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랑 얘기하다가 생긴 의문.. 철학을 왜 하는가? 혹은 왜 해야 하는가? 철학은 필요한가? 철학은 (다른) 누군가에게 필요하기 때문에 수행되는가? 혹은 자신의 욕구면 충분한가?
이를테면, 어떤 사상가의 이론 체계 안에서 어떤 개념 x를 개념화하는 이론 논문을 기획한다고 치자. 근데 이때 x를 개념화하는 방식이 지금, 여기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가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다. 이론은 아무튼 ’보편‘을 추구하니까.
그러나 경험연구자인 나는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론 또한 모든 지식과 마찬가지로 특정한 맥락과 상황 안에 존재하는, 상황지워진 지식이며, 그 의미 또한 이 간황에서 나오는 게 아닌가? 논문이라는 것도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특정한 이해관계자들 사이에서 승인되고 발행되어 가치화되는 과정 안에 있는 문서일 뿐이지 않나? 지식이라는 것은 이것의 결과이고.
그러나 이런 쉬운 비판 말고, 좀 더 생각을 밀어 보자. 특정한 누군가의 이론 체계 안에 특정한 개념을 기입하는 일의 어려움에 초점을 맞춰서 말이다. 이것은 말 그대로 인셉션 같은 것이다. 외삽적 시작. 버틀러의 권력의 정신적 삶의 마지막 장이 정신적 시작psychic inception인데, 정확히는 정신의 외삽적 시작이라고 번역했으면 어땠을까 싶기도 하지만.
아무튼, 영화 인셉션과 겹쳐 보자. 인셉션은 누군가의 꿈으로 들어가서 어떤 생각을 그의 것인 것처럼 속여서 심어놓는 일이다. 그건 생각을 훔치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새로이 기입된 것이지만 새롭지 않은 듯이 속여야 하는 것, 그것은 일종의 생산적 기만이며 다른 의미에서의 ‘지적 사기’다.
그렇다면 이론적 인셉션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특정한 사상가와 이론 체계에 대한 인셉션이고, 이들에 대한 생산적 기만이자 지적 사기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이론적 인셉션은 가장 어렵고, 흥미로운 일이며, 가치 있는 일이다. 이론을 공부하고 배워서 다른 데 적용하는 건 기껏해야 초보적인 산업스파이 정도 되는 것이지만, 어떤 이론에 은근히 무언가를 새로이 삽입하는 것은, 마치 새로운 장면이나 생각을 은근히 주입당한 사람처럼, 그 이론의 기억을 조작하여 다른 생각과 행동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즉, 이론적 인셉션은, 이론의 배움과 적용을 넘어, 이론 자체를 변형함으로써 외삽되는 개념 자체가 함께 변하는 일종의 개념적 화학작용을 일으키는 것이다. 즉, 그것은 이론 자체에의 개입이며, 그 이론의 기억을 조작함으로써 그 이론으로 ‘할 수 있는’ 것뿐 아니라 ‘할 수 있었을’ 것들을 만들어냄으로써 그 이론으로 기존에 이루어진 작업들을 모조리 다시 볼 수 있게끔 한다. 즉, 그 이론이 동원된 작업들을 그 이론이 알아서 재구성하고 반박하고 무력화하고 보완하게끔 만드는 과정인 것이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이론적 인셉션이란, 말 그대로 이론 자체의 외삽적 (재)시작이며, 이론적 작업들의 재시작과 갱신에의 (거부할 수 없는) 요구인 것이다. 그럼으로써 지나간 모든 이론적 작업에 지금 다시 응답할 의무를 부과하고, 그럼으로써 그것들을 응답할 수 있는 존재로 생기를 부여하는re-vitalize/re-animate 과정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당할 수밖에 없는 기만이자 사기이며, 무엇보다도 그 이론과 외삽될 대상 모두에 대한 연구자의 뒤틀린 사랑에서 비롯된 이종교배다. (그것은 신성모독까지도 나아갈 수 있을까?)
이론의 외삽적 재시작이 그 이론 자체, 그 이론을 활용한 연구들, 그 이론을 공부하고 적용하는 이들에게 모두 응답의 의무를 부과할 때, 어떤 이론의 현재성 혹은 시의성은 외삽 자체가 아닌 그것에 따라붙을 응답들을 통해 마련되며, 외삽은 현재성을 위한 하나의 중요한 토대를 구성하는 과정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