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심 경제 속 질병과 장애의 ‘매력’은 어떻게 구성되는가?
- “취약한 몸들의 이야기하기와 돌봄 윤리: 유튜브 질병·장애인 브이로그를 중심으로”에 대한 토론문 -
장애와 질병은 미디어에 의해 일방적으로 재현되어 왔다. 나는 2020년 하반기에 KBS <다큐 인사이트> 제작진으로부터 연락을 받았고, 질병권과 관련된 논의에 공감하며 그러한 관점을 녹여 마이크로바이옴 관련 다큐멘터리를 만들겠다는 말에 다큐멘터리 촬영을 수락했다. 그러나 막상 촬영이 시작되자 이들은 전형적으로 질병을 ‘불행’이나 ‘불편’으로 전제하는 질문들을 연발했다. 일부러 모호하게 대답하면, 그러한 프레임에 응할 수밖에 없는 질문을 재차 던졌다. 결국 다큐멘터리에는 내 질병의 불행과 이를 압축하는 어머니의 눈물만이 담겼다.
이해수의 발표는 최근 유튜브 생태계에서 활동하는 질병·장애인 브이로그들을 중심으로 하는 인터넷 문화기술지(ethnography) 방법론과 해당 브이로그를 생산하는 유튜버들에 대한 별도의 면담을 통해 다양한 몸들이 만날 때, 그들이 서로의 취약성에 감응하는 방식을 살펴보며 유튜브라는 온라인 플랫폼에서 가능해지는 소수자의 자기 재현과 돌봄 윤리의 한 장면을 포착하는 듯하다. 소위 레거시 미디어의 제작진이 질병·장애인을 얼마나 폭력적으로 타자화하는지 겪기도 한 사람으로서, 이 발표가 새로운 가능성과 희망을 당사자들의 발화와 이에 감응하는 시청공동체의 관계에서 발견하고자 한다는 점에 깊이 공감했다.
발표의 목표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브이로거 개인의 고유한 질병·장애 경험 이야기는 정치 담론의 측면에서 어떠한 의미를 갖는가? 둘째, 브이로그 속 질병·장애인의 ‘이야기하기’는 어떤 성격의 연대를 형성하는가? 이를 위해 이해수는 브이로거들이 질병·장애를 둘러싼 기존의 관습적 담론에 기대지 않고, 고유한 인격적 주체로서 자신을 이야기하는 분투의 과정, 그리고 이들과 시청공동체가 새로운 형태의 돌봄망을 형성하는 과정을 분석한다. 이 모든 과정의 중심에는 말뿐 아니라 몸도 매개로 하는 이야기하기(storytelling)가 있고, 발표에서 명시하지는 않았으나 그에 대한 감응으로서의 경청이 있을 것이다.
이해수의 연구가 발견한 것은 질병과 장애에 관한 2인칭의 대화가 성립하는 순간들인 듯하다. 《몸이 말이 될 때》(동녘, 2022)에서 나는 질병과 장애에 관한 대화가 오직 당사자의 관점에서 발화되는 1인칭도 아니고, 의료 정보 등으로 환원되는 3인칭도 아닌, 서로의 관계 안에서 이해되는 2인칭이어야 한다고 썼고, 발표의 초반부에 언급되는 것처럼 상호작용이 가능한 유튜브라는 공간은 2인칭의 대화가 일어나기에 꽤 적합한 공간으로 보인다.
나는 발표문에 언급되는 연구의 한계와 후속 연구를 위한 제언과 관련하여, 어떻게 하면 후속 연구에서 해당 연구의 한계를 보완할 수 있을지에 초점을 맞추어 토론에 임하고자 한다. 발표자가 발표문에서 언급한 한계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질병인과 장애인 집단 내부의 차이를 드러내고자 했으나 경제적 차이, 학력, 연령, 친구와의 교류 정도는 고려하지 못했다.
