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사회』에서 울리히 벡은 기본적으로 19세기 봉건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이행한 과정을 근대화라고 이해하고 있다. 특히 자연을 모두 이해하고 통제하고 지배하여 이용할 수 있다는 맥락에서 ‘산업사회’가 등장하는 과정이 바로 근대화다. 근대화로 인해 20세기 말에 이르러서 자연과 사회의 관계가 재설정됨에 따라 자연은 전적으로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성질을 띠게 되었고, 이러한 “자연의 사회화의 보이지 않는 부수효과는 자연의 파괴와 자연에 대한 위협의 사회화”다. 그리고 이는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모순과 갈등으로 변형”된다.
바로 여기서 ‘위험사회’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벡은 “(산업적) 위험사회의 개념은 문화에 의해 하나로 통합된 ‘자연’에서 출발하며, 그것이 입은 상해는 변형되어 사회적 하부체계에 그 상흔을 남긴다”고 말하는데, 이는 자연과 사회가 서로의 외부가 아니게 된 상황이 자연의 파괴가 사회 구조에도 피해를 주는 구조임을 의미한다. 즉, “근대성이 선진적인 상태에 이른 곳에서는 […] 사회는 더 이상 자연에서 자율적이지 않다.”
벡은 위험이 사회적으로 생산되고 분배되는 과정과 원리을 상세히 밝히고자 노력한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위험’은 무엇인가? 근대가 불러온 위험은 “핵분열이나 방사성 폐기물의 축적처럼 전 인류를 대상으로 하는 […] 지구적 위난(danger)”으로, 벡은 주로 위험사회를 ‘지구 전체의 문제’로 이해하면서 기후위기 등과 연결하곤 한다. 그는 “과거의 위해들은 위생학 기술의 저공급에 연원을 둔 것”이지만, “오늘날의 위해들은 산업적 과잉생산”이 원인이라고 말하며 “이것들은 산업화가 낳은 대량생산물이며 산업화가 지구적으로 전개되면서 체계적으로 강화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위험은 산업시설을 넘어 “이 행성의 모든 생명체를 위협한다.”
이 글에서 나는 이를 건강 혹은 질병과의 관계 안에서 이해하고자 한다. 위험사회를 만들어낸 근대의 과학기술은 의료와도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나를 아프게 살려 둔 사회
많은 사람이 그렇듯, 나도 살면서 몇 번의 죽을 고비가 있었다. 1995년, 나는 태어나다가 어머니와 함께 죽을 뻔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당시 나는 다른 태아들보다 머리가 유독 단단했다. 나는 ‘자연분만’이 아닌 제왕절개를 통해 태어났다. 외과 수술 방법이 발달하지 않았다면, 혹은 발달했더라도 나의 어머니가 그것을 받을 만한 여건에 있지 않았다면, 나도 어머니도 스무 해도 더 전에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2005년, 나는 맹장염이 있는 줄도 모르고 복통을 계속 참다가 맹장이 터져서 복막염에 걸려서 쓰러졌다. 예전 같았으면 죽었을 수도 있다는 설명에 기겁했던 경험이 있다.
2014년, 항문 근처의 피부가 크게 부풀어 올라서 걷기도 힘들 지경이 되었을 때, 나는 집 근처의 작은 항문외과에서 수술을 받았다. 항문 주위 농양 제거 수술이었다. 의사는 나의 농양이 고환까지 침범할 뻔했다며, 조금 더 늦었으면 정말 크게 위험했을 거라고 말했다. 피부 안을 농양이 아주 많이 갉아먹었는데도 겉으로 드러나는 흔적은 작은 구멍 하나뿐이라는 게 놀라웠다. 수술 이후 후유증이 심했지만, 병원을 옮기고, 크론병 진단을 받으면서 점점 나는 나의 몸에 맞는 의료적 조치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지금도 면역억제제를 먹으며 살아가고 있다.
