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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념과 수용

Created
2025/03/18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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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를 받아들이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상처를 극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어쩔 수 없이 도달하게 되는 포기, 즉 체념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체념은 수용의 조건이다. 특히 그것이 질병이나 장애, 혹은 다른 신체와 결부된 주변화의 문제일 때, 체념은 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몸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이데올로기적 실패의 과정이며, 수용은 1차 이데올로기와 2차 이데올로기의 차이로 인한 이데올로기적 반역이 아닌, 내 몸과 2차 이데올로기의 차이로 인한, 혹은 이데올로기화된 신체 이미지와 실제 신체의 경험 사이의 차이로 인한 호명의 실패, 주체화의 실패, 그래서 자리를 부여받지 못하는 혼란이 아닐까. 이때 호명에 돌아서지 않으려면 그가 부르는 것이 내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제 내가 그가 부르는 ‘너’가 될 수 없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이 체념이다. 호명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호명에 응할 수 없는 나의 한계를 통해 호명의 불가능성을 이해하는 과정. 특정한 신체 이미지에 대한 애착의 포기를 통한 주체 되기의 실패. 자신의 주변화된 신체를 수용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 어쩌면 좌절감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방향으로 갈 수도 있는 게 아닐까? 체념이 반드시 무너짐을 의미하지 않고, 좌절감 이후 그것의 완전한 극복이 아니라 그것을 안고 살아가는 일이 중요하다면.
++ 어쩌면 이것이 꿈속의 꿈을 꾸게 하는 좌절감과 연결된 건 아닐까? 취소선이 그어진 꿈으로부터, 바로 그 주름으로부터 새로운 꿈이 시작된다면, 체념을 통한 수용은 바로 그 주름과 관련된 무언가를 보여주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