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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배

Created
2025/03/24 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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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나는 나를 해치는 존재를 사랑하기보다 나를 해치지 않는 존재를 숭배하는 것이 좋은 걸까? 종교가 아니라 덕질에 대한 이야기다. 방금 너무 아름다운 글을 읽었는데 꼭 그것과 관련된 건 아닐지언정 걍 뭐라도 남겨두고 싶었다.
지난 주 일요일에는 에스파 콘서트를 다녀왔고 어제는 아르테미스 콘서트를 다녀왔다. 그 사이에 클래식 연주회도 하나 다녀왔으나 그건 좀 미뤄두자. 내겐 그게 가장 돈도 덜 들고 부차적인 문화생활이었으니까.
에스파 콘서트 때 끝나고서 가장 길게 남은 감상은, 이건 정말이지 우주적 경험이다, 라는 그들의 스펙터클에의 압도됨이었다. 나는 정말이지 압도당했다. 올림픽경기장 2층 제일 끝 자리, 전체를 모두 조망할 수 있는 그 자리에서, 나는 무대뿐 아니라 내 눈앞에 들어오는 모든 것 안에서 어떤 우주에 부유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둡고 둥그런 거대한 공간에서 응원봉 하나하나가 별빛처럼 보였다. 그리고 무대에는 수시로 빛이 쏟아졌다. 아니, 무대는 빛을 뿜었다. 우리는 모두 빛을 반사하기보다 뿜는 존재로서, 별로서 그곳에 있었다. 큰 별들은 화려하게 자전하다가 무수한 작은 별들 사이를 지나며 공전하기도 했다. 이 완벽하게 연출된 우주에서 우리는 모두 별인 거야. 가장 거대하고 무거운 너희에게 우리는 한없이 끌려가. 뭐가 우릴 가로막지? 시큐겠지 뭐.
에스파 콘서트 이후에는 그래서 할 말이 많이 남지 않았다. 그토록 거대한 공연장에서 그토록 완벽한 공연을, 그토록 완벽한 모습으로 올리는 것이, 그저 굉장했다. 그들은 별이었다가, 우주 전사였다가, 자식이었다가, 천사였다가, 친구였다가, … 그렇게 이랬다 저랬다 하며 우리의 중심에 현전했다. 플로어 가까이서 그들의 이목구비 하나하나를 알아보던 때보다 오히려 더 강하게 현전했다. 우리가 모두 스펙터클의 일부였다. 우리는 열광했고 너희는 기뻐했다. 우리는 때로 울었고 너희는 자주 웃었다. 그러니까, 여기에 3인칭은 없다. 1인칭과 2인칭뿐이다. 너와 나, 우리와 너희뿐이다. 이게 우리의, 서로의 우주였다.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우주, 공연장에 갇힌 우주, 공연장에 갇혔기에 가능한 우주. 설령 내가 너희를 그만 사랑하는 날이 오더라도 콘서트만큼은 계속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빛나는 시공간. 5분마다 반복되는 전율과 황홀. 그 모든 걸 가능케 하는 조명, 음향, 응원봉 중앙 제어, 거대한 스크린과 카메라워크, 무대 장치, … 그 하나하나가 별개의 행위자임을 잊게 만드는 너희의 현전. 완전한 집약으로서의 무대. 3시간 중 2시간은 말 그대로 왼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사진도 영상도 거의 찍지 않고(어차피 구석자리다) 오른손엔 응원봉을 들고 왼손은 입을 틀어막고 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커져서 정신을 못 차렸다. 마지막에는 먼저 세상 떠난 덕메 생각하며 울었다. 내 옆자리의 중국인 팬 분은 왜 울고 있었을까? 당신에게도 당신만의 사연이 있었을 것이다. 물론 사연이 없어도 울 만큼 감동적인 무대였지만.