여기까지만 적으면 흔한 생존과 치료 서사일 것이다. 하지만 하나씩 따져보면, 발달한 의료기술을 가진 현대 사회가 나를 살리기만 했을지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크론병의 경우, 여전히 그 원인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다양한 가설들이 있지만, 사실 그중 많은 수는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문화와 관련이 깊다. 혹자는 크론병이 ‘서구적인 식습관’에서 비롯된다고 말하는데, 현대에 ‘서구적인 식습관’을 유지하는 데에 들어가는 음식들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스며들어가는 화학 물질들을 생각한다면 크론병은 단지 ‘운이 안 좋아서’ 겪게 되는 것이 아니다.
제왕절개 또한 크론병의 원인일 수 있다는 가설이 있다. 어떤 연구들에 따르면, 자연분만 과정이 태아에게 필요한 장내 미생물들을 제공하며, 자연분만을 거치지 않았다면 장내 미생물의 부족으로 크론병이 생길 수도 있다고 했다. 모유를 먹은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 사이에서도 차이가 생겨서 후자에게 크론병이 생길 수도 있다는데, 어머니는 제왕절개 이후 심한 후유증으로 다량의 항생제를 투여받았다. 그런 상황에서 나오는 모유는 아이가 먹을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 제왕절개는 나와 어머니를 살린 동시에 두 사람에게 큰 후유증을 남긴 양가적인 경험이 된다. 물론, 이 가설들 중 어느 것도 아직 확실하다고 입증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아직 명백한 인과관계가 없음에도 이런 가설들이 다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되는 이유는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모습 때문이다. 그 사회는 우리가 무엇을 먹고, 마시고, 무엇으로부터 어떤 영향을 얼마나 어떤 방식으로 받는지 알지 못하는 위험사회다. 벡의 말처럼, “오늘날의 문명이 낳은 위험들은 분명히 인지되지 않으며 (식료품에 포함된 유독물질이나 핵 위협과 같이) 물리-화학적 공식의 영역에 자리 잡고 있다.”
이처럼 볼 수도, 들을 수도, 만질 수도, 냄새를 맡을 수도, 맛볼 수도 없는, 그야말로 감각 불가능한 위험을 끊임없이 생산해내면서 내가 덜 아프도록 치료해 주는 위험사회는 나의 염증을 줄여주는 동시에 나의 몸을 전반적으로 약하게 만드는 면역억제제와 같은 모순을 갖고 있다. 현대에 만성질환이 많아지는 건 한편으로 우리가 하나하나 알지 못하는 위험 물질 때문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현대의학의 발전으로 우리가 아파도 죽지 않고 살아남게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즉, 위험사회에서는 안전이 아닌 위험이 기본값이며, 우리의 몸에도 스며드는 위험으로 인해 건강이 아닌 질병이 기본값이 된다.
누가 안전한가
위험사회에서 사람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위험이 ‘지식’의 영역에서만 다루어지면서, 물리적·화학적·수학적 언어, 즉 과학만이 위험을 설명할 수 있다고 믿어지는 것은 생명정치 속에서 생명이 정치보다 지식의 영역에 포섭되는 것과 연결된다. 위험사회에서 위험은 과학자나 법률가와 같은 지식 생산층과 기업, 행정 관료들의 합작으로 생산·분배되며, 이는 대중이 알아듣기 어려운 수학적, 과학적 언어로 구성된다. 여기서 엄격한 인과관계를 입증하라는 요구는 실제 피해를 묵살하는 데 사용되곤 한다. 위험에 처한 이들은 자신의 위험을 인식하거나 입증하기 어렵고, 위험을 인식하는 이들은 위험을 이해하는 이들이다. 즉 위험에 관한 지식의 여부가 위험사회에서의 지위를 결정한다.
벡은 위험사회에서 “위난을 예측하고 참아낼 수 있는 능력, 생물지리학적 및 정치적으로 위난을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해진다”라고 말하는 동시에, 건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견해를 밝힌다.
“‘건강’은 확실히 문화적으로 고양되는 가치이지만, 그에 덧붙여 생존의 필요조건이기도 하다. 건강이 보편적으로 위협받는다면 모든 곳에서 영원히 실존 자체가 위협받을 것이다. 이 위협은 이제 경제적-정치적 체계를 마찬가지로 엄격하게 관통한다.”