(2) 브이로거들이 말하지 않는 지점을 다루지 못했고, 시청공동체와 브이로거를 둘러싼 갈등 및 상호 비판의 목소리를 검토하지 못했다.
(3) 유튜브를 둘러싼 플랫폼 경제 논리를 고려하지 못했다.
(4) 연구 윤리를 지키기 위해 민감한 질문들을 이어나가지 못해서 비판적으로 분석할 만한 지점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했다.
(5) 질병·장애인 중에서도 침묵할 수밖에 없는 이들의 이야기를 다루지 못했다.
나는 ‘관심 경제(attention economy)’와 ‘관심 체제(attentional regime)’의 문제가 이 다섯 개의 한계를 관통한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시장주의적으로 이해되는 관심 경제 속에서 관심은 보통 양화되어 돈으로 환산되곤 하지만, 유튜브 등의 소셜 미디어와 같이 온라인에서 우리가 서로를 인식하고 관계를 맺는 공간을 관심 경제가 관통하고 있기에 여기서 관심은 동시에 관계적이며 윤리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관심 경제에서 관심을 주고받지 못하는 것은 어떤 관계 안에서 존재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관심을 주고받는 것은 타인과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의미이며, 달리 표현하면 타인과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음을 의미하게 된다. 관심 경제 안에서 우리는 관심을 받음으로써 인식론적 행위자(epistemic agent)가 될 수 있다. 우리는 관계를 맺으며 타인이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 즉 인식론에 영향을 주거나 받으며, 매 관계 안에서 새로운 존재로, 특히 소통을 위한 공통 기반이나 상식으로서의 인식론을 만들어나갈 수 있는 행위자로 거듭난다. 관심 경제 안에서 이것은 관심을 매개로 이루어진다.
누군가가 관심 경제 안에서 인식론적 행위자가 되려면 적정 수준의, 적절한 형태의 관심이 필요하기에, 그러한 관심을 얻지 못하는 이는 인식론적 관심 결손(epistemic attention deficit)을 겪게 된다. 이는 어떤 이가 인식론적 행위자가 될 수 없도록 하는 인식론적 부정의(epistemic injustice)이기도 하다. 지금 사회에서 누가 어떤 관심을 얼마나 받느냐의 문제는 적지 않은 부분 문화적이고 사회적으로 결정된다. 이때 한 사회의 관심 체제(attentional regime)는 주변화된 집단들이 적절한 형태의 관심을 끌기 더 어렵도록 만듦으로써 관심 경제 안에서 사회적 권력 관계를 안정화하는 장치로, 권력을 가진 이들을 위해 기능한다(Smith & Archer, 2020).
여기서 관심 체제는 누가 어떤 관심을 얼마나 받을지에 영향을 주는 문화적 장치로, 관심을 끄는 핵심적인 요소인 ‘매력’을 구성하는 데 깊이 관련된다. 관심 경제의 맥락에서 우리는 매력을 ‘긍정적인 관심을 많이 받을 수 있는 개인의 특성’ 정도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매력은 관심 경제 속에서 인식론적 행위자가 되기 위한 조건이며, 이는 한 사회에서 무엇이 어떤 형태의 관심을 얼마나 받을지 결정하는 관심 체제를 고려하여 연출된다.