어제는 아르테미스 콘서트였다. 콘서트에 있으면서 깨달았다. 나는 얘네가 무대 위에 있는 것만 봐도 행복하다. 그게 에스파에 대한 마음과의 차이였다. 에스파에게는 훨씬 많은 걸 기대한다. 더 완벽한 무대, 더 엄청난 신곡을 기대한다. 성과를 기대한다. 근데 아르테미스에게는, 이달의 소녀에게는 그렇지 않다. 무대에 오르기만 해줘. 그것만으로 충분해. 애초에 처음 오프를 뛴 것도, 생일카페를 가본 것도 다시는 못 갈지도 모른다는 불안 때문이었다. 여기 너희를 응원하는 팬들이 남아 있다고 느끼게 해주고 싶어서였다. 가서 만난 건 그들의 불공정계약에 분노한 다른 팬들이었다. 우리는 서로 언제 어쩌다 덕질을 시작했는지 얘기를 나누었고, 다음 생일카페에 같이 갔다. 그러다 친구가 되었다. 나는 그 형들을 사랑한다. 콘서트에 가도 형들이 없으면 허전하다. 애들이랑 손하트를 해도 바로 자랑할 형들이 없으니 속상했다. 이 모든 걸 가능하게 한 건 이달의 소녀, 만이 아니라 그들의 위기와 불안과 고통이었다. 그래서 이달의 소녀를 좋아하는 일은 나에게 불안해 하는 일이기도 하다. 재결합하면 좋겠다, 재결합 못하겠지, 무대를 보러 오지 말고 무대에 같이 서야지, …… 다른 노래들보다 이상하게 <말할 수 없는 비밀> 무대에서 가장 울컥했다. 1/3은 특별히 좋아하는 유닛도 아니었고 그 곡도 내가 거의 안 듣는 곡이었는데, 고작 4명이 올라오는 무대에서 절반만 멤버고 나머지 절반이 댄서로 대체되었다는 게, 그 숫자가 똑같아서 유령처럼 느껴졌다. 현진이와 비비의 빈자리가 느껴졌다. 비비는 객석에서 이 무대를 보며 무엇을 느꼈을까? 무대에 다시 오르고 싶었겠지? 아니면 어떡하지? 하지만 그 모습으로 오르고 싶었을까? 루셈블 첫 뮤직비디오를 찍을 때가 떠올랐을까? 그렇게 나는 자꾸만 무대 위의 스펙터클이 아니라 이달의 소녀라는 유령에 사로잡힌다. 멤버들은 사방에서 자신의 일을 하고 있거나 새 소속사를 찾고 있는데 이달의 소녀라는 그룹은 유령처럼 맴돈다. 어제 본 무대는 그런 의미에서 빙의나 굿판에 가까운 것이다. 작년 콘서트 때 아르테미스 멤버들은 이달소 응원봉이 아니라 아르르 응원봉을 들고 와 달라고 했다. 오빛 대신 ourii로서 이곳에 있어 달라는 것이었다. 그걸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서 나는 여태 응원봉을 새로 안 사고 있었다(물론 비싸기도 했다).
작년에는 논문 쓰느라 어차피 콘서트도 못 가서 괜찮았는데, 이번에는 예매를 해놓고 계속 고민했다. 응원봉을 구해야 하나? 트위터에도 구한다고 올렸다가 사기꾼 같은 놈이 엮여서 그냥 포기하고… 그러고 있었다. 어떤 응원봉을 들고 가야 할지, 이달의소녀 응원봉을 들고 가도 될지를 걱정하는(그냥 고민이 아니다) 사람은 나만이 아니었다. 나는 어쨌든, 애들이 원한다면 원하는 대로 해주기로 했다. 아르테미스 응원봉을 현장에서 사야지. 집회 가느라 다발로 사둔 건전지를 좀 챙겨서 나갔다. 응원봉은 비싸기도 더럽게 비쌌다. 하지만 불이 들어오는 걸 보고, 잠깐 손에 쥐어보고, 이 정도면 딱히 안 비싸다고 생각했다(호구새끼). 그리고 콘서트 시작.