그렇다면, 위난을 예측하고 참아낼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사람, ‘건강’이 위협받는 사람은 위험사회에서 어떤 지위를 갖게 될까? ‘생존의 필요조건’인 건강이 위태로운 사람들의 생존은, 위험사회를 구조를 고려한다면, 가능하지 않다. 위험사회에서 이러한 위협은 모두에게 다가가고, 결국 모든 사람의 실존이 위협받겠지만, 계급-특수적 위험을 상기한다면 정도의 차이와 순서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한다. 위험사회에서 먼저 죽는 존재들은 위험사회에서 살아남는 데에 필요한 능력, 즉 위험에 관한 지식을 갖지 못한 이들이다. 즉, 위험사회는 조건에 맞는 사람들을 (조금 더) 살게 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죽게 내버려 둔다는 점에서 명백히 생명권력을 행사하고 있다.
푸코는 생명권력의 시대에 의사들이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고 이야기하는데, 벡은 위험사회 속에서 의학이 생명을 관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울리히 벡은 『위험사회』에서 만성질환의 극적인 증가를 의학의 발전으로 인한 사회 변화의 한 결과로 해석한다. 실제로 만성질환 유병률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으며, 세계적으로 사망 원인의 상위를 차지하는 요소는 만성질환이다. 만성질환 대부분은 원인 불명의 희귀질환인데, 벡은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현재의 의학발전에서 진단과 치료법이 다양화하면서 의학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효과의 상당히 다른 차원을 볼 수 있게 된다. [...] 그 결과는 이른바 만성질환의 극적인 증가이다. 이를테면 더욱 정교한 의학적 및 기술적 감지체계 덕분에 진단될 수 있지만, 치료할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이 현재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없을 듯한 질병들이 극적으로 늘어난다.”
지금처럼 발전된 의학이 생산한 “(당분간 또는 영구히) 치료불가능하다고 스스로 규정하는 병리학적 조건들”에 따라 원래는 ‘낫거나 죽거나’의 영역에 있던 환자들이 이제는 만성적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모두에게 부메랑처럼 돌아오는 위험이 사방에 산재해 있는 위험사회에서는 질병 또한 그러한 위험의 한 양상이며, 동시에 근대화 과정에서 발전한 의학은 새로운 질병을 정의하고 생산한다. 이는 위험사회에서 지식이 위험을 정의하고 생산하는 하나의 모습을 보여준다.
“진단이 ‘진보’한 결과, 질병이 일반화되고 있다. 어떤 것이나 아무 것이나 ‘병’이 되거나 실제로 또는 잠재적으로 우리를 ‘병자’로 만들 수 있다. 실제로 느끼는 것과는 무관하게.”
즉, 위험사회에서 질병은 개개인의 경험이 아니라 오직 과학적 지식인 의학에 의해서만 판단되고, 진단되고, 치료될 수 있다. 벡은 앞서 위험사회에서 지식을 활용하는 이들이 질병을 자신의 이윤을 위해 사용할 수 있음을 경고했다.
“위험을 정의하는 사람들은 시장기회를 떠맡고 확대한다. 화학자 같은 사람들은 양쪽 편에 동시에 속한다. 그들은 사람들을 아프게 하고 나서 그들의 이차적 질환을 치료하기 위해 약을 먹인다(알레르기 치료를 예로 들 수 있다).”
하지만 질병에서도 차이는 있다. 벡의 논의의 문제는 전체적인 구조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오랜 시간이 걸리는 과정을 건너뛰고 구조의 귀결을 먼저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분명 위험사회에서 위험은 모두에게 영향을 주지만, 영향을 받는 정도는 개개인이 가진 몸, 그것에 결부된 계급, 성별 등의 변수에 의해 달라진다. 위험사회가 다른 구조들과 맞물릴 때 발생하는 효과는 사람들을 “규정짓고 측정하고 평가하고 위계화”함으로써 “규범을 중심으로 배치”하는 일이다. 즉, 생명권력은 위험사회에서 위험을 분배하는 원리이기도 하다.
“생명권력은 ‘인구(population)’로 파악된 ‘통계학적 생명’의 안전을 목표로 삼는다. […] 통계학적 정상성은 평균에서 벗어난 개별 생명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우생학의 메커니즘이 그러하듯, 무리 생명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필요에 따라 열등한 개체는 도태시켜도 된다는 것이 근대 생명권력의 안보 전략이다.”
