하고 싶고, 그것에 영향을 받고 그로 인해 변해 가는 상황으로 이해할 때, 이성애는 현상학적 의미에서 이성-되기일 수 있으며, 바로 그런 맥락에서 이성애는 영원히 성공할 수 없다. 동경과 욕망이 모두 지향이라고 했을 때, 그 둘은 모두 동일시의 욕구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남자되기와 남친되기의 차이와 그 간극에서의 실패는 바로 여기서 온다. 어떤 의미에서 남자는 영원히 남친이 될 수 없는데, 남친이 된다는 것은 (여자가 좋아하는 것을 하고 여자의 말을 이해하고, …) 여자가 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친이 되지 못하는 남자는 실패한 이성애자이므로, 이것은 이성애의 아포리아라고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