기분이 이상했다. 아르테미스로서 무대에 서면서, 우리한테는 우리(ourii)로서 와달라고 했으면서, 왜 셋리스트의 대부분은 이달의소녀 시절의 노래이고, 하이라이트도 전부 이달의소녀 노래고, 새로 공개하는 곡은 이달의소녀 때 사라진 전설의포켓몬 같은 노래가 되어야 하는 건지. 그럼에도 왜 내가 오빛으로 불릴 수 없는 건지, 너희는 왜 이달의소녀가 아닌 건지(여전히 이달의소녀라고 말하지만 이제 아닌 걸 우리 모두가 안다). 그것이 한없이 이상하고 원통했다. 차라리 아예 새로운 무언가를 해주기를 바라기까지 했다. 수영이는 그러고 있잖아. 지우도 그렇고. 루셈블과 아르테미스라는 두 이름이 공존할 때부터, 이미 많은 비극은 예정되어 있던 거 아닐까? 그렇잖아. 둘 다 이달의소녀를 계승한다고 뮤직비디오랑 티저랑 이름이랑 가사랑 모든 것에서 거의 비명을 지르고 있는데, 처음부터 내게 이건 정통성 경쟁으로 보였다. 그리고 나는 그게 정말이지 너무 싫었다. 왜 너희끼리 경쟁을 하는 거야? 무슨 왕위 계승하는 형제들처럼 왜 그렇게 피 튀기는 짓을 해야 하는 거야? 무대에서 빛나기도 아까운 시간에? 다시 너희가 모두 하나가 되어 무대에 섰으면 좋겠어. 한 명은 분쟁으로 한 명은 건강 문제로 참여 못한 10명짜리 무대 말고, 12명이 모두 함께하는 무대를 보고 싶어. 10명짜리 무대가 내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 이달의소녀 무대인 건 너무 잔인하지 않니? 그렇게 빛나지라도 말든가. 진짜 이런 기분 느낄 때마다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것만 같은데 솔직해지자면 좀 이상해진다고 뭐 어떤가 싶다.
어쨌든, 이달의소녀의 적자는 아르테미스가 된 것 같다. 루셈블은.. 이제 활동하지 않을 것 같고. 여진이랑 혜주는 아마 솔로로 나갈 것 같고. 고원이는 맨날 이브네 집에 가서 놀고 있고. 이브랑 츄는 각자 솔로로 잘하고 있고, 특히 이브는 아예 솔로 아티스트로 자리를 확 잡은 것 같고. 아르테미스는 특히 정병기라는 오리지널 프로듀서와 함께 있다는 것도, 이번 뮤비를 디지페디랑 찍었다는 것도, 노래를 g-high에게 받았다는 것도, 다 정통성에 대한 이야기겠지. 이달의소녀를 상속한 건 우리야. 그러니까, 이달의소녀는 죽은 거다. 분명히, 죽은 거야. 그러니까 상속 분쟁, 계승 경쟁이 생기고 있는 거지. 사용하는 플랫폼도 갈라지고, 하는 이야기도 달라지고, 소속사도 달라지고, 음악 스타일도 달라지고, 서는 무대도 달라지고, … 너희는 모든 게 달라졌으니 이제 하나일 수 없는 거야. 하나로서의 이달의소녀는 유령처럼 존재하면서 우리를 너희에게 여전히 붙들어 놓고 있지. 하지만 내가 이달의소녀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아르테미스를, 이브를, 이전처럼 계속 좋아할 수 있는 걸까?
이브를 보며 많이 생각했다. 아, 너 정말 답답했겠다. 이렇게까지 네가 목소리도 좋고 노래도 잘한다는 걸 잘 몰랐어. 이브는 대체로 혜주와 함께 퍼포먼스를 주도하는 멤버였고, 춤추고 싶어서 댄스동아리 만들려고 공부 개열심히 해서 전교 7등인가까지 했고, 뭐 얼빡만으로도 감동적이고… 이러다 보니 사실 이브의 목소리가 얼마나 좋은지 몰랐던 거다. 노래를 얼마나 잘하는 멤버인지도. 산술적으로 나눠도 180초짜리 노래를 12명이 나누면 인당 15초다. 하지만 지우, 하슬이, 진솔이 등 보컬멤들은 상대적으로 라인을 더 가져갈 수밖에 없지. 댄스브레이크 같은 것도 있고. 그러면 나머지 멤버들은 정말정말정말 짧은 시간만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거야. 너 정말 답답했겠다. 이렇게 다재다능한데…. 그래서 생각하게 됐다. 내가 계속 이달의소녀를 사랑하는 게, 그때의 모습에 매달려 그걸 빌미로 너희를 사랑하고 보러 가는 게, 정말 너희를 위한 일인지.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 너희도 다음 스텝이 필요한 것 같아. 특히 수영이와 혜주에게서 그런 모습을 많이 본다. 너희를 사랑해볼게, 우리 주변을 맴도는 유령 말고.
아르테미스 응원봉은 활처럼 생겼다. 별명은 화살봉. 그걸 들고 있으면 슬프고 속상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기뻤어. 집에 와서 오빛봉의 다 닳은 배터리를 빼서 상자에 넣어 정리했어. 집회 나갈 때만 다시 들고 다니려고. 어쩌면 이제야 나는 너희를 사랑할 수 있게 된 걸까?
이달의 소녀라는 편지가 영원히 나에게 도착하지 않으리라는 걸 받아들임으로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