생명정치는 생명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죽음을 생산한다. 사회의 안전 혹은 안보를 위해 어떤 죽음은 불가피하다는 뜻이다. 이때 ‘사회’는 곧 그 사회의 평균이나 정상을 의미하게 되며, ‘비정상’의 존재들은 전체의 안전을 위해 마땅히 희생되어도 괜찮은 존재로 취급된다. 근대 생명권력은 자유주의와 결합하여 ‘안전 메커니즘’을 형성한다.
“19세기 생명권력의 안전 메커니즘은 ‘자연’의 힘에 근거한 자유방임을 통치 원리로 제시했다. 가령, 질병을 통치하는 문제에 대해 규율 메커니즘은 (페스트 대처법처럼) ‘병자’와 ‘정상인’을 분리하고 각 개인에게 정해진 위치와 행동 규범을 부과하고 감시하는 방식을 취한다. 반면, 안전 메커니즘은 […] 병을 박멸 대상으로 보기보다는 감내해야 할 자연적 소여로 보고, 면역에 의해 소멸될 때까지 통계학적 차원에서 관리하려 한다. […] 안전 메커니즘은 식량난을 피할 수 없는 자연적 소여로 보고 곡물 생산에서의 자연적 순환과 시장에서의 교류를 통해 저절로 사라지도록 관리한다. 이런 정상화 과정에서 일부 사람들은 병들어 죽거나 굶어 죽을 것이다. 안전 메커니즘의 관점에 따르면, 그것 또한 불가피한 자연 현상일 따름이다. 관건은 통계학적 정상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생명권력의 안전 메커니즘은 위험사회와도 연결된다. 위험사회가 추구하는 것은 ‘안전’이기 때문이다. 위험사회에서 과학적 지식이 위험을 생산하고 분배하며 시장화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위험사회의 ‘안전’은 푸코가 말하는 ‘안전 메커니즘’과 같은 맥락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위험사회가 ‘안전’을 달성하고자 사용하는 도구는 생명권력이며, 거기서 성취되는 안전은 곧 ‘정상적인 사람’, ‘평균’의 안전이다. 이때 생명정치 안에서 정상으로 분류되고 길러지는 사람들의 핵심에는 ‘건강’이 있으며, 따라서 생명권력이 죽게 내버려 두는 존재들은 건강하지 않은 존재들이다. 위험사회에서 건강하지 않은 존재들이 총체적인 실존의 위기를 겪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건강중심주의(healthism)는 위험사회와 생명정치의 결합이다. 건강중심주의는 건강과 피트니스를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라이프스타일이자,신체와 관련된 일상 전반을 ‘건강’의 문제로 엮어냄으로써 원래 의료적 문제가 아니었던 것까지 의료적 문제로 포괄해내는 사고방식이다. 나아가 여기서 질병과 건강은 개인의 의료적 문제로 전환되고, 사회적 정상성에 기반한 ‘건강’의 정의는 개인들을 시장 의존적으로 만드는 동시에 라이프스타일을 표준화한다. 여기서 질병, 건강의 개인화는 개인의 자율성 확장과 자기실현 가능성의 확장이 아니라 개인의 ‘불안한 선택과 책임의 확장’으로만 진행되고 있다. 특히 오늘날 만연한 ‘생활습관병’이라는 명칭은 개인의 생활습관에 집중함으로써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사회와 구조의 문제는 희미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효과”를 불러오며, 결국 아픈 사람들에게 자책감을 안기는 동시에 “질병의 사회적 책임을 직접적으로 요구할 수 있는 주체적 힘”을 소멸시키는 결과까지 낳는다. 건강중심주의에서 건강의 추구가 자유의 박탈로 이어진다는 것은 그런 맥락이다.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라는 말로 대표되는, 건강한 것만이 ‘정상’이며 그렇지 않으면 치료되거나 도태되어야 한다는 건강중심주의는 질병을 가진 사람의 귀결이 두 가지뿐이라고 생각한다. 낫거나, 아니면 죽거나. 이러한 맥락에서 낫지 않는 질병을 가진 이들, 즉 만성질환자들은 생명보다는 죽음에 가까운 존재이며, ‘정상화’되기 힘든 존재다. 바로 이 점에서 이들이 “어차피 치료되지 않을 사람으로 여겨지고, 그것이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는 인식으로 이어지는” 상황이 발생한다.