유튜브는 콘텐츠의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의 경계가 흐려지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관심 경제와 검색/추천 알고리즘 등이 결합되어 형성된 공간이기도 하다. 여기서 알고리즘은 특정한 영상을 검색하고 시청하는 사람을 특정한 형태로 상상함으로써, 시청자들이 유입되고 시청공동체를 형성하게 되는 과정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한 관심 경제는 콘텐츠의 생산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발표자가 언급했듯 이러한 지점들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기에 ‘무언가가 말해지고 있다’를 강조하고 ‘무엇이 어떻게 말해질 수 있는가’는 누락되는 빈틈이 발생한다. 이는 문화기술지 방법론을 사용했지만, 현장 자체에 대한 기술(description)에서 핵심적인 부분들이 생략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요컨대, 발표는 현장 기술에서 관심 경제와 알고리즘 등의 문제를 충분히 다루지 않음으로써 누가 어떤 과정으로 시청자가 되고 시청공동체에 속하게 되는지, 이들을 끌어들이는 매력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에 대해 충분히 논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질병인과 장애인이 관심 경제 안에서 지니는 ‘매력’이란 무엇인가? 발표는 브이로거 13인의 사례를 검토했고, 나는 주로 <원샷한솔> 채널의 댓글들을 중심으로 분석했기에 그 범위와 양에서 큰 차이가 나고, 전체적 경향성과는 다소 거리가 있을 수도 있지만, <원샷한솔> 채널의 댓글들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키워드는 ‘긍정적 태도’였다. ‘장애를 갑자기 갖게 되었음에도 이렇게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원샷한솔로부터 사람들은 ‘영감’과 ‘희망’을 얻기도 하고, ‘장애가 없음에도 신세 한탄을 하는’ 자신에 대한 ‘반성’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영감, 희망, 반성의 댓글들은 꽤 많은 호응을 얻고 있다.
사회는 장애를 불행으로 전제하기에, 장애인의 긍정적 태도는 ‘반전 매력’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간다. 그러한 의미에서 발표에서 언급하는 의미 전복과 혐오표현 되받아치기의 경우, 콘텐츠 생산자들이 그러한 의도를 갖고 있고 어떤 가능성을 갖고 있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실제로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소비되고 소통되고 있는지가 중요한데, 댓글들을 보면 이 또한 ‘멋진 장애인’이나 ‘긍정적인 자기 인식’ 정도로 환원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리고 그러한 환원의 기저에 관심 체제가 존재한다. ‘자신의 소수자성을 재밌게 웃어넘기는 것’은 “강력한 풍자”(34)보다는 때로 비장애인들이 원하는 ‘재밌는 소수자’의 모습에 가깝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는 ‘수용’과 ‘부정’의 뚜렷한 이분법과도 연결된다. 자신의 장애에 대한 ‘긍정적 태도’는 그가 자신의 장애를 ‘받아들인’ 증거로 이해되고 있는데, 발표는 투병과 치병을 구분하는 방식에서 드러나듯, 질병/장애의 수용과 부정 사이의 선을 꽤 뚜렷한 형태로 전제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 둘은 사실 그렇게 명료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수용은 자주 체념의 연장선이며, 체념에는 언제나 부정이 결부되어 있다. 질병과 함께, 질병 안에서 살아가는 일은 ‘건강 없음이라는 절망’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건강 없음이라는 절망’과도 더불어 살아가면서, 그 절망을 끌어안은 채로 다른 미래, 혹은 대안적 시간성을 상상하는 일이다. 이는 장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질병과 장애가 실제로 주는 통증이나 수치심을 삭제하는 ‘부인 전략’을 사용하지 않으면서, 그러한 통증과 수치심도 통합된 ‘좋은 미래’를 어떻게 상상할 것인가? 수용은 바로 그러한 문제다. 따라서 수용을 긍정적 태도로 환원하는 일은 ‘극복’으로부터 ‘수용’을 구출하고자 노력한 역사를 배반하게 된다.
