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강연을 준비할 때마다, 북토크를 준비할 때마다, 그 남자애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그것은 나에게 제대로 설명하라고 책망하는 목소리이기도 하고, 자신의 고통을 알아달라고 호소하는 목소리이기도 하고, 나를 바보취급하는 목소리이기도 하다. 책망, 호소, 비난, 이 모든 것이 뒤섞인 목소리. 나를 해치는 타자의 목소리, 고통받는 타자의 목소리, 또 다른 누군가를 해치는 타자의 목소리, 이 모든 걸 통해 자기 자신을 해치고 있는 타자의 목소리. 책도 절반밖에 안 읽고 말도 무례하게 하던 그 북토크 참가자의 목소리는 나에게 왜 이리도 강하게 남아 있을까. 왜 넌 벌써 내게 유령이 되었나. 고작 그 몇 시간의 대화만으로.
++ 그래도 그날 네가 나에게 응답한 것이 있다면 그건 책임에 대한 이야기일 테다. 산책이 끝나기 직전에, 상가 건물로 돌아가면서 했던 이야기. 사람은 생각보다 많은 일을 할 수 있고, 문명이 그것을 더욱 강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그 일의 결과를 책임지는 건 다른 일이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보다 내가 그것을 책임질 수 있는지를 기준으로 나아갈 길을 결정하는 것이 나을 수 있다, 라는 이야기에 그는 반응했다. 저는 언제쯤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게 될까요? 그 순간은 빛나는 순간이었다. 그 전후로 너는 한 번도 나의 말에 새롭다거나 자신은 잘 모른다거나 하는 식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너는 모든 걸 이미 겪고 안다고 강하게 착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직 이 순간에만 너는 무언가를 아는 사람이었다. 그 빛나는 순간의 망설임을 오래도록 가져가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