질병권의 가능성
질병권은 아픈 사람이 온전히 아플 시간과 공간, 그걸 보장하는 사회로의 근본적 변화를 요구하는 급진적인 제안이다. 건강권이 아직 없거나 언제나 잃을 수 있는, 따라서 계속해서 (신년 계획 같은) ‘목표’로 설정되는 건강을 위한 권리, 즉 미래를 위한 권리라면 질병권은 지금 당장 내 몸과 함께 살아갈 때 필요한 권리, 즉 현재를 위한 권리다.
따라서 질병권은 건강권의 ‘건강’을 단지 ‘질병’으로 바꾼, 건강권의 대칭으로서의 ‘질병의 성취와 유지’를 위한 권리가 아니라, 질병이 “죽음이 아닌 삶의 조건”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권리일 것이다. 조한진희는 질병권이 “건강권을 포함하지만 초점이 다르고 좀 더 확장된 개념”이라고 언급하며, “질병을 중심에 배치하고, 아픈 몸을 사회의 기본 몸으로 설정하며, 질병을 겪는 상태도 삶의 ‘정상적’ 시기로” 이해하는 방식이라고 말한다. 즉, 건강권과 질병권은 초점이 다르다.
위험, 질병이 기본값이 되는 위험사회에서 모두가 살아남을 수 있는 사회는 “건강이 아닌 난치를 새로운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질병과 함께 살고 싶은지의 여부는 개개인의 맥락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질병과 공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이 이미 도래한 현실이다. 질병권은 그러한 현실에서 지금 당장 사람들이 살아가는 환경을 바꾸어 위험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한 도구라고도 할 수 있다. 또한, 손에 잡히지 않는 ‘건강’ 대신 명백히 느껴지는 아픈 몸이라는 현재를 통해 미래를 계획하고 건설해 나가겠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즉, 질병권은 위험사회에서 인간이 처한 조건 자체가 위험, 질병이라는 걸 인정하는 위험사회의 새로운 존재론인 동시에, 바로 그러한 현실을 비판적으로 되묻는 자기언급적(self-referring) 질문이기도 하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건강중심주의는 언제나 건강을 잃을 수 있는 위험사회, 그리고 좋은 삶을 위한 필수 조건으로 정의된 ‘건강’을 모두의 몸에 기입하려는 생명정치의 결합이다. 건강중심주의는 건강한 사람을 살게 하고, 아픈 사람을 치료하려 하며, 치료되지 않는 사람에게서는 좋은 삶의 기회를 빼앗는다. 질병권은 치료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치료(치유)만을 강제하는 상상(curative imaginary)을 거부한다. 치유를 강제하는 상상은 장애에 대해서 “오직 치료만을 상상하고 가정할 뿐 아니라, 치료 이외의 어떤 것도 상상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이해 방식을 의미한다. 이것은 장애에 대한 개념이지만, 동시에 장애에 대한 전면적인 의료화, 병리화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기에, 나는 이를 질병에도 적용한다.
그러한 맥락에서, 질병권은 치료와 더불어 치료 바깥의 삶을 상상함으로써 아픈 사람이 아픈 사람으로서 함께 살아가는 사회를 기획한다. ‘다른몸들’은 <아픈 몸 선언문>을 통해 현대 사회에서 아픈 몸이 그저 다시 건강해지기 위한 과도기로만 여겨진다는 점을 지적하며, 그런 사고방식을 바꾸지 않는 한 우리가 “죽게 내버려”지는 삶들을 구제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우리는 아픈 몸을 가진 채로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고민해야 한다.