이러한 ‘긍정적 태도’와 ‘장애 수용’이 매력으로 구성될 때, 브이로거들이 언급하지 않는 문제는 매력을 구성하기 위해 생략한 현실일 것이다. 물론 부정적 감정 또한 관심 경제에서는 중요한 자원으로 작동하곤 하지만, 이해수의 연구에서 브이로거들은 질병과 장애를 둘러싼 기존의 담론에 대한 대항 담론을 만들고자 하는 의지를 여러 차례 내비쳤고, 이는 주로 질병과 장애를 ‘불행’과 동일시하는 것에 대한 거부였다. 그러한 맥락에서 이들은 질병과 장애를 불행으로 여기지 않는 시청공동체를 갖고자 했을 것이고, 이를 위해 긍정적이고 활동적인 면모를 강조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여성’, ‘장애’, ‘질병’과 같은 특정 키워드로 일관성 있게 묶이는 콘텐츠를 ‘뚜렷한 컨셉’으로 여겨서 범주화하기 쉬운 온라인 공간의 이용자 및 알고리즘의 특성을 고려할 때, 이들은 ‘장애여성’ 혹은 ‘장애’를 제외한 변수를 최소화해야 했을 것이다. 이러한 의도들이 맞물려 이들의 콘텐츠에서 계급과 관련된 이야기가 소거된 것은 아닐까? 장애인의 독립적 경제 활동이 어려운 한국 사회에서 계급에 관한 이야기는 장애인에게 매력을 구성하는 요소가 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 대해 연구자가 질문하지 않은 일은 브이로거들이 시청공동체와 관심을 주고받는 매개가 되는 매력에 대해 질문하지 않는 일이 된다.
질병과 장애는 언제나 ‘진짜/가짜’의 이분법을 마주한다. 특히 투렛증후군을 연기하여 많은 관심을 얻었던 ‘아임뚜렛’의 사례 이후, 질병인과 장애인 유튜버들이 마주하는 증명의 압박은 더욱 강해졌다. 그러한 점에서 ‘암’과 같이 진단명이 뚜렷하고, 모두가 ‘심각하다’고 인지하는 질병은 관심 경제에 편입되기에 미진단 상태나 인지도가 떨어지는 희귀질환보다 유리하다. 특히 암의 경우 일상 전반에 영향을 준다는 인식이 강하기 때문에, 일상 전체에 대한 병리화라는 치명적인 타자화가 관심 경제 안에서는 매력으로 구성될 수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장애인 브이로거들도 정신장애에 비해 비교적 덜 의심받는 신체장애인으로만 이루어졌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이해수의 연구는 시청공동체와의 관계도 다루지만, 브이로거들의 면담 내용을 길게 인용하면서 당사자들이 자신의 활동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주목한 듯하다. 하지만 에스노그래피에서는 당사자들의 의도보다도 실제로 그 활동이 어떤 자장(matrix) 안에서 어떤 기능을 하고 있는지,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특정한 말들을 의미화하고 있는지도 중요하다. 이들의 미디어 실천은 유의미하지만, 그것은 어느 범위까지 유의미할 수 있는가? 무엇이 매력을 구성하여 관심을 끌어당기는가? 한편으로 우리 모두는 브이로거들이 어떤 측면에서 관심 체제의 요구에 부합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 않음으로써 다시금 ‘말할 수 있는 장애인/질병인’과 ‘말할 수 없는 장애인/질병인’ 사이의 위계를 만드는 데 동참하고 있지는 않은가?
연구자는 연구 참여자들을 의도치 않게 타자화할 불안과 머뭇거림에서 이들에게 ‘민감한 질문’을 던지지 않았지만, 인터뷰에서 필요한 것은 질문을 던지되 상대의 권한을 분명히 인지하고 알림으로써 연구 참여자가 ‘불쾌한 질문을 거절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는 관계로서의 인터뷰를 만들어나가는 일일 테다. 후속 연구에서는 브이로거-시청공동체-일반 대중-관심 체제의 연결망 안에 존재하는 부단한 협상과 그것이 결렬되는 장면들, 여기서 드러나는 매력의 형태를 통해 브이로거들 사이의 차이를 더 다각적으로 파고들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관심 체제는 관심을 매개로 기존 사회의 권력 관계를 공고히 하기 때문에, 매력을 중심으로 브이로거들 사이의 차이를 열어젖히면 그러한 관심 체제 자체를 문제화할 수도 있다. 관심 체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때, 관심 경제 속 소수자의 저항을 더 급진적으로, 더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 참고문헌
Smith, Leonie & Archer, Alfred. (2020) “Epistemic Injustice and the Attention Economy.” Ethic Theory Moral Prac, 23, pp. 777–7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