질병권이 자기언급적 질문이라는 지점에서 특히 우리는 질병이 분배되는 양상을 짚어야만 한다. 벡은 “위험사회는 계급사회가 아니다”라고 단언하면서, 위험사회의 문제를 계급 혹은 자본으로 환원하는 데에 강하게 반대한다. 그는 위험사회의 ‘부메랑 효과’가 계급이나 국가와 같은 경계선들을 무시하기에 “빈곤은 위계적이지만 스모그는 민주적이다”라고 주장하지만, 동시에 “계급사회와 위험사회의 불평등은 중첩되며 서로를 조건지운다. 즉 후자는 전자를 생산할 수 있다. 사회적 부의 불평등한 분배는 위험생산을 위한 거의 난공불락의 방어벽과 논거를 제공할 수 있다”라고도 말한다. 계급사회와 위험사회는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작동하며, 계급과 연동되는 위험, 즉 ‘계급-특수적 위험’은 그러한 연결성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부는 상층에 축적되지만, 위험은 하층에 축적된다”라는 표현은 우리에게 익숙한 이야기다. “위험은 계급사회를 […] 강화하는 것으로 보인다. 빈곤은 불행하게도 위험을 만연시킨다. 그와 반대로 (수입, 권력, 또는 교육의 면에서) 부자는 위험으로부터의 안전과 자유를 사들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계급-특수적 위험’이다. 아픈 사람으로서 나는 계급-특수적 위험을 고려할 수밖에 없다. 아프려면 돈이 필요한데, 아프면 몸도 돈도 날 따라주지 않는다는 지극히 일상적인 경험들이 바로 아픈 사람의 현실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의료비를 대기 위해 일을 해야 하는데, 아프면 취직이 어렵고, 건강한 몸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일터에서는 일하는 것 자체가 실제로 어렵다. 애초에 건강이 노동력을 중심으로 구성된 개념이기도 하기에, 질병 혹은 병력(病歷)을 가진 이는 노동시장에서 밀려난다.
에바 일루즈는 정신분석학과 심리학이 일상 전반에 스며들면서 직장 내의 관계나 정신질환처럼 명백히 계급화되어 있는 것들이 마치 그렇지 않은 것처럼 ‘민주화’되었다는 인식이 퍼지는 현상을 지적한다. 정신질환의 ‘보편성’이 질병과 계급 사이에 실재하는 연관성을 분석에서 탈각시킨다는 것이다. 질병이 ‘보편적’인 위험이 된 지금의 위험사회에서도 같은 오류가 발생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위험사회가 계급사회와 맞물려 돌아가면서 계급에 따라 분배된 위험이 기존의 계급을 더욱 공고히 하거나, 더욱 열악한 계급 지위로 아픈 사람을 몰아간다. 빈곤의 위계가 위험의 위계로도 이어지는 이 현실에서 “스모그는 민주적”이라는 벡의 표현은 얼마나 많은 현실을 놓치고 있는가?
질병은 실제로 우리의 몸을 아프게 하는 실존적 문제이기 때문에 종종 계급적 문제보다 개인적 불행으로 축소된다. 그런 측면에서 질병권이 사회적 차별과 불평등의 문제에서 출발한 개념이라는 점은 중요하다. 질병권은 위험사회 속 인간의 새로운 존재 조건 자체를 짚을 뿐 아니라, 거시적 틀이 잡아내지 못하는 아픈 몸들의 현실을 포착해내고, 바로 그 현실을 바탕으로, 그 현실에 복잡하게 얽힌 권력과 차별에 맞서 급진적인 변화를 상상하고 만들어나갈 수 있는 아픈 몸들의 무기다.
무엇보다도 질병권은 과학적 지식을 갖춘 ‘전문가’의 지식만을 인정하는 위험사회에서 아픈 몸들의 경험을 저항적 지식으로 발굴해냄으로써 아픈 몸들의 언어를 만들어나간다. 이는 단지 ‘당사자의 목소리’를 복원하는 일을 넘어, 위험사회가 사람을 화학적, 수학적, 의학적 전문 지식으로 위계화하는 원리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 제기이기도 하다. 질병권은 질병에 관한 지식이 형성되는 과정 자체에 아픈 몸이 그 자체로 지식이자 지식 생산자로서 참여할 수 있게 함으로써 아픈 몸들의 역량강화(empowerment)를 이루어낼 수도 있다. 아픈 몸들이 언어를 만드는 하나의 경로라는 점에서 질병권은 그 자체로 무기인 동시에, 우리의 언어가 건강중심주의에 대항하는 무기라는 점에서 ‘무기를 만드는 무기’이기 때문에 ‘권리를 가질 권리’로서의 인권 개념과도 조응하며 인권 개념을 확장하는 데로도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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